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천] 자신의 삶을 판매하는 노동 그리고 보편적 매춘 |
2011·10·25 |
|
| |
 |
편집부
일상적인 활동은 보편적인 매춘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노동은 단순히 “돈을 버는 활동”일 뿐이다. 노동의 형식을 취하는 살아있는 활동은 돈을 버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삶은 생존의 수단이 된다.
상품들, 스펙터클(굉장한 구경거리)들은 노동자를 소비하며, 노동자는 수동적인 감탄을 위해 자신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소진하고, 노동자는 사물들에 의해서 소모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가 더 많이 가질수록, 노동자는 더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일상적인 활동들을 취하는 사회형식을 은폐하고 가리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며, 생산자들이 자기 자신들과 착취자들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착취하는데 사용되는 도구들까지도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보수를 받는다.
만약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삶을 판매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보편적인 매춘은 생존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실천’ 2011년 9월호 특집] 다시 마르크스에게 길을 묻다 : 자본주의와 삶
일상생활의 재생산 - 프레디 펄만(Fredy Perlman)
노예들의 일상적인 활동은 노예제도를 재생산한다. 노예들은 자신들의 일상 활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들과 주인들을 물리적으로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주인들이 노예를 억압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도 재생산하고, 주인의 권위에 굴종하는 자신들의 습속도 재생산한다.
노예제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인-노예 관계는 마치 자연적이고 영원한 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들은 주인들 또는 노예들로 태어나지 않는다. 노예제는 특정한 사회형식이며, 인간들은 단지 특정한 물질적인 조건들과 역사적인 조건들을 통해서 노예제에 종속될 뿐이다.
임금노동자의 특정한 일상 활동들은 임금노동과 자본을 재생산한다. 부족민이나 노예들과 같이 “근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일상 활동들을 통해서 거주민들, 사회관계들, 사회에 대한 관념들을 재생산한다.
임금노동자는 일상생활의 사회형식을 재생산한다. 부족이나 노예제와 같이, 자본주의 체계는 인간사회의 자연적인 형식도 그렇다고 궁극적인 형식도 아니다. 이전의 사회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물질적인 조건들과 역사적인 조건들에 대한 특정한 반응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적인 삶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일상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아울러 두 가지 과정들을 실행한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방식을 재생산하면서, 이러한 활동방식이 처음에 반응했었던 물질적인 조건들을 제거해 나간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과정들을 실행한다는 점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들은 이들에게 투명하지 않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들이 자신들의 통제를 넘어서 있는 자연적인 조건들에 대한 반응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들이 이러한 조건들의 창조자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활동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형식을 재생산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베일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이론의 과제는 일상생활의 활동들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기는 것이며, 이러한 활동들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들 내에서 자본주의적인 활동의 사회형식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일상생활은 서로 관련된 활동들로 구성되며, 사회활동의 자본주의 형식을 재생산하고 확장한다. 노동시간을 특정한 가격에 파는 것(임금), 상품에 체화된 노동시간(판매 가능한 유형과 무형의 재화들), (소비재와 스펙터클 상품과 같은) 유형과 무형의 상품들을 소비하는 것 등과 같이, 자본주의아래에서 일상생활을 특징짓는 이러한 활동들은 “인간본질”의 표명이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들의 통제를 넘어서 있는 힘들에 의해 인간에게 부과된 것들도 아니다.
인간이 “본성상” 창의력 없는 부족민이거나 또는 창의적인 사업가이거나 또는 종속적인 노예이거나 또는 자부심을 가진 장인이거나 또는 독립적인 사냥꾼이거나 또는 의존적인 임금노동자라는 가설이 진리로서 받아들여진다면, 인간의 “본성”은 공허한 개념이 되거나 또는 물질적인 조건들과 역사적인 조건들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사실상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반응이다.

살아있는 활동의 소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나 자신들의 특정한 신체부분을 화폐와 교환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삶의 창조적인 내용이나 자신들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화폐와 교환한다.
