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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의 기초
찰스 다윈
3607 903  /  259
2011년 10월 04일 20시 53분 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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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의 기초(1924)1)/차례







                        1. 레닌주의의 역사적 근원


2. 방법


3. 이론


4.  프롤레타리아독재


5. 농민문제


6. 민족문제


7. 전략과 전술


8. 당


9. 사업의 방식












레닌주의의 기초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행한 강연




레닌 입문자를 위해




  레닌주의의 기초는 커다란 주제이다. 이 주제를 전부 다 논하려면 한 권의 책이 필요로 될 것이다. 실로, 수권의 책이 필요로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의 강의가 레닌주의를 전부 다 설명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한 간결한 개요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에 대한 성과적인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몇 가지 기초적인 출발점을 세우기 위해, 이 개요를 소개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레닌주의의 기초를 해설하는 것은 여전히 레닌의 세계관의 기초에 대해 해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의 세계관과 레닌주의의 기초는 영역에 있어 동일하지 않다. 레닌은 맑스주의자였고, 맑스주의는 물론 그의 세계관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 점으로부터 레닌주의에 관한 설명이 반드시 맑스주의의 기초를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레닌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레닌이 맑스주의의 전반적 보고(寶庫)에 기여했고 또 당연히 그의 명성과 결부되어 있는 레닌의 저작들에서 나타난 특징과 새로운 것을 설명함을 뜻한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나는 레닌주의의 기초에 관한 내 강의를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혹자는 레닌주의가 러시아의 상황이 갖는 특수한 조건에 대한 맑스주의의 적용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규정은 진실의 일면이지 아무리해도 진실 전부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레닌은 실로 맑스주의를 러시아의 조건에 정확히 적용했고, 더우기 그것을 명인(名人)다운 방식으로 적용하였다. 그러나 만약 레닌주의가 단지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에 대한 맑스주의의 적용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순수히 민족적이고 단지 민족적인, 즉 순수히 러시아적이고 단지 러시아만의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주의가 단순히 러시아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발전 전반에 근거한 국제적인 현상임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규정이 일면성에 처해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다른 혹자는 레닌주의가 온건하고 비혁명적으로 되었다고 주장되는 후기 맑스주의와는 구별되는 1840년대에 맑스주의가 지녔던 혁명적 요소를 부활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맑스주의의 교의를 두 개의 부분, 즉 혁명적인 부분과 온건한 부분으로 나누는 이 어리석고 저속한 구분을 논외로 한다면, 전체적으로 보아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운 이 규정조차도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다는 점을 시인해야만 할 것이다. 이 일면이란 실로 레닌이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제거되었던 맑스주의의 혁명적 내용을 복구하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실의 일면이다. 레닌주의에 관한 전반적인 진실은 레닌주의가 맑스주의를 복구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 하에서 한층 발전시켰던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결국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시대에 있어서 맑스주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레닌주의는 일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과 전술이며, 특수하게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이론과 전술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전(前)혁명 시기(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에, 즉 발달한 제국주의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때에, 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준비기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아직 당면한 실제적 필요성이 아니었던 시기에 활약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의 옹호자인 레닌은 발달한 제국주의의 시기,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양기, 즉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이미 일국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르조아민주주의 분쇄되어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의 단계, 소비에트의 단계가 도래한 시기에서 활약하였다.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가 맑스주의의 한층 진전된 발전인 이유이다.


  레닌주의의 특별히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지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레닌주의가 갖는 이러한 명확한 특징은 두 가지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첫째로, 레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지니지 않을 수 없는 흔적을 갖고 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레닌주의는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고 강화되었으며, 그것에 대항한 투쟁은 자본주의에 대한 성공적 투쟁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맑스 · 엥겔스와 레닌 사이에는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전일적 지배의 한 시기가 놓여져 있고, 이 기회주의에 대항한 가차 없는 투쟁이야말로 레닌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레닌주의의 역사적 근원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의 제 조건 하에서,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점에 다다르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당면한 실제적 문제로 되었을 때, 혁명을 위한 노동계급의 오랜 준비기가 상승하여 자본주의를 직접 강습하는 새로운 시기로 넘어갔던 때에 발생하여 그 뚜렷한 모습을 갖추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사멸하는 자본주의”라 불렀다. 왜? 왜냐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한까지 밀고 갔기 때문이다. 이 모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 모순은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산업 국가에 있어서 최고로 독점적인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 은행과 금융과두제의 무한한 힘이다. 이 무한한 힘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지닌 일상적 방법 ――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의회 정당과 의회투쟁 ――은 매우 미흡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자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며 아래로 더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기를 집어들 것인가 ―― 이것이 제국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수백만 대중 앞에 제출한 양자택일이다. 제국주의는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몰고 간다.


  두번째 모순은 원료산지와 타국 영토를 위한 투쟁에서 다양한 금융세력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원료산지에 대한 자본의 수출이다. 그것인 이 원료산지의 독점적 소유를 위한 광적인 투쟁이자 이미 분할된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투쟁이며, “태양처럼 찬란한 대지”를 찾으려는 새로운 금융세력과 열강이 그것을 장악한 채 완강히 움켜쥐고 있는 구세력 및 구열강들에 대항하여 특히 광포하게 전개되는 투쟁이다. 자본가들의 여러 다양한 세력들 간의 이러한 광포한 투쟁은 그 안에 제국주의 전쟁, 타국의 영토를 강탈하기 위한 전쟁을 불가피한 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제국주의 상호간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의 위치를 전체적으로 약화시키며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발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이 혁명을 실제적 필연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번째 모순은 한줌의 지배“문명” 민족과 수억에 달하는 세계의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방대한 식민지 및 종속국에 살고 있는 수억의 인민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착취이지 가장 비인간적인 억압이다. 이러한 착취와 억압의 목적은 초과이윤을 수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를 착취함에 있어서 제국주의는 그 곳에 철도와 공장, 제재소, 그리고 공업과 상업 중심지들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출현, 토착 인텔리겐챠의 등장, 민족의식의 각성, 해방운동의 성장 ―― 이러한 것이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모든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혁명운동의 성장은 예외 없이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요성을 갖는바, 그것은 식민지와 종속국들을 제국주의의 예비군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예비군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는 데에 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번성하던” 자본주의를 사멸하는 자본주의로 전화시켰던 제국주의의 주요한 모순이다.


  10년 전에 발발했던 제국주의전쟁의 의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전쟁이 모든 모순을 하나의 매듭으로 모아 그것을 저울 위에 내던졌으며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투를 가속화하고 촉진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는 혁명을 실제적 불가피성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거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위한 호조건을 창출하는 데에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것이 레닌주의를 탄생시켰던 국제적 상황이었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른다 : 그것은 모두 매우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제국주의의 본토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던 러시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보다도 러시아에서 러시아를 위해 활동했던 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많은 나라 중에서 왜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탄생지가 되었는가?


  왜냐하면 러시아는 제국주의가 갖는 모든 모순의 결절점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어떤 다른 나라보다 더 혁명으로 가득 차 있었고 따라서 러시아만이 그 모순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짜르 러시아는 최고로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형태를 취한 모든 종류의 억압 ――― 자본주의적, 식민지적, 군사적 ――― 의 본거지였다. 러시아에서 자본의 무한한 힘은 짜리즘의 전제와 결합되었고, 러시아 민족주의의 침략성은 비러시아 인민에 대한 약탈자로서의 짜리즘의 역할과 결합되었고, 또 대부분의 지역들 ――― 터어키, 페르시아, 중국 ――― 에 대한 착취는 짜리즘에 의한 이들 지역의 강탈이나 정복전쟁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레닌이 짜리즘을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였다고 말한 것은 정당했다. 짜리즘은 제국주의의 가장 사악한 특징의 집약이었으며 그것들 고도로 끌어 올렸다.


  나아가, 짜르 러시아는 그것이 연료나 야금산업과 같은 러시아 민족경제의 기본분야를 통제하는 외국자본을 자유로이 도입했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수백만 군인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주요한 예비군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어마어마한 이윤을 보위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선에 피를 흘렸던 1,400만의 병력의 러시아군대를 기억해 보라.


  더 나아가, 짜리즘은 유럽 동부에서 제국주의의 파수견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파리와 런던, 베를린과 브뤼셀에서 제공된 차관의 이익을 수억의 주민들에게서 갈취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다.


  마지막으로, 짜리즘은 터어키, 페르시아, 중국 등의 분할에 있어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였다. 제국주의전쟁이 협상국의 제국주의자들과의 동맹 하에 짜리즘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사실, 더우기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불가결한 요소였다는 점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한 것이 짜리즘의 이해와 서구 제국주의의 이해가 서로 얽혀있고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이해라는 단일한 실타래에 융합되게 되었던 이유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짜리즘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한 생사의 투쟁을 벌이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 낡고 전제적이며 부르조아적인 러시아와 같은 동방의 강력한 지지자와 인력 및 자원의 풍부한 저장고의 손실에 단념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짜리즘을 공격하고자 했던 누구라도 반드시 제국주의에 방향을 돌렸고, 짜리즘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그 누구라도 동시에 제국주의에 반항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짜리즘을 굴복시키는데 전념하였던 누구든지 간에 만약 그가 단지 짜리즘을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일소하려고 의도했다면, 제국주의 역시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짜리즘에 반대하는 혁명은 제국주의에 대항한 혁명,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으로 향하였고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에서 성장하고 있던 위대한 인민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그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농민층과 같은 중요한 동맹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이 중도에 멈출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이 승리한 경우 더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제국주의에 대항해 반기를 치켜올려야 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이들 모순이 특히 불쾌하고(repulsive) 특히 참을 수 없는 특징으로 인해 가장 노골적으로 폭로된 곳이 러시아이며 또 러시아가 서구 금융자본을 동방의 식민지들과 연결시켜 주는 서구 제국주의의 극히 중요한 후원자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러시아가 제국주의의 모순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세력으로 실재했던 유일한 나라였다는 의미에서 러시아가 제국주의의 모순의 결절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이것으로부터 러시아혁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시초부터 그것은 국제적 성격을 띄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제국주의의 바로 그 기초를 흔들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 도출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활동을 러시아혁명이라는 좁은 민족적 테두리 안에 가둬둘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반대로, 국내적이고(심각한 혁명적 위기) 국외적인(전쟁) 상황 전체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에 있어서 이러한 테두리를 뛰어넘게 하였고, 투쟁을 국제적 영역으로 옮아가게 만들었으며, 제국주의의 피해를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사회배외주의(social-chauvinism)와 사회평화주의(social-pacifism)를 분쇄하게 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함과 동시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를 타도할 임무를 촉진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무기 ―――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전술 ――― 를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이 길만이 부르조아 질서의 부흥으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할 수 있는 국제적 상황의 일정한 변화를 창출할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본고장이 되었던 이유이자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 레닌이 그것의 창시지가 되었던 이유이다.


  근세기의 40년대에 있어 독일과 맑스 및 엥겔스의 경우처럼 러시아와 레닌의 경우에도 거의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은 20세기 초반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부르조아혁명으로 충만해 있었다. 맑스는 당시에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관심을 주로 독일에 돌린다. 왜냐하면, 독일은 영국의 17세기나 프랑스의 18세기보다 더 발전된 유럽문명이라는 조건하에서 더더욱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수행될 수밖에 없는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기 때문이며, 독일에서의 부르조아혁명은 즉각적으로 이어질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혁명운동의 중심은 독일로 옮겨지고 있었다.


