1. 진보신당이 이번 총선에서 기대할만한 성적을 얻지 못하여 앞으로 어려운 길을 걷게 되었다. 이 결과에서 참여 주체들이 깊은 성찰을 끌어내야 할 것인데, 프레시안 ‘진중권 칼럼’(4.10일자)에 실린 글에는 그런 깊이가 부족한 듯 싶어서 딴지 거는 이야기를 한 마디 건네고 싶다. 아시다시피 진중권씨는 진보적 사회운동 동네에 꽤나 영향력 있는 필자이기 때문에 그의 글은 토론할 필요가 있다.
그의 글은 한 마디로 말해, ‘자기 위안의 글’이다. “비록 국회에 진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년이나 4년 뒤에 제대로 진출해 보자.”는 이야기가 그 글의 골자다. 충분히 해내지 못한 까닭은 ‘진보신당이 맞닥뜨린 조건’에서 비롯되는 한계이지, 주체들의 잘못은 별로 없었다는 식이다. 과연 그럴까?
여러 참여자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자기를 긍정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진보신당 창당에 앞장선 진중권씨의 글은 오로지 자기 긍정으로 일관하고, 자기를 냉철하게 살피는 문제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문제다. 그래서야 진보신당 참여자들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무엇보다 그의 글은 당 기관지가 아니라 ‘프레시안’이라는 중립(진보신당 바깥)의 언론 매체에 실렸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진보신당이 총선에서 거둔 빈약한 성적을 다 목도하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우리 진보신당은 잘못한 것이 별로 없어요. 변함없이 기대를 보내주세요.”하는 말을 퍼부어서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품게 될 갖가지 회의적인 생각들을 변변히 풀어줄 수 없지 않은가? 주체들이 아무런 잘못 없이 넉넉하게 실천했는데도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면 하다못해 ‘이번 총선에 부랴부랴 가건물을 꾸려서 나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했는가?’하는 전술 차원의 성찰 거리라도 제기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진보신당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해왔다. 그들이 여지껏의 진보신당 실천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정치적 행보를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진중권씨 이야기를 몇 가지 짚어본다.
2. 진중권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진보신당이 안고 있는 첫 번째 문제는 ‘그렇게 서둘러, 섣부르게 갈라섰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주사파는 절대적으로 빗나갔다. 그러니까 그들과는 반드시 갈라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고장난 레코드처럼 계속 틀어대는 것으로는 사람들의 공감을 넓힐 수가 없다. 이 갈라서기에 진중권씨가 대단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진중권씨가 감수해야 할 비판도 주로 이 대목과 관련된다.
왜 갈라서야 하는가? 그는 민중이 반드시 진보정치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로 ‘극단적 시장주이에 따른 사회양극화’를 꼽는다. 이 말은 액면 그대로는 옳지만 실제 맥락에서는 옳지 않다. 그는 ‘진보정치’라는 말을 ‘진보신당’이 독점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양극화를 막으려면 반드시 ‘진보신당’에 합류해야 하는가? 충분히 대응해내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민노당이 이 과제를 부인하지 않았다면 그 불충분함에 대해 민노당 또는 그 주류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사실이 ‘갈라서기’의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진보신당 그룹은 ‘신자유주의 반대 여부’가 아니라 ‘종북 켐페인’을 분당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진중권씨는 크게 악역을 맡았는데 바로 민노당을 ‘종북당’으로 여지없이 낙인 찍는 글들을 대거 퍼뜨림으로써였다.
진중권씨의 ‘주체사상 비판’은 상당 부분 옳다. 70-80년대의 치열했던 학생운동이 지금 폐허처럼 사그러든 데에는 주체사상을 일종의 ‘종교’로 신봉하고 그의 말마따나 ‘대중의 욕망’을 실사구시하는 일에 도무지 게을렀던 민족주의파(또는 주체사상파)의 잘못이 가장 크다. 도그마로 굳어져버린 주체사상을 단호하게 버릴 때라야 그들은 한국사회의 변혁에 제대로 복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진중권씨, 또는 민노당 내에서 주사파와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던 일부 사람들의 경우, ‘주사파냐, 반주사파냐’하는 대립구도를 최대의 화두로 내세움으로써 운동적 진전의 방향을 오히려 왜곡해버렸다. 사태의 본질을 소박하게 바라보자. ‘비정규투쟁’의 상징이 된 이랜드 뉴코아 노동자들은 진보정당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힘없는 노동자들을 치열하게 대변해 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노조에서 노조간부 이남신씨를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추천할 때 조합원들이 (두 당으로 갈라진 현실 앞에서) 대단히 곤혹스러워했다. 진보세력이 하나로 대동단결해도 자본과 맞서기가 버거운 판에, 그들에게 ‘종북’을 이유로 한 ‘분당’을 납득시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닐까?
진중권씨의 미학 논설은 여전히 날카롭고 진보적 기풍으로 충만해 있으리라 여긴다. 그러나 현실의 어느 정파와 일심 동체가 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그의 정치 평론은 깊이를 잃어버렸다. 분당 사태에 대한 그의 논설에서 가장 큰 해악은 ‘주사파’를 너무나 심하게 비판했다는 점이 아니다. ‘사실’을 충실하게 파악하는 노력을 팽개쳐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민노당 비대위가 대의원대회에서 징계하려고 했던 두 당원이 “자기 당의 상황을 북한 공작원에 넘겨주었다”고 단정한다. “종북파들은 당을 깨면 깼지 북핵의 정당성과 ‘본사’에 보내는 보고의 의무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고 단언한다(‘프레시안’ 2월 4일자 칼럼).
