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논쟁 좌선회를 기획하다
최근 한국정치의 최대 이슈는 ‘복지국가’다. 좌우를 넘나드는 모든 정당이 복지논쟁을 벌이고 있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진보평론》도 이러한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호 특집은 진보적 시각에서 복지논쟁을 해석하고 복지논쟁에 개입해 보았다. 물론 이번호에 실린 글들은 생각보다 이념적, 이론적 편차가 크다. 복지 그 자체가 가진 진보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 현재의 논의구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장기적으로 복지논쟁이 가질 긍정적인 효과를 인정하는 입장, 복지논쟁 그 자체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한다. 여기에 복지와 녹색가치를 결합시키려는 논쟁이 더해지면 이번호 특집은 논의를 정리하고 공통분모를 찾기보다는 차이를 더욱 부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호에 실린 글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환기하고 있는 것은 복지에 관한 논쟁구도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진보평론》의 역할은 논의의 지형을 왼쪽으로 이동시켜 생산적인 복지논쟁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특집에 실린 글들은 복지논쟁의 좌선회에 기여하고 있다.
welfare라고 표현하든 well-being이라고 표현하든 복지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할 삶의 질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합의도, 인간다운 ‘삶의 질’의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복지’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다. 2011년 한국의 복지논쟁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채, 복지는 이미 고정된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얼마만큼 공적으로 충족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세금은 얼마만큼 걷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제한되어 있다.
왜 그럴까? 만약 복지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필요와 욕구가 있다. 개별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어린이, 노인, 장애인, 여성, 노동자구, 성소수자의 필요와 욕구 등등. 그리고 종종 이러한 필요와 욕구는 서로 겹치기도 한다. 여성이면서 성소수자이고 동시에 노동자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필요와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위로부터의 관료적 복지시혜가 아닌 민주적으로 열린 토론과 합의를 통해 계획되고 실행되는 복지정책이 요청된다.
복지와 관련된 민주주의의 문제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인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못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인간이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앞의 입장은 선별적 복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고 뒤의 입장은 보편적 복지론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이 보편적 복지론과 똑같지는 않다. 보편적 복지론도 아직 ‘시혜되는’ 복지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인정에 근거한 복지는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상적’ 삶을 누리는데 불편함이 없게 해 주어야 할 뿐이다. 그럴 때에 장애는 차별의 근거가 아닌 단순한 차이가 된다. ‘도움’을 받음으로써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의 정의와 관련된 또 한 가지 문제는 복지실현의 기준이 되는 필요와 욕구를 물질적인 것에 국한시키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도 필요와 욕구는 이미 주어진 화폐적 가치에 의해 판단되는 물질주의적인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심리적으로 좌절하고 불행한 현대인에게 복지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복지논쟁에서 제기되는 쟁점은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 기준을 넘어서는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먹고 살만한 중간계급의 사치 정도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물질적인 필요와 욕구만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초래되는 자원의 낭비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복지를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물질주의적인 복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져서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성장을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경쟁과 파괴, 그리고 낭비를 반복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복지를 누리는 사회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복지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의 협동성과 상호성마저도 침식하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격차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성장을 통해 유지되는 복지란 어떤 것일까? 결국 정의와 수단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 결여된 복지, 그것도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차이를 부유한 자의 입장에서 완화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복지국가는 가난한 나라를 희생으로 한 부유한 나라의 복지에 불과하다. 복지국가를 논하는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에 있다.
현 체제 아래에서 복지국가를 유지할 정도의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급진적으로 누진적인 조세제도가 요청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은 누진적 조세제도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연대의 문화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며 그것을 떠받칠 수 있는 경제적 성장이 지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우리의 정치인들은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속적인 성장은 시장경제를 통한 물질주의적 성장일 뿐인데, 한국이 처한 세계체제의 위치에서 분배정의가 실현되는 복지국가를 도입하는 것은 곧 성장의 동력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에는 일종의 모순이 있다. 복지국가를 지탱할 누진적 조세제도는 세대 간, 계급 간 연대에 기초해야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는 그나마 존재하던 연대성을 밑동부터 잘라 없애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과 정당들이 이러한 딜레마와 모순을 자각조차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낡은 생각의 뿌리에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이분법이 있다. ‘그들’에게 시장은 경제성장의 동력이다. 그래서 경제성장 없이는 복지도 없다. 그런데 시장경제에 동반되는 불가피한 부정적 효과가 있다. 빈부격차의 확대나 빈곤의 심화가 그런 부정적 효과일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이에 개입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시장이 인간 복지의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은 독점적이다. 시장은 이윤이 되는 경우에만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윤을 넘어선 필요와 욕구 충족을 제공해야만 하는 국가는 어떨까?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획일화하고 관료적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시장의 영역으로 떠넘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장하는 복지는 이러한 시장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영역에도 국가의 영역에도 민주주의는 없다. 화폐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 복지의 실현은 누가 얼마만큼의 세금을 내는가의 문제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에는 세금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만큼 민주적인 통제 아래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러한 민주적인 통제가 어떻게 체제전환의 상상력과 결합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세대 간, 사회세력 간 연대성이 확장되고, 국가에 의한 공적인 복지제공이 국가권력의 확대와 강화로 귀결되지 않고 시장의 작동을 보조하는 것으로 되지 않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의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능력을 고양시키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다양한 결사를 통해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확장하는 동시에 국가제도의 급진적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 목차 *
□ 특집 : 복지논쟁, 좌선회를 기획하다
* 한국 복지국가 논쟁에 관한 소고: 복지정치의 진보성,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주은선
*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한 복지논쟁의 주요 쟁점들/ 홍헌호
* 복지의 색깔은 무엇인가?: 한국 복지정치의 명암과 계급적 복지정치의 필요/ 제갈현숙
* 한국 사회 대안담론으로서의 ‘녹색복지’에 대한 평가와 전망/ 이정필
□ 시평 : 99%의 반란/ 남구현
□ 국제 : 미국 경제 위기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신희영
□ 발언대 : 폭력을 딛고, 작은꽃 노동자로 피어라!/ 권수정
* 화재와 행정폭력에 굴하지 않고 재건한 포이동 재건마을/ 신희철
□ 정세: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진보정치: 10‧26 서울시장 선거의 기원과 효과/ 김정한
□ 일반논문: 정당 정치의 위기와 진보 정치 운동의 전망/ 정병기
*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비판적 노트/ 박가분
* 이데올로기, 국가, 권력: 튀세르, 그리고 푸코의 이름으로/ 서찬욱
* 91년 5월 투쟁과 기억의 정치: 단절과 연속의 변증법/ 배성인
* 노숙인 점거공동체 ‘더불어사는집’의 형성과 변화과정/ 윤수종
□ 서평 :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고전(루돌프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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