  왜 과학적 사회주의의 탄생지가 정확히 독일이었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왜 그것의 창조가 되었는지의 타당한 이유가 되었던 위의 인용구절에서 맑스에 의해 지적된 바로 그러한 상황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동일한 것이 단지 더한층 강화된 정도만으로 20세기 초반의 러시아에 대해 이야기 되어야 한다. 러시아는 그 당시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조건들이 더욱 진전되었던 때의 19세기의 40년대의 독일(영국과 프랑스는 차치하더라도)의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더욱 발달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이 혁명을 수행해야 했다. 더우기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효(ferment)이지 서곡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모든 증거가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이 여전히 태내 상태에 있었던 일찌기 1902년에, 레닌이 그의 팜플렛 『무엇을 할 것인가 ? 』에서 예언적인 말을 썼다는 것은 우연적이라고 볼 수 없다.


 “역사는 지금 우리(즉,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스탈린)로 하여금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해 있는 모든 당면한 임무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당면 임무에 직면케 하고 있다. 이러한 임무의 완수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적 반동(이는 현재 이야기되어질지도 모른다)의 가장 강력한 보루의 파괴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국제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만들 것이다.”


  다시 말해,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러시아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알다시피, 러시아혁명의 과정은 레닌이 예언이 그 이상으로 진실임을 입증해 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혁명을 수행하고 그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갖고 있는 나라라면 당연히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탄생지로 되었을 것이다는 점이 놀랄 일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 레닌이 마찬가지로 이 이론과 전술의 창조자이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로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2. 방법



   나는 이미 맑스 · 엥겔스와 레닌 사이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전일적인 지배의 시기가 놓여있다고 말했다. 정확히 하기 위해,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기회주의의 형식적인 지배가 아니라 그것의 실제적인 지배라는 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공식적으로는, 제2 인터내셔널은 “충실한” 맑스주의자들과 “정통” ――― 카우츠키 등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은 기회주의의 노선을 따랐다.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이 순응하는 소부르조아적 속성 때문에 스스로 부르조아지에 순응하였다. “정통”은 또한 “당내 평화”라는 명분으로 부르조아지와 “단결을 유지”하려고 스스로 기회주의자들에 순응하였다. 따라서 부르조아지의 정책과 “정통”의 정책 간의 연계는 긴밀해졌고 그 결과를 기회주의는 최고의 위세를 떨쳤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 전전(戰前)의 시기, 다시 말해 제국주의의 파국적인 모순이 아직은 그리 확연한 징후를 보이지 않았던 시기, 노동자의 경제적 파업과 노동조합이 다소 “일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시기, 선거 켐페인과 의회세력들이 “아찔할 정도의” 승리를 거두었던 시기, 투쟁의 합법적 형태들이 극구 칭찬되어졌던 시기, 그리고 자본주의가 합법적 수단에 의해 “파멸”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시기 ――― 간단히 말해서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호화롭게 살고 있었고 게다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해, 대중들의 혁명적 교육에 관해 진지하게 사고하려는 경향이 없었던 시기였다.


  완전한 혁명이론 대신에 모순된 이론적 가정과 이론의 파편들이 있었고, 그것은 대중들의 실제적 혁명투쟁으로부터 유리되어 진부한 도그마로 변질되었다. 물론 겉치레를 위해 맑스의 이론이 언급되었지만, 맑스의 이론으로부터 그것의 생동감 있는 혁명적 정신을 빼앗았을 뿐이다.


  혁명적 정책 대신에, 무기력한 속물근성과 천박한 정치적 타협, 의회주의적 권모술수와 의회주의적 음모가 있었다. 물론 겉치레로 “혁명적” 결의안과 슬로건이 채택되었으나 단지 서류함에 처박혀 묵살되었을 뿐이었다.


  당이 자신의 오류를 논거로 하여 정확한 혁명적 전술을 훈련받고 교육받는 대신에, 논쟁중인 문제에 그럴싸한 핑계를 꾸며대었으며 그것은 얼버무려졌거나 감추어졌다. 물론 외관상 논쟁중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없었지만 다만 일종의 “유연한” 결의로 매듭짓기 위해서 이었다.


  이러한 것이 제2 인터내셔널의 특색이자, 그것의 활동방식, 그것의 병기고였다.


  그러는 사이에 제국주의전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투의 새로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투쟁의 낡은 방법들은 금융자본의 무한한 힘 앞에서 부적합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활동 전체, 사업 방식 전반을 철저히 조사하고 모든 속물근성, 편협성, 정치적 음모, 배교(背敎), 사회쇼비니즘과 사회평화주의를 축출하는 것이 필요로 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병기고 전체를 조사하여 녹슬고 낡아빠진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같은 준비작업 없이 자본주의에 대항해 전쟁에 착수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러한 작업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래의 혁명전투에 무력하게 대처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장해제될 위험에 처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아우게(Augean) 마굿간에 대한 이러한 총괄적인 분해와 대청소를 해내는 명예가 레닌주의에 부과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레닌주의의 방법이 생성되고 만들어졌던 조건이었다.


  이러한 방법의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


  첫째,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도그마를 대중들의 혁명적 투쟁과 생생한 실천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검증하는 것 ――― 말하자면 이론과 실천간의 균열된 통일을 복구하는 것과 그것들 사이의 불화를 화해시키는 것,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혁명적 이론으로 무장된 프롤레타리아당이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의 정책을 그들의 슬로건과(신뢰할 수 없는) 결의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 그들의 활동에 의해 검증하는 것,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대중들의 신뢰가 획득되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혁명투쟁에 대한 대중들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기 위하여 전(全)당사업을 새로운 혁명노선으로 재조직하는 것,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대중들을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프롤레타리아당 내부의 자기비판, 당 자신의 오류에 기반한 교육과 훈련,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당의 정예 간부와 지도자가 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것이 레닌주의의 방법이 갖는 기초이자 실체이다.


  이 방법은 실천상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이 항상 출발점으로 삼는 많은 이론적인 도그마들을 갖고 있다. 이 중 몇 개를 살펴보자


  첫 번째 도그마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의 조건에 관해서. 기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나 국가 내에서 대다수를 이루지 못한다면 권력을 잡을 수 없고 또 잡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 우스꽝스러운 명제는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므로 아무런 증거도 제출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치고,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신사양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 그런데 주민의 소수를 이루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근로대중의 광범한 다수를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키는 기회를 갖게 되는 역사적 상황이 발생한다(전쟁, 농업공황 등)고 가정해보자. 이번에는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아서는 안되는가?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의 정면을 돌파하고 대단원을 앞당기는 국제적 국내적 호조건을 활용해서는 안되는가? 근세기의 50년대에 벌써 맑스는 이른바 “농민 전쟁의 재판(再版)”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있었다면 사태는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찬란하게” 동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숙자는 예를 들어 1917년의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더 작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선호한 이러한 도그마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갖는 모든 중대한 의의를 결여하고 있음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실제적 경험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대중들의 혁명투쟁이 갖는 실제적 경험은 시대에 뒤진 이러한 도그마를 반박하고 깨트려버린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두 번째 도그마 : 만일 국가 행정을 조직화할 수 있는 훈련된 문화 · 행정적 기간요원의 적정수가 부족하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이러한 기간요원은 우선 자본주의 조건하에서 훈련되어야 하며 오직 그렇게 된 연후에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그렇다고 치고, 레닌은 응수한다 : 그런데 왜 이같은 방식으로 향해서는 안되는가. 먼저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고 그 다음 7리그[league : 거리의 단위, 약 3마일을 가리킨다-역자]의 걸음걸이로 [매우 빠른 속도를 의미함-역자] 근로대중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지도자와 행정가의 다수 간부를 훈련시키는 것이 왜 안되는가? 자본의 지배하에서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하에서 노동자층으로부터 지도자들의 간부를 보충하는 것이 백배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은 러시아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대중들의 혁명투쟁이 지닌 실제적 경험은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이론적 도그마 역시 무자비하게 분쇄해버린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세 번째 도그마 :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으로 불합리하고(엥겔스의 비판을 보라) 실제상으로 위험하며(그것은 국가의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과정을 파괴할지도 모르고, 노동조합의 재원을 고갈시킬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주요형태인 의회주의적 투쟁형태의 대체물로 간주될 수 없이 때문이다. 아주 당연히 레닌주의자는 응수한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먼저 엥겔스는 총파업의 모든 종류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직 총파업의 특정 종류,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대신에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옹호되던 경제적 총파업을 비판했다. 이것이 정치적 총파업의 방법과 무슨 연관을 가지는가? 둘째로, 의회투쟁의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주요형태라는 것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증명된 적이 있었던가? 혁명운동의 역사는 의회투쟁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투쟁 이외의 투쟁을 조직화하기 위한 학교이지 보조수단이며, 자본주의하에서 노동계급운동의 근본문제는 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대중의 직접적 투쟁과 총파업, 그들의 봉기에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로,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이 의회투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누가 주장하였던가? 언제 어디서 정치적 총파업의 지지자들의 의회적 형태를 비의회적 투쟁 형태로 대체하려고 하였던가? 넷째,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의 극히 중요한 학교이자 자본주의의 아성을 공격하는 전야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불가결한 수단이라는 점은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속물들은 경제생활의 정상적 과정의 방해나 노동조합 재원에 대해 비탄스러워 하는가? 혁명투쟁의 실제적 경험이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도그마마저 박살낸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그리고 등등.


  이것이 바로 레닌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그것은 “진정한 대중과 진정한 혁명운동의 실천활동과 긴밀히 결합될 때만이 최종적으로 실현되어질 것이다.”(『“좌익”공산주의, 유아적 혼란』)라고 말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론은 실천에 봉사해야 하며  “이론은 실천상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답하여 하며”(『‘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와 투쟁하는가?)실천적 결과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의 정치적 슬로건과 정치적 결의에 대해 말자면, 자신들의 반혁명적 행위를 은폐시키려고 과장된 혁명슬로건과 결의를 활용하는 이들 당들의 정치적 실천이 얼마나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완전히 타락했는지를 실감케 하는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슬로건의 역사를 상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바젤대회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과장된 표현을 기억하고 있다. 대회에서 제2 인터내셔널은 만약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위협적 슬로건을 가지고 봉기의 모든 위험으로써 제국주의자들을 협박했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의 바로 직전에 바젤 결의는 서류가방속에 처넣어 잊혀졌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슬로건 ――― 그들의 자본주의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서로를 전멸시키는 슬로건을 제시받았다는 것을 누가 잊었겠는가? 혁명적 슬로건과 결의가 행동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는 점은 명백하지 않는가?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의 완전한 속물성과 레닌주의의 방법이 지닌 완벽한 위대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킨 레닌주의 정책과 전쟁기간 동안 제2 인터내셔널이 취한 배반적 정책을 단지 대조해 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레닌의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카우츠키가 당의 행위가 아니라 지(紙)상의 슬로건과 문서로써 당을 판단하려고 하는 기회주의적 시도를 호되게 나무라고 있다.