사람들이 화폐를 삶의 등가물로 받아들이자마자, 살아있는 활동들의 판매는 육체적인 생존과 사회적인 생존의 조건이 된다. 삶은 생존을 위해 교환된다. 창조와 생산은 판매된 활동을 뜻하게 된다. 인간 활동은 오직 판매된 활동일 때에만 “생산적”이며, 사회에 유용하다.
그리고 인간 자신은 오로지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활동이 판매된 활동의 경우일 때에만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교환의 관점을 수용하자마자, 일상적인 활동은 보편적인 매춘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판매된 활동력 또는 판매된 일상 활동은 노동의 형식을 취한다. 노동은 인간 활동의 역사적인 형식이며, 단지 하나의 특성을 가진 추상적인 활동이다. 왜냐하면 노동이란 시장성이 있어야 되며, 일정한 양의 화폐와 교환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무관심적인 활동이다. 왜냐하면 노동은 수행된 특정한 과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이 과제의 특정한 내용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채굴, 인쇄, 재단은 서로 다른 활동들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세 가지 활동 모두 노동이다.
노동은 단순히 “돈을 버는 활동”일 뿐이다. 노동의 형식을 취하는 살아있는 활동은 돈을 버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삶은 생존의 수단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축가들, 엔지니어들, 노동자는 건설자가 아니며, 이들의 노동을 구매하는 사람이 건설자이다. 이들의 계획, 계산, 움직임은 이들에게 낯설다. 이들의 살아있는 활동과 이들의 성취들은 이들의 노동을 구매한 구매자의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판매된 활동을 교환함으로써 화폐를, 다시 말해서 관습적으로 수용된 생존수단을 얻는다. 노동자는 이러한 화폐를 가지고 상품을 살 수 있지만 자신의 활동을 다시 살 수는 없다.
노동자는 인간 활동의 생산물들에 수동적으로 감탄한다. 노동자는 세상에서 인간 활동을 전환시키는 능동적인 작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무능력한 관람자로 존재한다. 노동자는 아마도 이러한 무능력한 존경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또한 노동이란 고통스럽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삶에 걸쳐서 “행복”해지기를, 즉 비활동적-죽은 채로 태어난 것과 비슷한 조건-이기를 욕망한다. 상품들, 스펙터클들은 노동자를 소비하며, 노동자는 수동적인 감탄을 위해 자신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소진하고, 노동자는 사물들에 의해서 소모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가 더 많이 가질수록, 노동자는 더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개인은 주변적인 창조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삶·속에서의·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 활동의 자본주의 형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임금노동을 폐지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탈소외화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

상품물신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소외시키고, 자신의 활동을 상품과 인간노동의 물질적인 그릇 속에서 체현시키면서 자기 자신들을 재생산하고 자본을 창조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특히 아카데믹한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언급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상품이란 “오로지 노동을 통한 생산물”이 아니라 토지, 노동, 자본-즉, 자본주의의 성삼위일체-라는 근본적인 “생산요소들”을 통해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요 “요소”는 명백하게도 이 요소들의 주인공인 자본이다.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일상적인 활동들을 취하는 사회형식을 은폐하고 가리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며, 생산자들이 자기 자신들과 착취자들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착취하는데 사용되는 도구들까지도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보수를 받는다.
물, 공기, 태양이 상품생산자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토지 또한 상품생산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경제학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일반은 토지, 화폐, 노동의 생산물을 사물들로, 다시 말해서 가치를 생산하고, 창조하며, 소유자를 위해서 작동할 수 있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물들로 다룬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물신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물신주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개념들에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며, 경제학에 의해 교리의 지위로까지 격상된다.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생산요소들”과 같은) 사물들이며, (화폐가 “회전한다”, 자본이 “생산한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살아있는 사물들이다.
물신주의 숭배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수행한 활동의 생산물을 자신의 물신에 귀속시킨다. 그 결과 물신주의 숭배자들은 (자연을 변환시킬 수 있는 힘, 자신의 일상생활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같은)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를 그친다.
