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보신당 비판 -
우경화가 대안일 수는 없다
다음으로 진보신당을 살펴보자. 총선은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온 소위 신당파의 정체성을 날 것 그대로 파악해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의 총선대책은 한 마디로 ‘고삐 풀린 우경화’라고 말할 수 있다.
진보적 실용주의? 총체적 인식과 전망의 부재
민주노동당에게 이명박에 맞설 경제대안이 없고 비정규직 공약이 ‘빈 깡통’이라면, 이는 진보신당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진보신당의 비정규직 공약은 ‘빈 깡통’을 ‘독’으로 채워났을 뿐이다(이 ‘독’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설명하겠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정책공약집이 ‘산만함과 지루함’으로 정리된다면, 진보신당의 정책공약집은 ‘총론 없는 각론의 지리한 나열’로 정리할 수 있다. 총론의 부재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철학의 부재를 의미한다. 진보신당은 왜 한국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지, 왜 노동자, 민중의 삶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해갈 핵심고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진보신당 정책공약집에는 그 흔한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비록 자본주의 모순 심화라는 위기의 본질을 건드리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 반대’는 진보진영 내에서 제한적으로나마 현 정세에 대한 전체적 인식과 투쟁의 방향을 제공하는 기능을 해왔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이마저도 거론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기본적인 반대도 명시조차 않고 있다.
진보신당은 한국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부재의 자리에 지금 이명박이 유행시키고 있는 실용의 정신을 앉혀 놓았다. 거시담론을 부정하고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것, 실행할 수 있는 것만을 쫓는다. 이는 진보신당의 정책 각론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진보신당의 정책들에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지난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카드수수료율 인하 운동’처럼 기존 정당들이 미처 돌보지 못한 틈새들을 찾아 채우려드는 시도들만 엿보인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보다 적색으로”의 실체이다.
물론 이런 시도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한 선명한 전망은 없는 각론만의 실천으로는 결코 진보정치의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본가정치세력에 대한 뚜렷한 폭로와 선명한 대안제시 없이 진보정치는 결국 보수정당들 간의 정권교체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지난 대선은 증명해주었다. 대중을 장악하고 있는 민생파탄에 대한 왜곡된 분석, 반동적인 대안과 치열한 전망투쟁을 벌여내지 않고서는 진보정치는 사회경제적 불만을 결코 진보운동으로 조직화해낼 수 없다.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진보신당 역시 전망과 희망을 쥐어 주어야하는 정당으로서는 무능력한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독, ‘사회연대전략’
진보신당의 정책공약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엇보다 ‘사회연대전략’이다. 소위 신당파는 민주노동당에서 좌절당한 희망을 딴 살림까지 차린 끝에 마침내 이뤄낸 것이다. 진보신당은 사회연대전략 3대 방안이라고, 저소득층의 국민연금 보험료를 지원해주는 ‘복지소득 연대’,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 이상으로 인상하고 인상분 일부를 고용보험기금으로 지원해주는 ‘임금소득 연대’,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의미하는 ‘일자리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태가 무엇이든 사회연대전략은 사회적 합의주의 즉, 자본과 노동 사이의 서로 일정한 양보에 근거한 타협을 본질로 한다. 가령 ‘일자리 연대’는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추가 고용 및 임금손실분에 대해서 고용보험 기금을 통해 일부 보전해주는 방식이다. 자본이 일부 양보하면 이를 정규직이 채워주고 저소득층, 비정규직 등이 이익을 보는 것이 기본구조이다. 진보신당은 이러한 정규직, 비정규직의 연대를 통해 계급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 같은 사회적 합의주의가 어떤 성과를 올리든 간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민생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미 발생한 저소득, 고용불안 등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발생한 문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자본을 파트너화 함으로써 자본의 책임을 은폐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합의주의는 특히 오늘날의 진보정치의 위기라는 조건에서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진보운동은 자본주의와 자본가정치세력을 폭로해내지 못하는 한 오늘날의 주변적인 위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들과 치열한 전망투쟁을 벌어내야만 진보정치의 위기를 극복해낼 수 현실에서 자본의 근본적인 책임성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 사회적 합의주의는 해가 될 뿐이다.
사실 진보신당에게서 총체적 인식의 부재와 사회연대전략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커녕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폭로조차 부재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사회연대전략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파트너로 취할 대상의 치부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보신당이 일자리와 빈곤 문제의 해결을 말하면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노동시간변형제 폐지 등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조차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은 것은 언어도단이다.