  “카우츠키는 슬로건의 제출이 사태를 변화시킨다고… 사기 치면서 전형적인 소부르조아적이고 속물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부르조아민주주의 역사 전체는 이런 환상을 논박한다. 부르조아민주주의자들은 인민을 속이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슬로건’을 항상 제출해 왔고 여전히 제출하고 있다. 요점은 그들의 진지함을 검토하고, 그들의 말과 그들의 행위를 비교하고, 이상주의적이거나 허풍스런 빈말에 속지 말고 계급본성에 착수하는 것이다.”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이 자기비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 자신의 오류를 감추려하거나 논쟁 중인 문제를 얼버무리려고 하고 생동감 있는 사고를 무디게 하고, 당이 자신의 오류로부터 혁명적 훈련을 쌓는 것을 방해하는 ‘잘되고 있다’는 식의 거짓시늉으로 자신들의 결점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습성 ――― 레닌에 의해 비웃음 받고 웃음꺼리가 되었던 습성을 언급할 필요는 전혀 없다. 레닌은 그의 팜플렛 『“좌익”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당의 자기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당 자신의 오류에 대한 정치적 당의 태도는 그 당이 얼마나 열성적이며 또 당이 그급과 일하는 대중들을 위하여 얼마나 실제적으로 자기 의무를 다하는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그 원인을 조사하는 것, 오류가 발생하게 된 사정을 분석하는 것, 그리고 이를 교정할 방법에 대해 철저히 토론하는 것 ――― 이것이 진지한 당의 표징이다. 이것이 당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방식이며, 이것이 당이 그 계급대중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하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당이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고 자기비판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당에 대항하는 적에 의해 이용될지도 모르므로 다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레닌은 그런 주장은 사소하고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간주하였다. 우리 당이 아주 유약하고 소규모였던 1904년에 이미 레닌은 그의 팜플렛 『한걸음 앞으로, 두걸음 뒤로』에서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즉 맑스주의의 반대자들-스탈린)은 우리의 논쟁하는 습성을 고소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점잔 뺀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우리 당의 약점과 결점을 다룬 나의 팜플렛으로부터 고립된 귀절들을 뽑아내어 이를 그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고 애쓸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성가신 것에 교란당하지 않고, 그런 것들에 아랑곳없이 자기비판작업과 또 노동계급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극복되어 질 그들 자신의 결점에 대해 가차 없는 폭로작업을 계속할 만큼 벌써 단련되고 있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 레닌주의의 방법이 지닌 특징적인 면이다.


  레닌의 방법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 맑스 자신에 따르자면 ――― “논설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맑스의 교의에 이미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의 방법에 시종일관 가득차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레닌의 방법이 단순히 맑스의 방법을 복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레닌의 방법은 복구일 뿐 아니라 맑스의 방법, 즉 그의 유물변증법이 지닌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의 복구일 뿐만 아니라 그 응고물이자 더한층 발전된 것이다.



   3. 이론



  이 주제에서 나는 세 가지 문제를 다루겠다.


  1)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서 이론의 중요성

  2) 자생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

  3) 프롤레타리아혁명 이론


  1) 이론의 중요성. 혹자는 레닌주의의 주요한 요지가 맑스주의 명제를 행동으로, 그것들의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는 의미에서 레닌주의가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둔다고 생각한다. 이론에 관한 한, 레닌주의는 다소 그것에 무관심하다고 주장되고 있다. 우리는 플레하노프가 이론, 특히 철학에 관하여 레닌이 “무관심”하다고 반복해서 안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현재 많은 레닌주의적인 실천적 노동자들이, 특히 상황이 그들에게 짐지우는 막대한 양의 실천적 작업 때문에 이론에 커다란 호의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나는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한 이러한 매우 기묘한 의견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진실의 그 무엇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을 떨쳐버리려는 실천적 노동자들의 시도는 레닌주의의 전체 사상에 반하는 것이고 또 사업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론은 그 일반적 측면에 있어 모든 나라에서 획득된 노동계급운동의 경험이다. 물론, 실천의 방향이 혁명이론에 의해 조명되지 않았을 경우 실천이 어둠속을 헤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이론은 목적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불가분의 연관 위에 세워져 있다면 그것은 노동계급운동에서 거대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 단지 이론만이 운동에 대한 확신을, 방침을 결정할 힘을,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사건의 내적 연관에 대한 이해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 단지 이론만이 오늘날 제계급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있는가 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깨닫도록 실천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만큼 다음의 유명한 명제를 셀 수 없이 말하고 되풀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혁명이론 없이 혁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스탈린의 강조](『무엇을 할 것인가?』, 1901. 가을~1902. 2.)


  레닌은 당에 부과된 국제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투사라는 역할에 비추어, 또 당이 처한 복잡한 국내적 국제적 상황에 비추어, 특히 우리와 같은 당에 있어서 이론이 갖는 막대한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1902년에 이미 우리 당이 갖는 이러한 특수한 역할을 예견하면서 다음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이론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투사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


  우리 당의 역할에 관한 레닌의 예언이 진실로 된 지금, 레닌의 이 명제가 특별한 힘과 특별한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논증할 필요는 거의 없다.


  레닌이 이론에 부여했던 거대한 중요성의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아마도, 맑스주의자들 사이의 반유물론적 경향에 대하여 포괄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엥겔스의 시대로부터 그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유물론적 철학의 기초 위에서 일반화시키는 매우 중대한 과제를 수행한 사람이 레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엥겔스는 유물론은 모든 획기적인 발견으로부터 그 형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자신의 시대에 그의 뛰어난 저작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이러한 과제를 수행했던 사람은 레닌 이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레닌이 철학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비웃기를 좋아했던 플레하노프가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는 진지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 자생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 또는 운동에서 전위의 역할. 자생성의 “이론”은 기회주의가 지닌 이론이자 노동운동의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이며 노동계급 전위 및 노동계급당의 역할을 실제적으로 거부하는 이론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노동계급운동이 갖는 혁명적 성격에 결정적으로 대립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항하는 투쟁 노선을 취하는 운동과는 상반되며, 오로지 자본주의에서 “얻을 수 있는”요구, 자본주의가 “받아들일 수 있는 ” 요구의 노선에 따라 진행되는 운동에 지지를 보낸다. 그것은 “최소저항 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자생성의 이론은 노동조합주의 이데올로그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자생적인 운동에 정치 의식적, 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에 결정적으로 대립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고 있는 당에, 대중들을 정치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당에, 운동을 지도하려는 당에 대립된다. 그것은 운동이 그 자신의 과정을 따르려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자생적인 발전경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역자]운동이 지니는 정치적 의식적인 요소에 찬성을 보낸다. 그것은 다만 자생적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의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당에 지지를 보낸다. 자생성의 이론은 운동에서 의식적 요소가 갖는 역할을 축소시키는 이론, “추수주의”사상이며 모든 기회주의의 논리적 토대이다.


  실제로 러시아 1차 혁명 이전에 이미 그 모습을 나타냈던 이 이론은 소위 “경제주의자”라 불리워진 그 이론의 지지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독립적인 노동자당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짜르의 타도를 위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고, 운동에 있어서 순수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책을 설교하고, 또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을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지의 헤게모니에 내맡겨 버리도록 이끌었다.


  레닌이 그의 팜플렛 『무엇을 할 것인가 ? 』에서 행한 구『이스크라』에 대한 투쟁과 “추수주의” 이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이른바 “경제주의”를 분쇄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동계급의 진실로 혁명적인 투쟁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창출하였다.


  이러한 투쟁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독립적 노동자당을 창출하고 그것이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완전히 소용없는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이 전적으로 러시아적 현상만은 아니다. 이는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에 예외없이 ――― 약간 다른 형태로 ――― 아주 널리 퍼져있다. 나는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 의해 변조된 소위 “생산력”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만사를 정당화시키고 모든 사람을 구술리며, 사람들이 넌저리가 나서 싫증을 내게 된 후에야 사실을 기록하거나 설명하고, 그것들을 기록하되 알맹이를 빼버린다. 맑스는 유물론을 세계를 설명하는 것 자체에 머무를 수 없으며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우츠키와 코(Co.)는 이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맑스의 정칙(定則) 첫 부분에 만족한 채 앉아 쉬기를 좋아한다.


  이런 “이론”을 적용한 숱한 예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다. 제국주의전쟁 전에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이 만약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에 선언하겠다고 으름장을 부린 적이 있다. 전쟁 바로 직전에 이들 당은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묵살하고 반대의 것, 즉 “제국주의 조국을 위한 전쟁”을 내세웠다. 슬로건의 이러한 변화가 낳은 결과로써 수백만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로 인해 비난받아야 한다든지 누군가가 노동계급에 충실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 만사는 일어났어야 하는 대로 [필연적으로-역자] 일어났다. 왜냐하면, 먼저 인터내셔널은 “평화의 도구”이지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에 널리 보급된 “생산력의 수준”으로는 아무런 일도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생산력”이다. 이것이 카우츠키씨의 “생산력 이론”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정확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 “이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맑스주의자가 아니게 된다. 당의 역할은 ? 운동에 있어 그것들의 중요성은? 그렇다면 “생산력의 수준”과 같은 결정적인 요소 앞에서 당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맑스주의를 변조한 많은 유사한 예들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주의의 벌거숭이를 숨기려고 애쓰는 이 사이비 “맑스주의”는 레닌이 이미 1차 러시아혁명 이전에 투쟁하였던 “추수주의” 이론과 똑같은 유럽적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이러한 이론적 변조의 타파야말로 서구에서 진실로 혁명적인 당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적 조건이라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3) 프롤레타리아혁명 이론. 프롤레타리아혁명에 관한 레닌의 이론은 세 가지 기본명제에 근거해 있다.


  첫 번 명제 : 발달한 자본주의국가에 있어 금융자본의 지배, 금융자본의 주요한 기능 중의 하나로써 주식과 증권의 발행, 제국주의의 토대 가운데 하나인 원료산지로의 자본 수출, 금융자본의 지배의 결과인 금융과두제의 무한한 힘 ――― 이 모든 것은 독점자본주의의 엄청난 기생성을 드러내주고 자본주의적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의 멍에를 백배나 더 무겁게 만들며,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한 노동계급의 분노를 격화시키며 나아가 대중들을 자신의 유일한 구원인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인도하고 있다(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 FLP, 1973.).


  두 번 명제 : 식민지 및 종속국에 대한 자본수출의 증가, 그들이 전 지구를 장악하기까지

“세력권” 확장 및 식민지 소유, 한줌의 “선진”국가에 의한 세계인구의 광범한 다수의 금융적 노예상태와 식민지적 억압이라는 세계체제로의 자본주의의 전이 ――― 이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분리된 민족경제와 민족영토를 세계경제라는 단일한 사슬의 고리로 바꾸어 내었고, 다른 한편으로 지구의 전 주민을 두개의 진영 ――― 광대한 식민지와 종속국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식민지와 종속국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다수 ――― 으로 분열시켰다(『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를 보라).


  이 사실로부터 두 번째 결론이 나온다 : 식민지국가에서 혁명적 위기의 격화와 국외의 식민지전선상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봉기 요소의 증대.


  세 번 명제 : “세력권”과 식민지의 독점적 소유, 이미 영토를 장악한 나라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나라간의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광포한 투쟁을 끌어내는 자본주의국가의 불균등 발전, 깨어진 “균형”을 복구하려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제국주의전쟁 ―――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내부전선인 제 3의 전선에서 투쟁의 격화를 끌어낸다. 이 전선은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고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앞의 두 전선 ―――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전선과 식민지 해방전선 ――― 의 결합을 촉진시킨다(『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를 보라).


  이 사실로부터 세 번째 결론이 나온다 : 제국주의하에서 전쟁은 피할수 없으며, 제국주의 세계전선에 대항하는 통일된 세계혁명전선에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동방의 식민지혁명 사이의 연합은 불가피하다.