따라서 물신주의 숭배자들은 단지 자신의 물신에 귀속시키는 “힘”만을 (즉, 상품을 살 수 있는 “힘”만을) 행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물신주의 숭배자들은 자기 자신을 거세하며, 자신의 생식력을 물신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물신은 죽은 사물이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생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신은 하나의 사물이다. 자본주의 관계는 이 사물을 통해서 유지된다.
자본의 신비로운 힘, 자본의 생산할 수 있는 “힘”, 자본의 생식력은 자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창조적인 활동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자본가에게 판매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외된 노동을 상품으로 물질화시키거나 사물화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활동이 낳은 생산물을 통해서 구매되지만, 자신들의 활동을 자본의 활동으로 보며,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의 생산물로 본다.
사람들은 창조적인 힘을 자신들의 활동이 아니라 자본에 귀속시킴으로써 자기 자시의 활동과 자기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본에게 양도한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자본의 인격화인 자본가들에게 양도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활동을 생명력 없는 사물들에 귀속시키는 상품물신주의, 화폐물신주의, 일상 활동의 신비화, 일상생활의 종교는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태어난 정신적인 공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인 사회관계들의 특성에서 비롯된 기원을 갖고 있다. 인간들은 사실 사물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관계 맺는다. 물신은 사실상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물신을 통해서 자신들의 활동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활동은 수행하는 것은 물신이 아니다. 원료를 가공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며, 재화를 생산하는 것도 자본이 아니다, 만약 살아있는 활동이 원료를 변환하지 않는다면, 원료는 변환되지 않은 채로, 자연 상태 그대로, 죽은 물질 그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의 살아있는 활동을 계속해서 판매하려 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무능력이 드러날 것이다. 즉, 자본은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다. 여전히 지속되는 자본의 능력은 보편적인 일상의 매춘을 통해서 특성화된 일상생활의 우회된 형식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힘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소외시킨다. 만약 노동자가 자신의 살아있는 활동을 판매하지 않는다면, 그는 임금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조건을 소외시키는 것은 임금이 아니다.
만약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삶을 판매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보편적인 매춘은 생존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될 것이다. 삶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살아있는 행동을 소외시키는 것은 사물들-이 사물들을 위해서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는-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려는 사람들의 성향이다.
노동자가 판매한 살아있는 활동은 자본가들이 구매한다. 따라서 자본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자본이 “생산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활동이다. 자본가, 즉 원료와 생산도구의 “소유자”는 자연적인 대상들과 다른 사람의 노동생산물을 자기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사유재산“을 창조하는 것은 자본의 신비로운 힘이 아니다. 살아있는 활동이 ”재산“을 창조하는 것이며, 이러한 활동의 형식이 재산을 사적인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 사회실천연구소 간 월간 이론번역지『 실천 』(2011.9 통권58호) '일상생활의 재생산' 중에서(발췌)
▒ 원출처 : libcom.org The Reproduction of Everyday Life - Fredy Perlman
[사회실천연구소의 말]
실천(Praxis)
"일상적으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자본주의와 늘 전면에서 투쟁하면서 자본주의 타도의 길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욕은 강하나 이론적 천착이 부족하고 현장에서 맨날 투쟁 속에 살다보니 이론적 감각이 무디어졌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실천은 이론적 작업을 요구합니다." (어느 실천활동가의 말)
우리는 지금 여러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개혁과 신우익의 정치적 우세, 지구적 자본주의의 극적인 전진, 사회주의의 종말 등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겸허하게 이론을 다시 꼼꼼히 살피고 국제정세를 분석하면서 사유를 넓히고 운동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번역의 시대'를 거치려 합니다.
사회실천연구소와 함께 할 자료/후원회원을 모집합니다.
1. 자료회원님은 사회실천연구소가 내는 월간 이론번역지 [실천]을 보내드립니다.
2. 후원회원님은 사회실천연구소가 내는 월간 이론번역지 [실천], 연구 출판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후원회원님은 본 연구소 세미나와 토론회에 먼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자료회원 : 1개월 1만원 ▶ 후원회원 : 월 2만원 이상입니다. ▶ 계좌번호 : 신한은행 110-004-883923 예금주 황동하
[한국인권뉴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