반종북주의 정치공세에 기대어 창당동력을 확보한,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
신자유주의 반대조차 벗어던지고,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우는 것에서 우리는 진보신당의 ‘우경화’를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우경화는 진보신당의 북한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진보신당은 “북한에 할 말을 하는 진보”를 표방하고 있다. 그동안 진보진영 내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북한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추종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해온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북한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고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른다. 미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와 투쟁이 그것이다.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없는 북한 비판은 미국 대북정책의 합리화로 포섭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에게서 이러한 북한에 대한 주의 깊은 접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들이 분당과정에서 보여준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집념어린 증오의 표출은 가히 편집증적이었다.
진보신당이 반종북주의 정치공세에 기대어 창당동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심상정과 노회찬은 2월 24일의 진보신당 제안서에서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진보운동의 위기는 냉엄한 현실이며, 새로운 진보적 실천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장기간 진보의 숨통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 위기이다” 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들과 신당파가 민주노동당 분당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위기에 대한 진정어린 성찰’이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참패의 모든 책임을 자주파와 일명 ‘종북주의’에 떠넘겼고, 자기반성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반성 없는 책임 떠넘기기’가 진보신당의 현재 상태를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체불명의 ‘반종북’으로 뭉친 다양한 이질분자들의 결합은 이들에게서 진보정당의 최대의 버팀목이랄 수 있는 이념적 선명성과 노동자중심성을 앗아갔다.
진보신당의 주체들은 진보정치의 위기를 종북주의에 전가하면서 위기의 본질에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 또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실패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조차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어느 때보다 전망투쟁이 필요한 시점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과 대안,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 무능력과 사회적 합의주의로의 우경화이다.
심상정 후보의 후보단일화는 진보신당의 미래인가?
덕양갑에 출마한 심상정 후보는 지난 4월 2일에 “한평석 후보의 후보단일화 제안을 환영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지난 4월 1일 통합민주당 덕양갑 한평석후보가 후보단일화를 제안했다. 심상정후보는 한나라당의 개헌선 확보를 저지하고, 나라의 재앙인 한반도 대운하를 막기 위한 한평석후보의 고뇌에 찬 결단을 환영을 하는 바이다.
그 동안 대운하반대와 덕양지역 발전을 염원하는 지역주민들과 시민사회진영은 한나라당에 맞선 후보단일화를 적극적으로 촉구해왔다. 심상정후보는 지역주민과 시민사회계의 요구에 부응해 후보단일화 제안을 수용한다.”
후보단일화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심상정 후보는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첫째, 현 정세에서 반한나라당 연대는 어떤 진보적 의미를 갖는가?
둘째, 반한나라당 연대는 진보정치 위기의 극복에 기여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심상정 후보는 어떤 납득할만한 답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통합민주당이 똑같은 자본가정치세력이라는 것은 10년의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과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과정을 통해서 정리된 공리이다. 각종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함께 밀어붙인 세력들을 굳이 ‘더 나쁜 놈/덜 나쁜 놈’으로 나누는 것은 자기중심적, 편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심상정 후보의 통합민주당 후보와의 연대는 지난 민주노동당 몰락의 주요한 요인인 ‘열린우리당 2중대’ 노선의 재판에 다름 아니다. 해방연대(준)이 계속 강조해온 것처럼 진보운동의 위기는 반자본주의 투쟁기조에 입각한 독자적이고 차별적인 실천에 의해서만 돌파할 수 있다.
심상정 후보의 후보단일화 제안 수용은 진보신당의 우경화와 퇴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반한나라당 연대는 진보운동의 역사적 후퇴이며, 진보정치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진보신당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
4. 결론 -
제대로 된 대안을 가지고 우리의 길을 가자!
몰락, 몰락으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주체적 상태는 앞으로도 진보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민생파탄의 본질에 대한 폭로도,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한 전망투쟁도 없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잘못하면 자연히 이득을 볼 것이라는 기대는 나태한 착각일 뿐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몰락의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저들은 앞으로도 자신의 추락을 스스로 재촉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
반자본주의 투쟁을 담보할 새로운 노동자정당 건설의 방향을 잡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지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핵심은 진보정치의 위기,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며, 그 단초는 이제 반자본주의 투쟁을 담보하는 새로운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의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
해방연대(준)은 지난 3월 1일 회원총회에서 다음같이 결의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모순 심화의 정세에 올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민주노동당을 탈당할 것을 결의한다.
우리는 독자적인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위해 매진해나갈 것과, 당 건설을 위한 당면실천방침으로서 민주노동당에 실망한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사회주의정당 건설의 길로 조직하고, 당강령 초안 수립, 공동의 사회주의적 정치투쟁전선 형성, 사회주의정당 건설경로의 구체화 등을 실천할 것을 결의한다.”
해방연대(준)은 5월 중에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사회주의정당 건설경로 등을 포함한 구체적인 당건설계획을 논의, 결정하고 이를 사회주의자들에게 제안할 계획이다.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의 건설, 이것이 돌아가지만 목적지에 이를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2008.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