  레닌은 이 모든 결론들을 “제국주의는 사회주의혁명의 전야이다”[강조는 스탈린]라는 하나의 일반적 결론으로 결합시키고 있다.(“『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에 대한 서문”, 1974.4)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그 혁명의 성격, 범위, 깊이, 혁명의 일반적 개요에 대한 접근이 변화한다.


  이전에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전제조건에 대한 분석이 대개 개별 국가의 경제상태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었다. 이제 이러한 접근은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 이제 문제는 모든 혹은 대다수 국가가 갖는 경제상태라는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개별 국가와 개별적인 민족경제는 자급자족 단위이기를 멈추었으며 세계경제라는 하나의 단일한 사슬 고리로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전의 “점잖은”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발전했고, 제국주의는 한줌의 “선진”국가들이 전 세계의 주민의 광범한 다수를 금융노예화하고 식민지적으로 억압하는 세계체제 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개개 국가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몇몇 발달한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객관적 조건의 존재나 결여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제 이러한 관점은 더이상 적합하지 못하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완전한 전체로서 세계 제국주의경제의 전(全)체제 속에서 혁명의 객관적 조건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하나의 전체로서의 체제라면,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전체로서의 체제가 이미 혁명을 위해 성숙되어 있기 때문에, 이 체제 내부에 산업적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몇몇 국가의 존재가 혁명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될 수는 없다.


  이전에는 몇몇 발달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그것의 대립물인 자본의 고립적인 일국전선과 대립하는 고립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실체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제 이러한 관점은 더이상 적합하지 못하다. 이제 우리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의 고립적인 일국적 전선은 제국주의의 세계전선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사슬의 고리로 되었으며, 모든 나라에 있어서 혁명운동의 공동전선은 이것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오직 해당 국가의 내적 발전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제 이러한 관심은 더이상 적합하지 못하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일차적으로 제국주의 세계체제 내부에 있는 제 모순의 발전의 결과로, 한 국가 혹은 다른 국가에서 세계 제국주의전선의 사슬이 파괴되는 것의 결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혁명은 어디에서 시작될 것인가? 어디서, 어느 나라에서 자본의 전선이 최초로 꿰뚫어질 수 있을 것인가?


  산업이 더욱 발전되어 있는 곳,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곳, 문화가 보다 발달되어 있는 곳, 보다 민주주의적인 곳 ――― 이것이 대체로 이전에 주어진 대답이었다.


  아니, 레닌의 혁명이론은 반드시 산업이 발달되어 있는 곳, 등등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세계 제국주의전선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를 파괴한 결과이기 때문에 자본의 전선은 제국주의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곳에서 꿰뚫어질 것이다. 그리고 혁명을 시작하여 자본의 전선을 돌파한 나라는 다른, 보다 발달되어 있지만 자본주의의 구조 내에 남아 있는 나라들보다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덜 발달된 나라임이 판명될지도 모른다.


  1917년에 제국주의 세계전선의 사슬은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러시아에서 한층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곳에서 사슬은 파괴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출구가 마련된 곳은 그곳[러시아]이었다. 왜? 러시아에서는 거대한 민중혁명이 펼쳐지고 있었으며, 그 선두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행진하였고, 그들은 지주로부터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광범한 농민대중들과 같은 중요한 동맹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 혁명은 짜리즘과 같은 무시무시한 제국주의의 대리인과 대립하고 있었고, 짜리즘은 모든 도덕적 위신을 상실했고 당연히 전체 주민으로부터 증오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러시아가 이를테면 프랑스나 독일, 영국과 미국보다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덜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슬은 러시아에서 더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가까운 미래에 사슬은 어디에서 파괴될 것인가? 재차 가장 약한 곳에서 사슬이 이를테면 인도에서 끊어질지 모른다는 점이 미리 배제될 수는 없다. 왜? 그 나라에는 젊고 전투적이고, 민족해방운동과 같은 동맹군 ――― 의심의 여지없이 강력하고 중요한 동맹군 ――― 을 지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곳에서 혁명은 제국주의라는 잘 알려진 적과 대치하고 있고, 제국주의는 아무런 도덕적 신뢰도 없을 뿐 아니라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인도대중들로부터 당연히 증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슬이 독일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점 또한 확실히 가능성이 있다. 왜? 예를 들어 인도에서 작용하고 있는 요소들이 역시 독일에서도 막 작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인도와 독일 간의 발전수준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점은 독일혁명의 전진과 결과에 날인을 찍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이유이다.

  

  “서유럽의 자본주의국가는 사회주의를 향하여 자신의 발전을 극에 다다르게 할 것이다… 단지 그들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평온한 ‘성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몇몇 나라의 착취에 의해서, 제국주의전쟁에서 정복된 최초의 나라에 대한 착취를 동방 전역에 대한 착취와 결합시킴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정확히 1차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로써, 동방은 명백하게 혁명운동에 진입하였고 세계 혁명운동의 전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명백히 빨려들게 되었다.”(「좋을수록 보다 작아야 하지만 보다 좋아야 한다」, 1923. 3.)


  간단히 말하면 : 제국주의전선이라는 사슬은 일반적으로 고리가 보다 약한 곳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으며, 좌우간 반드시 자본주의가 보다 발달된 곳,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런저런 비율과 농민의 이런저런 비율이 존재하는 곳 등등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해당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인구의 비율에 관한 통계학적 평가가 ――― 제국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우기 혁명을 전염병처럼 무서워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교조주의자들이 그것에 그토록 열심히 부여했던 ――― 그 예외적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이다.


  계속해 보자.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은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 사이에는 얼마간 오래 소요되는 시간적 간격으로 인해 하나가 다른 하나와 분리되는 틈이나 적어도 만리장성(Chiness Wall)이 존재하며, 그동안 부르조아지는 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에 대한 “결정적 투쟁”을 위해 힘을 축적하고 대비한다고 주장했다(계속 주장하고 있다): 이 간격은 대개 짧아도 수십년에 걸쳐 연장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만리장성 “이론”은 제국주의라는 조건 아래서는 과학적 의미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으며, 단지 부르조아지의 반혁명적 열망을 은폐하고 위장하려는 수단이며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충돌과 전쟁을 내포한 제국주의라는 조건 하에서, “번영하는” 자본주의가 “사멸하는” 자본주의로 되고(레닌)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 혁명운동이 성장하고 있는 “사회주의혁명 전야”라는 조건 하에서, 제국주의 자신이 짜리즘과 농노제까지 포함하는 모든 반동세력들과 예외없이 동맹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서구 프롤레타리아운동에서부터 동방의 민족해방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세력의 연합이 피할 수 없는 절박한 것으로 제기되고 있는 시기, 봉건적 농노제권력의 잔존물의 제거가 제국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 시기 ――― 이런 조건하에서 다소 발달된 나라의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전자는 후자로 전화해야 한다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러시아혁명의 역사는 이러한 명제가 정확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레닌이 1차 러시아혁명전야인 1905년에 이미 그의 팜플렛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동일한 사슬의 두 고리로, 러시아혁명의 발전이 지니는 단일한 전체상(象)으로 묘사했던 것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정치의 저항을 힘으로 분쇄하고 부르조아지의 동요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농민대중과 동맹하여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지의 저항을 힘으로 타파하고 농민과 소부르조아지의 동요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주민의 반(反)프롤레타리아세력의 대중과 동맹을 맺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바로 신 『이스크라』주의자들이 혁명 발전에 대한 그들의 모든 주장과 결의안에서 극히 편협하게 제시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이다.”


  부르조아혁명의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전화에 관한 생각이 레닌주의 혁명이론의 하나의 초석인 『민주주의혁명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 두 가지 전술』에서보다 훨씬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레닌의 후기저작들에 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떤 동지들은 레닌이 단지 1916년에 이 견해에 도달했으며, 그때까지 그는 러시아혁명이 부르조아적 틀 안에 남아 있을 것이고 따라서 권력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기관의 수중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수중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주장이 심지어 우리의 공산주의적 신문에까지 스며들어 왔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전적으로 오류이며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차 당대회(1905)에서 레닌이 행한 유명한 연설을 언급하고자 한다. 거기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 즉 민주주의혁명의 승리를 “‘질서’의 조직화”가 아니라 “전쟁의 조직화”로 규정하였다(「R.S.D.L.P. 3차 대회, 1905. 4, 25~5. 10」, “13. 사회민주주의자의 임시혁명정부에의 참여문제에 관한 보고”).


  더 나아가 레닌의 유명한 논문, 「임시정부에 관하여」(1905)를 언급해야겠다. 거기서 그는 전개되고 있는 러시아혁명에 대한 전망을 개요하면서, “러시아 혁명이 몇 개월간의 운동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친 운동이며, 그건 단지 현존 권력의 일부분에 대한 하찮은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의 완전한 타도로 나아가는 것임을 보증하는” 과제를 당에 부과한다. 거기서 그는 이러한 전망을 더욱 확대시키고 그것들을 유럽에서의 혁명과 연결시키면서,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가 만약 이를 행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때…그때는 혁명의 큰 불이 유럽전역으로 번져갈 것이다. 부르조아적 반동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유럽 노동자는 차례차례 일어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 다음 유럽의 혁명적 파도는 재차 러시아로 밀려올 것이고 몇 해간의 혁명시대를 수십년의 혁명시대로 바꾸어낼 것이다…”


  나는 1915년 11월에 출판된 레닌의 유명한 논문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공화제를 위해, 토지 몰수를 위해 … 군사적 · 봉건적 ‘제국주의’(=짜리즘)으로부터 부르조아 러시아를 해방시키는데 있어 ‘인민의 비프롤레타리아대중’을 참여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영웅적으로 싸워 나갈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노동자에 대항해 투쟁하는 부농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럽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짜리즘과 지주의 토지권력(agrarian power)으로부터 부르조아 러시아의 이러한 해방을 즉각적으로[강조는 스탈린] 이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레닌의 팜플렛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 있는 유명한 구절을 언급하겠다. 거기서 그는 위에서 인용된 러시아 혁명의 진전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사태는 우리가 말했던 것대로 진행되었음이 판명되었다. 혁명이 진행된 과정은 우리의 추론이 정확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첫째, 군주제에 반대하고 지주 및 중세 권력에 대항하는 농민 ‘전체’와 함께(여기까지 혁명은 여전히 부르조아적, 부르조아민주주의적이다). 다음에, 빈농, 반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농촌부자와 쿨락, 부당이득자를 포함하여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피착취자와 함께, 여기에서 혁명은 사회주의적인 것이 된다. 첫째와 둘째 사이에 인공적인 만리장성을 세우려고 시도하고, 그것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준비정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빈농과의 단결의 정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맑스주의의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속류화시키고, 그것을 자유주의로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아주 당연히 질문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레닌은 “영구(연속)혁명” 사상을 상대로 싸웠는가?


  왜냐하면, 레닌은 농민의 혁명적 역량은 ‘소모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혁명적 에너지는 짜리즘을 완전히 일소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전화하는 데에 최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영구혁명”의 지지자들은 러시아혁명에서 농민이 지닌 중대한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고 농민의 혁명적 에너지의 힘을 과소평가했으며 농민을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능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농민을 부르조아지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주위에 결집시켜내는 작업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레닌은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의 이전을 최종적으로 성취하게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영구”혁명의 지지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수립에 즉시 착수하기를 갈망했으며,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들이 농노제의 잔존물과 같은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에 눈을 감고 있으며 러시아 농민측과 같은 중요한 세력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실패했고, 그러한 정책은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지체시킬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레닌이 연속성의 문제로 “영구”혁명의 지지자들과 싸웠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레닌은 스스로 연속혁명의 관점을 견지했지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방대한 예비군인 농민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사상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영구”혁명 사상이 하나의 새로운 사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40년대 말 맑스에 의해 그의 유명한 「공산주의 동맹에 보내는 인사말」(1850)에서 처음으로 제출되었다.