그는 ‘징계 반대’에 이른바 ‘종북파’들만 찬성한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민족파를 두둔하는 다른 수정안건이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표를 얻었던 반면, 이 안건은 3분의 2에 가까운 표를 얻었다. 대의원대회 결정에 담긴 뜻을 ‘종북주의의 고수’로 읽는 것은 천사를 악마라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날조다. 그는 “두 당원이 CD를 북한 공작원에 넘겨주었다”고 단정했는데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우리는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당내에서 조사를 벌이지도 않은 상태였다. 정종권 당시 비대위 집행위원장은 “정치적 징계”일 뿐이라고 (대의원대회 석상에서) 구구하게 변명했는데 ‘사실’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 징계’라니 그런 언어도단이 어디 있는가.
두 당원은 ‘당내 정보수집’ 행위에 한정하여 (당원들의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해당행위로 처벌했어야 한다. 거기까지가 ‘사실’로 파악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당원’의 문제로 한정하여 처리했어야 했지, 두 정파 중에 누가 옳으냐 하는 권력투쟁의 사안으로 확대하지 말았어야 한다.
어떤 정치 담론이 ‘사실’과 동떨어져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면 그 담론은 단순히 ‘공문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망나니의 칼’로 돌변해 버린다. 진중권씨는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초심부터 되새겨야 한다.
3. 진중권씨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신당을 구경만 하지 말고, ‘들어와서 함께 하자’고 예나제나 호소한다. 그렇지만 ‘함께’ 하려면 앞장선 사람들의 ‘청사진’이 믿을만해야 하지 않은가? 그의 청사진도 미덥지 못할뿐더러 총선 과정을 통해 그들이 ‘더 깊은 눈’을 갖추게 된 것 같지도 않다.
그의 글에 따르면, 진보신당은 첫째로 “(법 앞에서의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시장 속에서 실질적 평등의 문제”를 감당하겠다고 하며, 둘째로 대중의 변화된 욕망에 맞춰서 기성의 진보정치를 리모델링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찬 ‘견제세력’이 되자는 것이다.
기성의 자본주의 질서를 그대로 수긍하고, 거기서 벌어지는 양극화의 결과를 줄여나가자는 차원이라면 특별히 새로운 비전이라 할 수 없다. 그의 진보신당론이 남다른 대목은 ‘대중의 변화된 욕망’에 부응하자는 것일 터인데, 아마 ‘들뢰즈’ 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기초한 생각이겠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라! 소수자들에게 주목하라!” 등등. 그 생각에 담긴 얼마쯤의 현실성을 부인할 것은 없다. 문제는 그 대목에 주목하는 것으로 과연 충분하냐는 질문이다.
기성의 민노당이 비정규악법 하나, 변변히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이 가장 먼저 답변해야 할 과제는 보장받지 못하는, 중소영세 비정규, 이주 노동자들을 앞장서 대변하는 일이 아닐까. 노동자계급이 단결 투쟁으로 일어서는 과제에 응답하는 대신, 진보신당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발적 양보’라는 비현실적인 길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이 선의를 보이면 자본도 선의를 보여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계급화해주의가 거기 담겨 있지 않은가. 기존의 민노당 주류, 민족파와 계급타협적 기풍 면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고 심지어 더 오른쪽으로 치닫겠다는 것이 노동자 농민에게 ‘비전’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
진보신당의 선두주자 심상정과 노회찬은 선거과정에서 ‘중대한 사회적 해결과제’를 제시한 바 없다. 문국현이 ‘대운하 반대’를 내건 것만큼이라도 치열하게 문제제기한 것이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참신한 이야기를 꺼내어 ‘진보적 이미지’를 풍기는 것으로 유권자들에게 접근했을 뿐이다. 새로운 대안정당이 그것으로 충분한가?
지금은 세계 전체에 ‘대불황의 파고’가 밀려닥치는 엄중한 시기다. 언제 외환위기나 기업의 줄도산이 터질지 모르고, 국민의 혈세로 그 펑크 난 데를 메꿔야 할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밑빠진 독’과도 같은 시장 질서에 그저 숙명처럼 순종하여 노동자 민중이 그 부담을 온통 짊어져야 할까? 그렇게 민중이 살려놓은 금융과 기업을 다시 국내외 초국적 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돌려주어야 할까? 이렇게 우리의 정치경제 체제를 뿌리부터 살피고 사회 변혁을 꾀할 때라야 거의 40년을 이어져온 (근래 들어 더 깊어진)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진보신당에는 이런 발본의 문제의식이 없다.
4. 진보신당의 주체들도 여지껏의 살림을 ‘가건물’이라 했다. 새 건물을 지으려면 가건물일랑 송두리째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살피기 바란다. 심상정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반한나라당 후보 단일화’를 혼자 결정했지만 당내 민주주의가 분명히 자리잡지 않고서는 첫 걸음도 떼기 어렵다.
진중권씨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가 애시당초 다르다고 애써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진보신당은 미 제국주의로부터 북한 민중을 엄호하겠다는 마음과 치열성이 약하고, 그 반면에 남한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 신좌파적인 관심은 더 있다. 그렇다고 민노당쪽에서 들어올 ‘재통합 제안’을 고뇌없이 받아 안으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민족문제든 사회문제든 개량적 타협적 기조에 안주해 있는 점에서 지금의 민노당도 치열한 자기혁신 없이 미래를 말할 수 없다. 진보신당의 경우, 신좌파적인 문제의식이야 그대로 살리되 ‘종북 반대’를 구실로 하여 미 제국주의와의 대결을 회피하지 말고,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길을 찾아나서기 바란다. 이는 어떤 정책을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자본주의 체제 외에는 다른 길을 개척할 수 없느냐는 물음이다. 그런 커다란 청사진 없이는 ‘한나라당 1당 독재’로 옮아가는 지금의 정치지형을 타개할 길이 도무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