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변혁) 운동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오른쪽으로 옮아가고 있다. 이 사실을 내다보고 헤아릴 때라야 우리는 가까스로 내일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한때 진보세력은 제3의 정당까지 밀어올린 적 있다. 지금은 형편없이 쭈그러져서 ‘들러리 정당’으로나 가까스로 존립할 위험에 놓여 있다. 총선은 한나라당 대 한나라당의 격돌 구도로 가고 있다. 진보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한참 쪼그라 붙어, 존립의 위협에 시달린다는 말이요, 그만큼 정치지형이 우경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운동주제 <모두>가 자기성찰, 자기도약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1. 민족주의파들의 경우 ; 이들은 ‘북한 정권을 미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엄호하는 문제에 신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기실은 “남북 공조”와 “한미 공조”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태반이다. 이를테면 지배세력의 탄압으로 하여 고생 좀 한 강정구 교수의 경우, 그의 이론인즉슨 사실 “미국/남한에 의한 흡수통일”도 (그 과정이 폭력적 억압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이론이다. ‘모든 통일은 다 선(善)’이니까. 민노당 분당사태의 빌미가 된 ‘당원 2인’ 제명건도 사실 민족개량파 지도부는 수긍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이 오랫동안 김대중당/노무현당 지지노선을 걸어온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우리는 북한당국을 향해 그 노선에 대해 비판해줘야 한다),
운동성이 취약한 부분들은 (단지 혁명노선의 필요에 따라) 제휴한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부르주아세력 지지’로 옮아갔다. 민족혁명 그 자체라도 열심히 하는 부분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2. 이른바 ‘평등파’의 경우 ; ‘전진’의 책사 한석호가 ‘평등파’라고 작명한 것 자체가 아주 불순하다. 그는 “자유주의 더하기 사민주의 더하기 사회주의 = 평등파”라고 정의했다. <‘민족주의’ 빼고, 나머지는 다 평등파>라는 식인데 “사민주의 주도세력” 밑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다 끌어넣는다는, 일종의 야바위 정치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의 운동주체들은 이러저런 이유로 ‘세 가지 마인드가 다 뒤섞인’ 혼란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진중권이는 그가 이따금 맑스의 말을 인용한다 해도 그저 인용일 뿐이지 그는 ‘노동운동의 막중한 과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자유주의자다. 그가 주사파를 비판한 것에는 ‘일정하게’ 진실이 담겨 있지만 그의 말을 덮어놓고 다 긍정해서는 곤란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너무 심하게 나가지는 말아달라”는 말 이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레디앙’에 보면, “전통적 노동운동 모델이 끝났다. 조직노동자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더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 키보드 좌파 어쩌구... ”하고 그가 말했는데, 문제가 ‘모델’이라구? 무슨 ‘자율주의 등등’의 아이디어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조직’ 노동자라는 표현은 ‘비정규’의 대립어가 아니다. 그는 겉으로 ‘비정규’를 말했지만 속으로는 노동자들도 ‘노조 조직’ 아닌 다른 식으로 운동하는 게 좋다는 함의를 내비친 것이다. 그는 스스로 ‘급진적 리버럴’이라고 말했다. 리버럴 = 자유주의 !!
말이 나온 김에, <강단에서 운동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엄중하게 짚어두자. ‘강단’은 지식/학문을 교류하는 곳이지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해석’하는 곳이지 ‘변혁’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강단’에서 좌파가 활동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에 가깝다...)
*** ‘자본과의 타협’을 배격하는 진정성이 있는 동지들의 경우, 엔엘파의 타협주의는 잘 발견을 하지만, 피디파의 퇴행/타협주의에 대해서는 (팔이 안으로 굽는 탓인지) 정면으로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① 90년대초, ‘전노협’이 무너지는 과정에는 ‘엔엘파/피디파’가 다 협력했다. 특히 ‘노회찬’의 활약이 컸다. 그때 ‘전투적 노동운동 노선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부르짖었던 노회찬의 정치노선을 긍정해서는 안된다. 진보신당이 노회찬의 의회주의 노선을 계승한다는 사실에 대해 외면해서는 안된다.
② 이번 총선에 진보신당은 ‘신노선’의 하나로, ‘사회연대전략’을 제기했다. 민노당에서 ‘전진’과 문성현 등이 제기했다가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던 방안이다. 그때 “왜 자본과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정규직들이 스스로 임금 일부를 반납한다는 식의 궁색한 발상을 하느냐”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다. 맞다. 사회연대전략은 “자본과 단호하게 맞서는 방침”과 결합될 때라야, 그 전제 위에서 가까스로 성립될 수 있는 전술이다. 이 전제가 빠져 있을 때, ‘타협주의’의 길로 치달을 위험이 높다. 정규직단체가 대중에게 약간의 점수는 딸지 몰라도, 결국 자본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 그래서 비판했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 ‘진보신당 지지’로 간다면 이는 지독한 ‘건망증’의 표현이요, 이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체제 순응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③ 이것 말고도 사태를 직시해야 할 대목은 너무나 많다. 한때 진보신당의 선두에 섰던 조승수는 ‘전투적 노동운동을 물리치는 일’에서도 화려하게 앞장선 인물이다. ‘박승옥’ 따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단지 ‘민족주의자’가 아니기만 하면 다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운동의 미래를 담보할 주체가 되기 어렵지 않은가?
맺음말 : “이쪽 저쪽 다 결함많은 동네라면 그럼 어떡하느냐?”는 대꾸가 당연히 나올 수 있다. 당신의 선입관을 바꾸기 바란다. “왜 어느 동네에 줄서기하려고 하느냐? 왜 혼자 스스로 자기 발로 설 생각을 하지 않느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새로운 운동의 ‘질’은 그런 가시밭길 속에서 가까스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