우리의 “영구론자들”은 이 문서로 부터 연속혁명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우리 “영구론자들”이 이것을 맑스로부터 가져오면서 약간 손질을 가했고 또 손질하면서 “손상시켰을”뿐 아니라 이를 실제적으로 사용하는데 부적합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레닌의 노련한 기량이 이 오류를 교정하고 연속혁명에 대한 맑스의 사상을 그 순수한 형태로 섭취하여 그의 혁명이론의 기초로 삼는데 사용되었다.


  맑스가 그의 「인사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쟁취해야 한다고 그가 상기시키는 많은 혁명적―민주주의적 요구를 일일히 열거한 후에 연속혁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조아지는 혁명을 가능한 빨리 그리고 기껏해야 위의 요구들을 달성한 채 종결짓기를 바라는 반면에, 많든 적든 모든 소유계급들이 그들의 지배적 지위에서 끌어내려질 때까지, 프롤레타리아트가 한 나라에서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유력한 나라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연합이 이들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이의 경쟁을 멈추게하고 최소한 결정적인 생산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영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지 우리의 임무이다.”(맑스 · 엥겔스, 「공산주의자 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인사말」, <선집>, 1권 FLPH, 모스크바, 1951. p.102.)


  다시 말하면 :


  ㄱ) 맑스는 ――― 우리 러시아 “영구론자들”의 계획과는 반대로 ――― 1840년대 독일혁명이 프롤레타리아권력의 직접적인 수립에 착수할 것을 결코 제안하지 않았다.


  ㄴ) 맑스는 오직, 혁명은 부르조아지의 분파를 권력의 절정으로부터 하나하나씩 차례대로 쓰러트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획득한 후 모든 나라에 혁명의 불을 지르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의 확립으로 완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또한 레닌이 가르쳤던 모든 것과 또 그가 우리의 혁명과정에서, 제국주의라는 조건하에서 그의 프롤레타리아혁명 이론을 추구하여 실행에 옮겼던 모든 것은 이 명제와 완전히 일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러시아 “영구론자들”은 러시아혁명에 있어서 농민의 역할과 프롤레타리아헤게모니 사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을 뿐 아니라 “영구”혁명에 관한 맑스의 사상을 (한층 나쁘게) 변경시켰고 이를 실제적으로 이용하는데 부적합하게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우리 “영구론자들”의 이론을 “독창적”이고 “훌륭한” 것이라 부르면서, “왜 십년 동안 내내 이 훌륭한 이론을 못본 체 하고 지나쳤는지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이 이론을 비웃었던 이유이다. (레닌의 논문은 러시아에서 “영구론자들”의 이론이 출현한 지 십년 후인 1915년에 쓰여졌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이 이론을 반(semi)멘세비키 이론이라고 간주하고 이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결연한 혁명투쟁과 정치권력의 장악을 볼셰비키로부터 빌어오고 농민의 역할에 대한 ‘거부’를 멘세비키로부터 빌어오고 있다”라고 말한 이유이다(레닌의 논문「혁명의 두가지 노선」을 보라).


  그러므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전화하는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에 관한 레닌의 견해이자, 부르조아혁명을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직접적으로” 전이(轉移)시키는데 활용한다는 레닌의 견해이다.


  계속해 보자. 이전에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선진 국가의 모든 혹은 거의 대다수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행동이 요구될 것이라는 가정위에 일국에서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이러한 관점은 더이상 사실에 부합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조건하에서 각각의 자본주의국가들이 지닌 발전의 불균등성과 발작성, 전쟁을 불가피하게하는 제국주의 내부의 파국적 모순의 격화,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혁명운동의 성장 ――― 이 모든 것이 개개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의 가능성뿐 아니라 그 필연성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의 역사는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르조아지의 타도는 어떤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이 존재할 때만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결여되어있는 곳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이라는 문제는 있을 수조차 없다는 점이 각인되어야 한다.


  레닌은 그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에서 이 조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혁명에 의해, 특히 20세기에 존재한 세 차례의 러시아혁명 전부에 의해 확증되어온 혁명의 근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 피착취 · 피억압대중들이 구래의 방식으로는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이해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서는 혁명을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착취자가 구래의 방식으로는 존속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 혁명에 있어 필수적이다. 오직, ‘하층계급들’이 구래의 방식으로 원하지 않을 때, 또 ‘상층계급들’이 구래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 오직 그때에만, 혁명은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 진리는 다른 말로 표현될 수도 있다 : (착취자와 피착취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전국적인 위기가 없다면 혁명은 불가능하다[강조는 스탈린]. 혁명을 위해서는 첫째, 노동자들의 대다수(혹은 적어도 계급의식을 가진, 분별있는,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노동자들의 다수)가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혁명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며 둘째, 지배계급이 통치상의 위기, 즉 가장 후진적인 대중들까지도 정치로 끌어들이고 … 정부를 약화시키고 혁명가들이 그것을 신속하게 전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위기에 휘말려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일국에서 부르조아권력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권력의 수립은 아직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보증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농민을 자각하게 한 후에라야만 승리한 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로소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건설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획득할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즉, 이것이 오직 일국의 힘만으로 사회주의를 공고히하고, [타국의-역자] 간섭에 반대하고 또한 필연적으로 복고에 대항하여 최종적으로 그 나라[사회주의 조국-역자]를 완전히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적어도 몇몇 나라에서 혁명의 이러한 승리가 필요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의 진전과 그에 대한 지원은 승리한 혁명이 갖는 하나의 필수적 과제이다. 그러므로 일국에서 승리를 거둔 혁명은 스스로를 자급자족하는 실체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앞당기는 지원세력으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레닌은 “모든 나라의 혁명을 진전시키고 지원하고 일깨우기 위해 일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행하는 것이 성공한 혁명의 과제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1 1918. 10~11.)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혁명 이론이 지닌 특징이다.



4. 프롤레타리아독재



  이 주제에서 나는 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겠다.


  1)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독재

  2) 부르조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로서 프롤레타리아독재

  3)프롤레타리아독재와 국가형태로서소비에트 권력


  1)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독재.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주요한 내용에 관한 문제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 그것의 운동, 그것의 범위와 성과는 오직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해서만 피와 살을 얻는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프롤테리아혁명의 도구이자 그 조직, 그 가장 중요한 대들보이며, 이는 첫째로 타도된 착취자들의 반항을 분쇄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성과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둘째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완성해내고 혁명을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라도 혁명은 부르조아를 패퇴시킬 수 있고 그 권력을 타도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 그 발전의 특정단계에서 자신의 주요한 대들보인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형태를 지는 특별한 기관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부르조아지의 저항을 분쇄할 수 없으며, 그 승리를 유지하고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까지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혁명의 근본문제는 권력의 문제이다”(레닌). 이것이 권력을 쟁취하고 장악하는 것이 요구되는 전부이다는 것을 뜻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권력의 장악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일국에서 타도당한 부르조아지는 오랫동안 이를 타도한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목표는 권력을 획득하고 강화하고 이를 정복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로 되는가?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승리한 “직후에”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직면하게 되는 적어도 세가지 주요과제를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ㄱ) 혁명으로 타도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그들의 일부에서 자본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일소하는 것


  ㄴ) 프롤레타리아트 주위에 모든 근로인민을 결집하는 방법으로 건설을 조직하고, 이러한 사업을 계급의 폐지, 소멸을 준비하는 노선을 따라 실행하는 것


  ㄷ) 국외의 적에 대한 투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해 혁명을 무장시키고 혁명군대를 조직하는 것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이러한 과제를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이 요구 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전이는 하나의 전(全)역사 시대를 대표한다. 이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착취자들은 불가피하게 복고 희망을 품어 왔고 이러한 희망은 복고의 시도로 전환된다. 타도된 착취자들 ――― 자신들의 몰락을 예기(豫期)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결코 시인하지 않았던 ――― 은 최초의 심각한 패배후에 그들 스스로 열배 성장한 힘과 백배로 증대된 광포한 열정과 증오를 갖고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기 위해, 또 달콤하고 안락한 삶을 누려왔지만 지금은 ‘하층민’(또는 ‘평범한’ 노동자…)이 되어 파멸과 빈궁으로 운명지워지고 있는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전투에 뛰어든다. 자본주의적 착취자의 행렬에 뒤이어 소부르조아의 광범한 대중들이 뒤따른다. 그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이 하루는 프롤레타리아트 뒤에서 행진하고 다음 날에는 혁명의 어려움을 불현 듯 깨닫고는 동요하고 머뭇거린다는 점, 노동자들의 첫 번째 패배나 절반의 패배 앞에서 당황하고, 겁을 집어먹고, 허둥대고, 울먹거리며, 그래서 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은 모든 나라의 수십년의 역사적 경험이 입증해주고 있다.”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타도된 후 오랫동안 자신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비해 더 강력한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에, 복고를 시도하기 위한 자신의 기반을 갖고 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착취자가 단지 한나라에서만 패배한다면, ――― 물론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드문 경우이므로 이는 전형적인 예이다 ――― 그들은 피착취자에 비해 여전히 한층 강력하게 남아있게 된다.”


타도당한 착취자들의 힘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첫째, “국제적인 자본의 힘에, 부르조아지의 국제적 연결이 갖는 힘과 그 지속성에.”(『“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1920. 4~5.)


  둘째, “혁명 이후 오랫동안 착취자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거대한 실제적 이점을 손에 쥐고 있으며, 여전히 돈을 갖고 있고(돈을 한꺼번에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간의 동산(動産) ―— 종종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 을 갖고 있고, 여전히 다양한 연고관계의 사람들, 조직기질과 관리(管理)기질, 관리의 모든 ‘비법’(관습, 방법, 수단 및 가능성)에 관한 지식, 고등교육, (부르조아처럼 생활하고 사고하는) 고급 전문인과의 밀접한 연계, 전쟁기술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경험(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등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셋째, “관습의 힘에. 소생산이 갖는 힘에.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소생산은 여전히 세계에 매우, 매우 광범하게 퍼져있으며, 소생산은 자본주의의와 부르조아지를 계속해서, 매일, 매시간마다, 자생적으로, 그리고 거대한 규모로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계급의 폐지는 지주와 자본가를 축출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 우리는 이를 비교적 쉽게 이루어내었다 —– 소생산자근절시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은 축출될 수도 분쇄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조화(調和)되어 살아야만 하고, 그들은 오직 매우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이고 신중한 조직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개조되고 재교육될 수 있다(또 되어야 한다).”(앞의 글)

  

이것이 바로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보다 강력한 적, 자신이 타도됨으로써 열배로 저항을 증대시키는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새로운 계급이 수행하는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가차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


  “프롤레타리아독재는 구 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대항한 —– 유혈과 무혈의, 격렬하고 평화적인,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교육적이고 행정적인 –— 완강한 투쟁이다.”


