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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혁명가였는가 - 전영철(새기운)
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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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06일 19시 38분 09초
[인권칼럼] 예수는 혁명가였는가 - 전영철 2012·01·06 11:26
 

전영철(새기운 대표)

예수가 혁명가이기를 그만 둔 까닭

예수는 ‘혁명가’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속한 진영에 따라 다를 듯싶다. 사회변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다."라고 할 가능성이 높고, 기독교 쪽의 진보적인 분들은 "예수는 진정한 혁명가였다"고 말할 것도 같다.

이들에 의하면 예수는 혁명가이기도 하나 때로는 혁명가가 아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가 혁명가이든 혁명가가 아니든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과 예수는 그 안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혁명가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의 철저하지 못한 사회변혁의지를 생각함직하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정권이나 가진 자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어느 사회변혁가들 못지않게 단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사회변혁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배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예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왜 서로 다른 그런 평가가 나오는가를 살펴볼 때 예수가 지니고 있는 그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예수에게는 사회변혁의지가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과연 예수는 사회변혁을 원하지 않았을까. 혹은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 일에 투신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복음서가 소개하는 그의 삶의 모습으로 볼 때

그는 근본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영혼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육신과 그 육신이 속해있는 사회변혁을 누구보다 강하게 바랬다. 그는 병든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해주고, 범죄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집단살해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면서 부유한 자들을 저주했다(눅6:20-26). 아니, 그는 유대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렬하게 규탄하며 온 몸으로 맞섰다(마 23장 전체).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는 왜 사회변혁에 전력을 다하여 투신하지 안했는가. 이야기는 자연히 예수가 사회변혁에 투신하지 않은 이유로 옮아가게 된다. 사회변혁에 투신하는 일에서 무슨 함정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중요한 일을 깨달은 것인가.

이와 관련된 문제가 있으니, 그게 바로 현대인의 인식에 익숙한 <정치 참여>문제다. 사회변혁을 수행하는 방법으로, 예수는 과연 정치적인 참여를 고려해보았을까. 사회변혁가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과연 정치적인 참여활동이 사회변혁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을까.

이 때 떠오르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소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말씀이다. 민족주의적 경향이 있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통치를 바라는 헤롯당원 몇 사람이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속임수를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가, 나에게 보여 보아라."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는 이 은전 비유를 통해 저들이 벌려 놓은 함정, 즉 어느 쪽이 옳다 해도 걸릴 수밖에 없는 올가미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이다. 그와 동시에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자신이 관심하며 속해 있는 것이 현실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웅변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절박한 요청이라 하더라도, 당시 로마 치하의 국권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달성에 목숨을 걸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예수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상에 영원한 진실위에 세워지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한 진실에 토대를 두지 않은 어떤 활동도 조만간 언젠가는 그 한계를 드러내며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이루어진 수많은 지상낙원의 꿈들, 이미 좌절한 소련과 동구, 그리고 현존하는 중국과 북한처럼 그 출발과는 다르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거나 이상적인 목표에서 크게 벗어나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예수는 그의 생명이 결코 그러한 종말이나 한계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라 여겨진다.

예수는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 사회적 혁명운동의 방법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충격이 있었음을, 아니, 적어도 점점 절박하게 다가오는 위기 앞에서 최소한도 자구책을 강구하는 뜻에서라도 말했을 것이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눅22:36).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 는 명령은 일부 주석에는 '첼롯당과 같은 혁명을 권하시는 것은 아니다'고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성경배경주석 신약편 P.289) 칼을 마련하는 일이 얼마나 강렬하고 절실한가를 여실하게 나타내는 혁명으로 통하는 단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예수가 또 다른 곳에서 같은 칼을 비유로 사용하되,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급진전하여 이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들고 나와 예수를 붙잡을 때였다. 이때는 이미 모든 통찰을 끝내고 단단히 준비된 때여서 예수는 조금 전의 격정을 충분히 다스리고 난 뒤였다. 예수는 오히려 담담한 눈으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엇다. 

"그 때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뻗쳐 자기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26:51-52)

두 이야기를 비교할 때,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는 말은 상황이 전개되기 훨씬 전 불안한 정세에서 예수가 한 말이었고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라 말할 때는 정리가 다 된 후의 급박한 현장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에겐 칼을 뽑는 예수와 뽑은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두 예수가 공존하며 갈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같은 갈등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종국적으로 선택하여 지킨 것은 "뽑은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끊임 없는 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히되, 그 열정을 끝끝내 누르고 혁명의 길에서 비껴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진정한 혁명가였다

전통적으로 사회변혁에 미온적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 어떤 사회변혁가들보다도 더 강한 혁명을 이미 감행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혁명의 원동력,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주장이다.

사회혁명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그 사회가 처한 제반 조건상 구조적으로 많은 한계가 뒤따른다. 해서 사회변혁과 더불어 그보다 더 근원적이며 완전한 혁명을 지향한다는 것, 예수는 바로 이같은 혁명, 곧 인간혁명에 온 힘을 다하여 헌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혁명이 직선적인 혁명이라면 예수의 혁명은 곡선적인 혁명, 눈앞에 불을 보면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오히려 멀리 돌아가는 우회적인 혁명, 목적을 바로 획득하는 통쾌함 대신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영원을 향해 전진하는 점진적 혁명을 함의한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 차원의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까지 직결된 영원한 혁명으로, 그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삶속에서 그리고 보다 큰 연대 속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어느 혁명가보다 더 강력한 혁명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기운>은 바로 이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단체라 할 수 있다. 다만 <새기운>은 직접적인 정치적 혁명에는 목표와 방법상 일정한 거리를 두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변혁을 통한 세계의 변혁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새기운>은 세계는 세계,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세계와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믿는 이들이다. <새기운>은 나아가 종교마저 넘어서서 예수와 함께 영원한 혁명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공동체다.

세인들이 흔히 혼동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는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제도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제도종교인 기독교의 틀 속에 가두어둘 수 없는 이가 예수다. 후속되는 기독교와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를 초월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원한 진리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묶어둘 수 없는 자유로운 예수, 진리를 위해서라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바치는 헌신적인 예수, 이런 사람을 놓아두고 누구를 혁명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글쓴이 소개] 전 영 철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새기운 http://newchristianity21.org/ ) 대표, 우석대학 명예교수(영문학), 마음사랑교회 목사.  
전영철은 2011년 5월,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기독교의 시발점이 된 1차 니케아공의회(325년)를 현지 답사차, 공의회가 열렸던 오늘날의 터어키 이즈닉(Iznik)을 방문했다. 전영철은 니케아공의회에서 비롯된 종교적·정치적 야합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종교간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적인 기독교인·무슬림·유대교인들과의 진솔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2011년 11월에는 메카 순례(Hajji)에도 참가하는 등 국내외 무슬림과도 직접 대화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불교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인 인드라망 정신을 변혁적인 원형의 예수정신과 연계하여, 가난한 이웃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주체로 성찰하고 네트워크화 할 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된 종교운동의 하나됨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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