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의 책 ‘자본’을 번역하고 가르쳐온 강신준교수(동아대)가 이 책을 해설하는 글을 최근 경향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두 번째 글(9. 1일자)을 읽고 충격을 받아 이 글을 쓰게 됐다. 먼저 그의 글을 간추려 옮긴다.
1. 제목 :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
2. 마르크스는 1848년 [유럽]혁명과 맞닥뜨려서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서 나왔으며 그런 혁명이 왜 실패했을까 의문을 품은 끝에 <자본>을 썼고, 이 답을 전해받은 유럽 노동운동은 발전을 거듭해 높은 수준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이뤄냈다.
3. 그 혁명의 동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노동자가 혁명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는 “교환”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고 이들을 서로 매개한다. 그러다보니 부(富)를 생산해내는 사람이 가난해지는 문제가 생겨났고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다. “교환”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야말로 혁명의 동력을 끌어낸 원인이며,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것을 “개혁”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라고 얘기했다.
4. 그 혁명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혁명은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이고 변증법과 유물론을 갖춰야 도달된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이고, 사회를 더 성숙한 방향으로 밀고갈 때에만 혁명이 성공한다. 1848혁명이 실패한 데서 얻을 교훈은 봉건제가 더 성숙해진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 자본주의 개혁도 이뤄진다.
2는 얼핏 보아서는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유럽 노동운동이 지금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자랑할 수준에 와 있는지 미심쩍고[국가부도와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는 그리스와 스페인을 생각해 보라], <자본>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고작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한정되는지도 논란거리다. <자본>에서 사민주의 자랑만 읽어내겠다는 강교수의 주관이 이 글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3도 얼핏 보아서는 틀린 얘기가 아닌 것 같다. 화폐 교환[시장]을 거쳐야만 소비가 가능해진 탓에 부익부 빈익빈이 생겨날 수 있고, 과잉생산 과소소비가 누적되다 보면 주기적으로 공황도 터진다. 그러나 “이치로 보아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는] 교환 때문에
지금의 사회 양극화가 생겨났다[그 원인이다]”라고 말하면 언어도단이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교환이라는 매개를 통해] 착취하기 때문에 대중의 빈곤과 공황이 생겨난다. 강교수의 교환론은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할뿐더러 마르크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4에 와서 독자들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혁명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이냐?”고 호기롭게 질문을 던져 놓고는 알쏭달쏭한 말만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를 더 성숙한 방향으로 밀고가지 못해서” 혁명이 실패했다는 말만 했는데, 이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까?
“자본주의가 성숙해야 자본주의 개혁도 가능하다”면, 그럼 자본주의가 덜 발달한 제3세계 나라들은 자본주의가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그 개혁을 모색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나라들은 영영 성숙해질 수 없다. 자본주의든 어떤 사회체제든 개혁[과 변혁]을 통해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왜 강교수는 ‘성숙’이라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할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고, 이를 헤아려야 우리는 ‘성숙’의 뜻도 알아듣게 된다. 그가 간절히 하고 싶은 말은 “혁명을 꿈꾸지 말고, 개혁에만 몰두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솔직하게 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어서 설파하려 했기 때문에 꼴 사나운 얘기가 돼 버렸다. 이와 관련된 대목만 따로 간추려 보자.
㉮ 혁명은 오랜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다[그런데 그 논거로 ‘학문은 험한 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엉뚱하게 갖다가 인용했다].
㉯ “교환”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야말로 혁명의 동력을 끌어낸 원인이며,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것을 “개혁”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라고 얘기했다.
㉰ [흔히 사람들은 기존의 것을 없애고 대체하는 것이 “변화”라고 이해하지만] “변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을 채우는 것이다.
㉱ 1+1=2.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 이뤄진다. 기존의 1을 없애면 2는 불가능하다. 첫 번째 계단을 허물면 두 번째 계단을 놓을 수 없다.
㉲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
㉮와 ㉯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제한 말이다. 이와 달리, ㉰ ㉱ ㉲는 “혁명은 잘못된 것이고, 개혁만이 옳다”는 얘기다. 뒤엣 말을 하려면 앞엣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에서 부정직하게 혁명을 개혁으로 바꿔치기해 버렸다.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것이, 즉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는 것이 자본주의를 혁명하는 것이란다. 이는 야바위꾼의 말이다. 차라리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는다. 자기 소신이므로! 그러나 자기 말을 분칠하기 위해 용어법과 논리정합성을 아무렇게나 파괴해 버리는 사람은 학자로서 자질과 윤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1+1, 곧 양적 변화[증가]만이 옳은 변화라 했다. 이 사회에 과연 질적 변화는 없을까? 그는 “자본주의는 봉건제가 더욱 성숙해진 체제”라고 썼다. 봉건제가 더 성숙해진 체제를 ‘발달한 봉건제’라 부르지 누가 ‘자본제’라 부르는가? 봉건제가 ‘양적으로 변화’하면
봉건제이지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노예제도 봉건제도 없애지 말았어야 성숙한 사회가 된다[19세기 후반까지도 노예제 옹호론이 끈덕졌다].
그의 변화론도 황당한 궤변일뿐더러 마르크스는 그와 전혀 다른 말을 했는데도 그렇게 말한 것처럼 둘러댔다. 전자(前者)는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후자(後者)는 분노의 대상이 된다.
그는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 이해’라고 요약했다면서, 바로 뒤에 버젓이 그 전문(全文)을 인용했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언제나 일시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에 부정(否定)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변증법은 긍정”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말 아닌가? 독자들이 자기처럼 읽어줄 것이라 믿고서 “변증법은 긍정”이라 단언했다면 그는 ‘자본’을 집어든 독자들을 [아무 말에나 다 솔깃해 하는 존재로] 은연중에 깔보고 있는 셈이다.
그가 “마르크스의 책에는 개혁주의를 뒷받침해주는 대목도 더러 있다. 그 대목에서 배우자”고 말했다면 하나의 의견으로서 긍정해줄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개혁이 혁명’이라 말했다고 단언하면 이는 일종의 유언비어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인데, 그는 어찌 그렇게 무식한 만용을 부렸을까.
경향신문은 왜 마르크스를 날조하는 글을 실었을까? 첫 번째 연재글의 제목은 “지금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고, 부제(副題)는 “진정한 경제대통령 선택의 길 일러줄 ‘노동자계급의 성서’다. 이번 대선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자본’을 읽고 그 답을 찾으라는 주문인데,
강교수의 글 두 개에는 이명박정권에 대한 완곡한 비판이 들어 있고, “개혁이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으니 어느 정당을 선호하고 있는지 자명하다. 두 번째 글의 제목은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다. 혁명을 그렇게
정의하면 케인즈가 혁명가가 되고, 심지어 박정희와 이건희도 [사회적 생산력 발달에 공헌이 크다 하여] 혁명가로 칭송받을 수 있다. 자기 이름을 빌어서 ‘혁명 반대’를 설파하고 리버럴 부르주아정당 지지를 호소하는 데 대해 지하의 마르크스가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