이러한 과제들을 단기간에 실행하고 수년내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독재, 즉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의 과도기는 “초혁명적” 행동과 법령으로 이루어지는 덧없는 시기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내전과 대외적인 투쟁, 끊임없는 조직사업과 경제적 건설, 전진과 후퇴, 승리와 패배로 가득찬 하나의 전(全)역사적인 획기적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역시사대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경제적 문화적 선행조건들을 창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첫째, 자신을 교육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능력을 지닌 세력으로 훈련되는 것, 둘째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를 보증하는 노선을 따라 소부르조아층을 재교육시키고 개조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맑스는 노동자들에게 “현존하는 조건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키고 여러분 스스로가 정치권력을 사용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15년, 20년, 50년에 걸친 내전과 국제적 분쟁을 경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퀼른 공산주의자 공판에 대한 폭로」), 1852. 12.)


맑스의 견해를 더한층 계속하여 진전시키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오랜 투쟁에서 —– 자신의 소부르조아적 편견을 일시에, 성처녀 마리아의 뜻대로 기적에 의해, 슬로건과 결의문과 법령이 명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광범한 소부르조아적 영향에 대한 오래고도 힘겨운 대중적 투쟁의 과정에서만 벗어던지는 —–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를 재교육”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백만 농민과 소소유자, 수십만에 달하는 사무직 고용인과 관리, 부르조아지식인들을 재교육시키고, 그들 모두를 프롤레타리아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하에 두며, 그들의 부르조아적 습성과 전통을 극복해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에서 필수적일 것이다.“(『”좌익“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2) 부르조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독재는 낡은 경제적 정치적 질서를 그대로 둔 채 정부관리의 단순한 교체나 “내각”의 교체 등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멘셰비키와 모든 나라의 기회주의자들은 독재를 마치 불처럼 무서워하고 깜짝 놀라서 독재라는 말을 “권력장악”이란 말로 대체하고, 대게 이 “권력장악”을 “내각”의 고체, 즉 샤이데만, 노스케, 맥도날드와 헨더슨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새 내각의 권력취득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것들과 또 이와 유사한 내각교체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즉 진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실제적인 권력의 장악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음은 설명할 필요가 거의 없다. 권력에 샤이데만들과 맥도날드들이 있고 낡은 부르조아적 질서의 온존이 허용되어 있는 한, 그자들의 소위 정부란 부르조아지에 봉사하는 기구, 제국주의의 병폐를 숨기기 위한 간막이, 피억압 · 피착취대중의 혁명투쟁에 대항하는 부르조아의 수중에 놓여진 무기 이외에 어떤 것일 수 없다. 자본이 간막이의 도움없이 대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불편하고 무익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자본은 간막이와 같은 정부를 필요로 한다. 물론 그러한 정부의 출현은 “저기[유럽-역자]에서”(즉, 자본주의진영에서) 모든 것이 “시프카 고개에서”와 같이 평온하지 않다는 징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정부는 불가피하게 외면상 자본의 정부로 남는다. 맥도널드나 샤이데만의 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으로부터 하늘과 땅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정부의 교체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국가, 중앙과 지방 모두에 새로운 권력기관을 갖는 새로운 국가이다. 그것은 낡은 국가, 부르조아지의 국가의 붕괴위에 일으켜 세워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독재는 부르조아적 질서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질서의 파괴 과정에서, 부르조아지의 타도 이후에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생산의 주요기관과 수단을 사회주의화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프롤레타리아혁명 과정에서 올려세워진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부르조이지에 대항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 혁명권력이다.


  국가는 적대계급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지배계급에 수중에 있는 기관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어떤 다른 계급의 독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국가는 부르조아지를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계급국가는 피착취자의 다수에 대해 착취하는 소수의 독재였던 반면에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착취하는 소수에 대한 피착취자의 독재라는 사실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 법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무력에 기반한 –— 지배이며, 노동하는 피착취대중들의 공감과 지지를 향유하는 지배이다(레닌, 『국가와 혁명』)


  이것으로부터 두개의 주요한 결론이 나온다.


  첫째 결론 :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완전한”민주주의, 가난한 자 뿐만 아니라 부유한 자까지의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새로운 방식의 민주주의적(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비(非)유산자에 대해[강조는 스탈린]이고 새로운 방식의 독재적인(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강조는 스탈린]국가여야 한다.”(『국가와 혁명』, 1917. 8~9.) 보편적인 평등, “순수한” 민주주의, “완전한” 민주주의와 같은 것들에 대한 카우츠키와 코의 이야기는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한 부르조아적 위장이다. “순수”민주주의 이론은 제국주의 강도들에 의해 길들어져 왔고 부양되고 있는 상층 노동계급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병폐를 은폐시키고, 피착취대중들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그것에 도덕적 힘을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났다. 만약 “자유”의 향유에 필수불가결한 토지, 인쇄기, 종이공급 등이 착취자들의 특권이 도니 것에 다른 이유가 없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피착취자들을 위한 “자유”란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 만일 자본주의 조건 하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인 정부하에서조차, 통치가 인민에 의해 수립되지 않고 로쓰차일드들과 스티네스들, 록펠러들과 모오간들에 의해 수립되는 것에 다른 어떤 이유가 없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피착취대중들은 나라를 통치하는데 실제로 참여하지 못하며 또한 참여할 수 없다.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는 자본가의 민주주의이며, 피착취자 다수의 권리제한에 기반하고 이 다수에게 주의를 돌리려는 착취하는 소수의 민주주의이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독재하에서만 피착취자를 위한 진정한 자유가 존재하며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진정한 참여가 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독재하에서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 착취하는 소수에 대한 권리제한에 기반하고 이 소수에 주의를 돌리는 피착취 다수의 민주주의이다.


  두번째 결론 :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부르조아사회와 부르조아민주주의 평화로운 발전의 결과로서 생성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부르조아 국가기관의 타도의 결과로서, 부르조아군대, 부르조아관료제, 부르조아경찰의 타도의 결과로서 생성될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서문에서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관을 단순히 장악할 수 없으며,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는 1871년 쿠겔만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과제는 “이전과 같이 관료적-군사적 기관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 이는 대륙의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을 위한 선행조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맑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의 “1872년의 독일판에 대한 서문”, FLP, Pecking 1973. p.2)


  대륙에 관한 맑스의 조건적인 구절은 모든 나라의 기회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에게 맑스가 최소한 유럽 대륙 밖에 있는 특정 국가들(영국, 미국)에서 부르조아민주주의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로의 평화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주장했다고 시끌벅적하게 떠는 구실을 주었다. 사실 맑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주장했고, 또 그는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발전의 특수한 조건 때문에 관료제와 군국주의가 아직 전혀 발달되지 못했던 1870년대의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이를 주장할 타당할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발달한 제국주의의 출현 이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즉 30~40년이 경과한 후에, 이들 국가에서의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을 때, 제국주의가 모든 자본주의국가에서 예외없이 발전하고 받아들여졌을 때, 군국주의와 관료제가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도 역시 출현하였을 때, 영국과 미국에서 평화적인 발전을 위한 특수한 조건들이 소멸하였을 때 —– 그때는 필연적으로 이들 국가에 관한 조건은 더이상 유효할 수 없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1917년에, 즉 최초의 거대한 제국주의전쟁의 시대에, 맑스에 의해 만들어진 이러한 조건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군국주의와 관료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앵글로 색슨의 —–  세계 전체에서 —– 최대이자 최후의 대표자인 영국과 미국 양측은 모든 것을 그들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발아래 굴복시키는 관료적 —– 군사적 기관의 추잡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유럽적인 혼란 상태속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오늘날,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도 역시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선행조건’은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유럽의’ 일반적인 제국주의 전형에 필적할 정도로 이들 국가에서 완성되었던) ‘진부한 국가기구’의 타도이자 파괴이다.”


  다시 말해, 폭력적인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법칙, 그러한 혁명의 선행조건으로 부르조아 국가기관을 분쇄하는 법칙은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에 있어서 혁명운동의 필연적인 법칙이다.


  물론, 먼 미래에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요한 자본주의국가에 승리를 거둔다면, 또 만약 현재의 자본주의의 포위가 사회주의의 포위로 대체된다면, 발전의 “평화적인” 길은 특정한 자본주의국가에서 확실히 가능하며, 이들 국가의 자본가들은 “불리한” 국제정세로 인해 “자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실제적으로 양보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단지 멀고 가능한 미래에만 적용된다. 가까운 미래에 관한 한, 이러한 가정을 위한 그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올바르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부르조아 국가기관의 폭력적 파괴와 그것의 새로운 것으로의 대체 없이는 불가능하다.”(『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3)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국가형태로서 소비에트권력.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승리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억압이지 부르조아 국가기관의 타도, 부르조아민주주의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로의 대체를 뜻한다.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어떠한 조직으로 이 거대한 작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부르조아의회주의의 기초위에 성장했던 프롤레타리아조직의 낡은 형태들은 이 작업을 하기에 부적합하다 —– 이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부르조아 국가기관의 무덤을 파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고, 이 기관을 타도할 수 있고, 부르조아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로 대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기초로 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조직의 새로운 형태는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조직의 이 새로운 형태가 소비에트이다.


  조직의 낡은 형태들과 비교하여 소비에트의 힘은 어디에 두어져 있는가?


  소비에트, 소비에트만이 모든 노동자들을 예외없이 포함하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포괄적인 대중조직이라는 점에.


  소비에트는 모든 피억압 · 피착위 노동자와 농민, 병사와 수병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대중조직이며, 이러한 이유때문에 대중들의 전위,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안에서 대중투쟁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을 가장 쉽게 가장 완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소비에트는 대중들의 혁명투쟁, 대중들의 정치적행동, 대중 봉기의 가장 강력한 기관 —–

금융자본의 전능과 그 정치적 부속물을 파괴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점에.


  소비에트는 대중들 자신의 직접적 조직이라는 점, 즉 그것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 작업에 대중의 참여를 최대한 촉진하고 구질서의 파괴를 위한 투쟁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질서를 위한 투쟁에서 대중들의 혁명적 에너지와 능동적 창조적 에너지를 충분히 활동시키는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따라서 가장 신뢰할 만한 대중조직이라는 점에.


  소비에트는 지방소비에트가 하나의 공동의 국가조직으로, 즉 피억압 · 피착취대중의 전위이자 하나의 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조직으로의 연하비자 정체(政體) —– 그들의 소비에트 공화국연합이다.


  소비에트권력의 본질은 정확하게 말해서 자본가와 지부에 의해 착취받는 계급들의 이러한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혁명적인 대중조직이 현재 “국가의 전(全) 권력과 전 국가기구의 영속적이고 유일한 기초”라는 사실, “심지어 수천가지의 음모와 책략에 의해 정치생활에 참여하고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를 향유하는 것을 방해받아 왔던 그 대중들이 이제는 확실히 국가의 민주적 행정에 지속적이고 더우기 결정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모든 강조는 스탈린](「공산주의 인터내셔널 1차 대회, 1919. 3. 2~6」, “2. 부르조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한 테제와 보고”).


  이것이 바로 소비에트 권력이 낡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형태 및 의회주의적 형태와 원칙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국가조직이자 노동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임무가 아니라 그들을 모든 억압과 착취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는 임무,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전환시키는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유형의 국가인 이유이다.


  레닌이 소비에트 권력의 출현으로 “부르조아민주주의적 의회주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세계 역사의 새로운 장 —–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시대 —– 를 열었다”고 말한 것은 올바르다.


  소비에트 권력의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소비에트권력은 계급이 존속하는 한 있을 수 있는 모든 국가조직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최고로 민주적인 국가조직이라는 점에. 왜냐하면 착취자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노동자와 피착취농민 사이에 연대와 제휴의 장이 존재하고 또 자신의 사업에서 스스로 이러한 연대와 제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소수에 대한 주민의 다수의 권력, 다수의 국가이며, 다수의 독재에 대한 표현이다.


  소비에트권력은 계급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국가조직 중에서 가장 국제주의적이라는 점에,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민족적 억압을 소멸시키고 여러 민족들의 근로대중들간의 제휴에 의거함으로써 소비에트는 이들 대중들의 연대를 단일한 국가연합으로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바로 그 자체의 구조를 통해서 이들 대중의 전위 —– 소비에트내의 가장 단결되고 정치적으로 가장 의식적인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피억압 · 피착취대중을 지도하는 임무를 촉진시킨다는 점에.


  레닌은 “피억압계급의 모든 혁명과 모든 운동의 경험 그리고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노동하는 피착취 주민의 흩어져있는 후진계층을 단결시키고 지도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요점은 소비에트권력의 구조가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이끌려진 교훈의 실제적 적용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소비에트권력은 입법권력과 행정권력을 단일한 국가조직으로 결합시키고 지역적 선거구를 산업 단위, 공장과 제작소로 대체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노동자와 근로대중을 국가 행정기구와 직적 연결해내고 그들에게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점에.


  소비에트권력만이 군대를 부르조아지의 지휘권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으며, 부르조아 질서 하에 있는 인민의 억압기구를 국내외 부르조아지에 지배로부터 인민의 해방을 위한 기구로 전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소비에트 국가조직만이 낡은, 즉 부르조아적인 관료기구와 사법기구를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분쇄하고 최종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는 점에.


  소비에트 국가형태만이 임금 노동자들과 피착취자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미래에 국가가 소멸된 공산주의사회의 근본요소 중의 하나인 국가의 쇠퇴를 위한 토대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


  그러므로 소비에트 공화국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해방과 사회주의 완전한 승리를 완수할 수 있는 구조(framework)중에서 오랫동안 찾고 최종적으로 발견한 정치형태이다.


  파리 코뮌은 이 형태의 맹아였으며 소비에트권력은 그것의 발전이자 최고점이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다.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자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민주주의적 기관의 한층 고도한 유형의 형태일 뿐만 아니라 … 사회주의로의 가장 고통없는 전화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강조는 스탈린]형태이다.”(「헌법제정의회의 관한 테제」, 1917. 2)



5. 농민문제



  이 주제에서 나는 네 가지 문제를 다루겠다.

  1) 문제의 제기

  2)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기의 농민

  3) 프롤레타리아혁명기의 농민

  4) 소비에트 권력수립 후의 농민


  1) 문제의 제기. 혹자는 레닌주의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농민문제이며 그것의 출발점이 농민의 문제, 즉 농민의 역할, 농민의 상대적 중요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틀렸다. 레닌주의의 기본문제, 그것의 출발점은 농민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문제이며,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성취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문제, 그것이 강화될 수 있는 조건의 관한 문제이다. 권력을 향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의 문제로써 농민문제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의문의 여지 없이 농민문제가 지니는 심각하고 지극한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맑스주의자의 대열에서 농민 문제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정확히 말해서 1차 혁명(1905) 직전에, 즉 짜리즘을 타도하는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실현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당에 대두되었을 때, 그리고 임박한 부르조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의 문제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서 농민문제는 프롤레타리아혁명기간에, 즉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문제와 그것의 성취, 유지라는 문제가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동맹군의 문제를 이끌어내었을 시기에 더욱더 긴급한 성격을 띠었다는 점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이를 떠맡을 채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가 자신의 진정한 동맹군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농민문제는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전반적인 문제의 일부분이며, 마찬가지로 이는 레닌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농민문제에 대하여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이 내보인 무관심한 태도와 심지어 때때로 무조건적 반감은 서구에서의 발전의 특수한 조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당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혁명을 두려워하고 프롤레타리아를 권력으로 이끌 의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혁명을 두려워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권력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혁명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없다 —– 그들에게서 동맹군의 문제는 관심밖의 것이며 아무런 직접적인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농민문제에 대한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의 빈정대는 태도는 그들에게서 훌륭한 교야의 징표 “진정한” 맑스주의의 징표로 간주된다. 사실상 이것에는 맑스주의란 털끝만큼도 없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혁명 전야에 농민문제와 같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거부의 이면(裏面)이지 맑스주의에 대한 노골적 배반행위의 명백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농민이 갖는 일정한 조건으로 인해 농민 내부에 숨어있는 혁명적 잠재력은 이미 소모되었는가? 그렇지 않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잠재력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하여 활용할 농민과 그들의 착취당하는 대다수를 부르조아지의 예비군 —– 서구에서 부르조아혁명기 동안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 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군으로 바꾸어낼 어떤 가망성, 어떤 근저가 있는가?


  레닌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단정적으로 대답한다. 즉, 레닌주의는 농민의 대다수층 내부에 혁명적 역량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해 안에서 이것들을 활용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러시아에서 세번의 혁명의 역사는 이 점에서 레닌주의가 지닌 결론을 완벽하게 확증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농민의 피착취대중들은 신분제와 착취에 대항하는 그들의 투쟁에서, 억압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지원받아야 한다는 실제적 결론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농민운동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운동을 직 · 간접적으로 촉진하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이익이 되며, 농민을 노동계급의 예비군이지 동맹군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돕는 농민운동 혹은 농민 투쟁에 대한 지지이다.


2)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기의 농민.  이 시기는 1차 러시아혁명(1905년)에서 제 2차 러시아혁명(1917년 2월)까지 포함하여 계속된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면은 자유주의 부르조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농민의 해방, 즉 카테츠로부터 농민의 탈당, 프롤레타리아트의 볼셰비키당으로의 방향전환이다. 이 시기의 역사는 농민에 대한 카테츠(자유주의 부르조아지)와 볼셰비키(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 투쟁의 결과는 두마시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왜냐하면 4차 두마기는 농민에게 있어서 하나의 실물교육을 제공했으며, 그들이 카테츠 수중에서는 토지 뿐만 아니라 자유조차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짜르는 전적으로 지주편을 들며 또 카테츠는 짜르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원조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도시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전쟁은 단지 두마기의 교훈이 정확했음을 증명하고 부르조아지로부터 농민의 이탈과 자유주의 부르조아지의 고립을 극점에 달하게 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수년간의 전쟁은 짜르와 그의 부르조아 동맹군으로부터 평화를 획득하려는 모든 희망의 완전한 무용성과 완전한 기만성을 드러냈었기 때문이다. 두마기의 실물 교육이 없었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동맹이 구체화되었던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짜리즘의 타도를 위한 공동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지도력) —– 1917년 2월 혁명을 이끌어냈던 헤게모니가 구체화되었던 방법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부르조아혁명은 상이한 길을 걸었다. 그 곳에서 혁명의 헤게모니는 프롤레타리아트 —– 그들의 유약함 때문에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되지 못했고 될 수도 없었다 —– 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조아지에게 속했다. 그 곳에서 농민은 숫적으로 약하고 비조직적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조아지의 손에 의해 봉건권력으로부터 그들의 해방을 획득했다. 그 곳에서 농민은 자유주의 부르조아지와 나란히 구질서에 대항하여 행진하였다. 그 곳에서 농민은 부르조아지의 예비군으로 행동했다. 이로 인해 그 곳에서 혁명은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영향력의 거대한 증대를 이끌어냈다.


  이와는 달리, 러시아에서 부르조아혁명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에서 혁명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부르조아지의 강화가 아닌 약화를,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예비군의 증가가가 아니라 주요 예비군의 손실, 즉 농민의 손실을 초래하였다. 러시아 부르조아혁명은 자유주의부르조아지가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주위에 수백만의 농민을 집결시키면서 최전방으로 나아가게 했다.


  명백히, 이는 러시아에서 부르조아혁명이 비교적 짧은 기간내에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전화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맹아이지 과도적 단계였다.


  서구 부르조아혁명의 역사에서 전례없는 러시아 혁명의 이 특수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특수서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러시아에서 부르조아혁명이 서구에서보다 계급투쟁의 보자 진전된 조건하에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당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하나의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되었는데 반해, 자유주의 부르조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기질에 겁을 집어먹고(특히 1905년의 교훈 이후에) 혁명적 기질의 모든 외관을 상실한 채 혁명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대항하여 짜르 및 지주와의 동맹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우리는 러시아 부르조아혁명의 특수성을 결정지운 다음의 상황에 유념해야만 한다.


  ㄱ) 혁명 진전에 러시아 공업의 전례없는 집중,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54%가 노동자 500인 이상의 기업체에 고용되고 있었던 반면, 미연방과 같은 고도로 발달된 국가에서 전체 노동자의 단지 33%가 노동자 500인 이상의 기업체에 고용되어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볼셰비키당과 같은 혁명당의 존재로 인하여 러시아의 노동계급을 국가의 정치생활에서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전화시켰다는 점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ㄴ) 짜르 충복들로 이루어진 참을 수 없는 경찰정부와 결부된 공장 착취의 가증스런 형태들 —– 모든 중요한 노동자파업을 당당히 정치행동으로 전화시키고 노동계급을 최후까지 혁명적인 세력으로 단련시켰던 상황.


  ㄷ) 1905년 혁명 이후 짜리즘에 대한 노예적 굴종과 노골적인 반혁명으로 전향했던 러시아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연약성 —– 러시아 부르조아지를 짜리즘의 품안에 던져 넣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기질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지배계약(government contracts)에 대한 이 부르조아지의 직접적 의존에 의해서 설명되는 사실.


  ㄹ) 시골에서 지주의 무제한적 권력과 결부된 가장 끔찍하고 참을 수 없는 농노제 —– 농민을 혁명의 품안으로 투신하게 했던 상황.


  ㅁ)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질식시키고 또 그 횡포가 자본가와 지주의 억압을 악화시켰던 짜리즘 —–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단일한 혁명의 급류로 단결시켰던 상황.


  ㅂ) 러시아 정치생활의 이 모든 모순을 심각한 혁명적 위기로 융합시키고 혁명에 거대한 추진력을 제공했던 제국주의 전쟁.


  이러한 상황하에서 농민은 누구에게로 향할 수 있었겠는가? 지주의 무제한적 권력과 짜르의 횡포, 자신을 파멸시키는 파괴적인 전쟁에 반대한 농민은 누구로부터 지원을 구할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 부르조아지로부터인가? 그러나 이는 네 차례의 두마 전체의 경험이 갖는 긴 세월이 입증했던 것과 같이 자유주의 부르조아지는 적(適)이었다. 사회혁명당(The Socialist-Revolutionaries)으로부터인가? 물론 사회혁명당은 카테츠보다는  “나았고”, 또 그들의 강령, 적어도 농업강령은 “적합”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농민에게만 의지하려고 생각하고 적이 주로 자신의 힘을 끌어내었던 도시에서 약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사회혁명당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결코 멈춰서지 않고, 짜르 및 지주와 싸우는 전선의 대열로 용감하게 나아가고, 농노 신분으로부터, 토지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 농민을 구출하기 위해 도와줄 새로운 세력은 어디에 있었는가? 러시아에서 그러한 세력이 도대체 있었는가? 그렇다.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였고, 그들은 1905년에 벌써 그들의 힘과 최후까지 투쟁하는 그들의 능력, 그들의 용감성과 혁명적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다른 세력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음, 다른 어떤 세력이란 어디에서도 찾아질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농민이 카테츠에 등을 돌리고 사회혁명당에 애착심을 갖게 됨과 동시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용감한 혁명의 지도자의 지도에 따를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던 이유이다.

  이상이 러시아 부르조아혁명의 특수성을 결정지웠던 상황이다.


3) 프롤레타리아혁명기의 농민.  이 시기는 1917년 2월 혁명부터 1917년 10월혁명까지 걸쳐있다. 이 시기는 통틀어 여덟달로 비교적 짧다. 그러나 대중들의 정치적 계몽과 혁명적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이 여덟달은 혁명의 여덟달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의 입헌적인 발달의 수십년과 동등하게 위치지울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면은 농민이 더한층 혁명사상으로 고취된 점, 사회혁명당에 대한 농민의 환멸, 사회혁명당으로부터 농민의 이탈과 또 나라를 평화로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지속적 혁명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 주위로의 직접적 결집을 향한 그들의 새로운 전환이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사회혁명당(소부르조아민주주의)과 볼셰비키(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사이에 농민을 위한, 농민의 대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다. 이 투쟁의 결과는 연립시기, 즉 케렌스키 통치키, 지주 토지를 몰수함에 대한 사회혁명과 멘셰비키에 대한 투쟁, 전선에서의 6월 공세, 군인에 대한 극형의 도입, 코르닐로프 반란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전에, 선행한 시기에는 혁명의 근본문제가 짜르와 지주 권력의 타도였던 반면, 더이상 짜르가 존재하지 않고 지루하리만치 긴 전쟁이 국가경제를 소모시키고 농민을 완전히 파산시켰던 때인 2월혁명 이후의 시기에는 전쟁 종결이라는 문제가 혁명의 주된 문제로 되었다. 무게의 중심은 순수히 국내적인 문제로부터 주된 문제 —– 전쟁으로 명백히 옮아갔다. “전쟁 종결”, “전쟁을 종결시키자” —– 이것은 전쟁 피폐국과 주로는 농민의 보편적인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것이 필요했고, 부르조아지의 권력을 타도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권력을 타도하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들, 그들만이 “승리의 최후”를 위하여 전쟁을 오래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르조아지를 타도하는 데에는 전쟁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새로운 혁명,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권력, 소비에트권력을 수립하기 위해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 볼셰비키당, 제국주의전쟁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평화를 위한 혁명투쟁의 당이 권력을 잡기위해서 제국주의 부르조아지의 최후 그룹, 그것의 극좌적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권력에서 내쫓았기 때문이다. 농민의 대다수가 평화와 소비에트권력을 위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농민을 위한 다른 어떤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방법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케렌스키 통치기는 농민의 근로대중에게 하나의 커다란 실물교육이 되었다. 왜냐하면 케렌스키 통치기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국가권력에 있는 한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농민들은 토지와 자유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한다는 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실제로 그들이 카테츠 정책과 동일한 제국주의적 저액을 추구하였던 반면, 단지 그들의 달콤한 어귀와 거짓 약속에서만 카테츠와 달랐다는 점, 국가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권력은 소비에트권력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더 오랜 유예는 단지 이러한 교훈의 진리가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며, 직접적으로 결집하게끔 유도하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고립은 명백한 사실로 되었다. 연립시기의 실물교육이 없었다면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것이 부르조아혁명의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과정을 촉진시켰던 상황이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가 구체화되었던 방법이다.


4) 소비에트 권력수립 후의 농민. 혁명의 1기에 있어서 주요한 목표는 짜리즘의 타도였고, 2월 혁명 이후에 일차적 목표는 부르조아지를 타도함으로써 제국주의전쟁을 종결짓는 것이었음에 비해, 내전의 종결과 소비에트 권력수립 후인 지금은 경제건설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었다. 국영 공업을 강화시키고 발전시켜라 ; 이를 위해 국가통제 상업을 통해 공업을 농업경제와 결부시켜라 : 공산품의 교환이 농업 생산물에 주는 지장을 줄이기 위해 잉유전유체제를 세금으로 대체하고 이후 단계적으로 낮은 세금으로 대체하라 ; 상업을 부활시키고 협동조합을 발전시켜 광범한 농민대중을 그곳으로 끌어들여라 —– 이것이 바로 레닌이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건설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윤곽지웠던 방법이다.


  이 과제는 러시아같은 농업국의 힘을 능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해진다. 어떤 회의론자는 심지어 농민은 농민이기 때문에 —– 농민은 소생산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사회주의적 생산의 기초를 조직하는데 활용될 수 없기 때문에 —– 그것은 단지 하나의 유토피아이고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그들이 최근의 사례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특정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극히 중요한 이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소비에트연방의 농민을 서구에 존재하는 농민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세번의 혁명속

에서 교육받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하에 짜르와 부르조아권력에 맞서 투쟁했던 농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손안에서 토지와 평화를 건네받았고 또 이러한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이 되었던 농민 —– 그러한 농민은 부르조아혁명기에 자유주의 부르조아지의 지도하에 투쟁했고 그 부르조아지의 수중에서 토지를 돌려받았으며 이로 인해 부르조아지의 예비군이 되었던 농민과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자신의 정치적 우호와 정치적 연대의 진가를 인정하는 법을 배웠고 이러한 우호와 연대에서 스스로 자유를 얻고 있는 소비에트 농민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경제적 협력을 위한 특별히 우수한 재료를 선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엥겔스는 “사회주의 당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은 그리 멀지 않는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이 당은 우선 도시로 가야하며 그곳에서 하나의 권력이 되어야 한다”(엥겔스,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농민문제』 1922년판을 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지난세기의 90년대에 서유럽농민을 염두에 두면서 썼다. 세번의 혁명기간 동안 이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작업을 완수한 후의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서방 동지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농촌에서의 영향력과 후원을 얻는데 이미 성공했다는 점을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회의론자들은 소농민은 사회주의 건설과 양립할 수 없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엥겔스가 서유럽의 소농민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자.


  “우리는 명확히 소농의 편에 있다. 우리는 그의 운명이 보다 견딜수 있도록 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할 것이며, 그가 협동조합으로 이전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촉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여태껏 그가 이런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었다면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얼마간 오랫동안 그가 그의 소작지에 남아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동을 하는 소농을 실질적으로 우리와 같은 부류로 간주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당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적 파산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로 구해낼 수 있는 농민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여전히 농민이지만 우리편으로 획득할 수 있는 농민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의 이행은 더한층 빠르고 쉽게 달성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모든 곳에서 극단의 결말까지 발전할 때까지, 소수공업자와 소농민이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의 희생자가 될 때까지, 이러한 이행을 기다리는 것은 쓸모없는 짓일 것이다. 농민을 위한 이러한 모적을 위해 마련되고 공공기금으로부터 지출되는 물질적 희생은 자본주의 경제의 관점에서는 단지 자금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대체로 사회의 재조직화에 드는 비용을 대략 십배정도 절약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농민에게 우리는 극히 자유롭게 관계할 여유가 있다.”


이것이 바로 엥겔스가 서유럽 농민을 염두에 두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말했던 것은 그 어떤 곳에서도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가진 나라에서처럼 쉽고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임이 명백하지 않는가? 오직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만이 “자신의 노동을 행하는 소농”을 우리편으로 확보하고,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제물”이 마련되고, 필수적인 “농민에 대한 자유”가 발휘되는 것이 즉시에, 또 가장 완전한 정도로 가능하다는 점은 명백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러한 상황이 소비에트 국가에서 경제적 건설활동을 촉진시키고 진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둘째. 러시아의 농업은 서구의 농업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곳에서 농업은 자본주의의 통상적인 길을 따라, 대지주계급과 사적 자본주의의 대소유지를 한 극으로 하고 빈궁과 결핍, 임금노예 상태를 다른 극으로 갖는 농민층 내부의 격심한 분화라는 조건아래서 자본주의의 통상적인 길을 따라 발전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그곳에서 분열과 쇠퇴는 매우 당연하다.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곳[러시아-역자]에서 농업은 소비에트권력의 존재와 생산도구 및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그러한 발전의 선구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유럽적-역자]길을 따라 발전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 농업의 발전은 다른 길을 통해, 수백만의 소농과 중농을 조직화화는 길을 통해, 농촌에서 국가에 의해 특별신용으로 지원받는 대중적 협동조합운동이 발전하는 길을 통해 진전되어야 한다. 레닌은 협동조합에 대한 그의 논문에서 우리나라 농업발전은 새로운 길을 따라, 즉 농민의 대다수를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접근시키는 길을 따라, 우선은 시장 영역에서, 다음은 농업생산물의 생산의 영역에서 농업 집산주의의 원칙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정확히 지적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농업협동조합 사업과 관련하여 시골에서 관철되는 몇가지 새로운 현상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대규모 조직이 셀즈코소유즈(Selskosoyuz)내에 농업의 특이한 부문, 즉 그 이전부터 큰 장래성을 가지고 있던 아마(亞麻), 감자, 버터 등과 같은 생산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가운데 예를 들어, 아마 중심지구가 아마 재배농의 조합이 갖는 전체 그물망을 결합시킨다. 아마 중심지는 농민들에게 종자와 도구를 제공한다. 그 다음에 중심지구 이들 농민들이 생산한 아마 전체를 사들이고 이를 대량으로 시장으로 처분하고, 이익의 몫을 농민에게 배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농민 경제를 셀즈코소유즈를 통해 국가산업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생산 조직형태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나의 의견으로는 그것은 농업의 영역에서 대규모적인 국가사회주의적 생산의 국내체계이다. 국가사회주의 생산의 국내체계라고 말함에 있어 나는 자본주의하의 국내체계, 말하자면 수공업자가 자신의 원료와 도구를 자본가로부터 건네받아서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자본가에게 넘겨줌으로써 사실상 그들 자산의 집에서 노동하는 반(半)임노동자로 되는 섬유산업에서 유추하여 그렇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농업이 발전해야 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지표들 중의 하나다. 여기서 농업의 다른 분야에 존재하는 유사한 지표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농민의 광범한 다수가 사적 자본주의의 대소유와 임금노예 상태의 길, 빈곤과 몰락의 길을 거부하고 이러한 새로운 발전의 길을 열심히 가리라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우리 농업의 발전의 길에 관해 레닌이 말한 것을 살펴보자.


“생산이 모든 대규모 수단을 장악한 국가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놓인 국가권력, 수백만의 소농 및 영세농과 국가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농민의 확실한 지도 등 —–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가 예전에 도부장사처럼 경멸했고 또 어떤 면에서 네프(NEP)하의 오늘날 당연히 경멸할 수 있는 협동조합으로부터, 협동조합만으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에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이것은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은 아직 아니지만 그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전부이다.”(「농업 경영에 관하여」, 1923. 1.)


  더 나아가, 레닌은 “주민의 조직화의 새로운 원리”이자 프롤레타리아독재하의 새로운 “사회조직”과 같은 협동조합에 금융 등의 지원을 제공할 필요성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모든 사회조직은 일정한 계급의 금융지원으로서만 나탄난다. ‘자유’ 자본주의의 탄생에 드는 수억 루블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평상시보다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해야하는 사회조직이 협동조합 조직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실제 작업에서 실현하고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원조되어야 한다. 즉, 원조라는 말을 일종의 협동조합 교역을 위한 원조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원조라는 말을 진실로 광범위한 주민대중이 실제로 참여하는 협동조합 교역에 대한 원조의 뜻으로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사실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회의론자가 틀렸다는 것.


  근로농민대중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레닌주의가 올바르다는 것.


  권력을 쥔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을 공업과 연계시키기 위해, 사회주의의 건설을 진전시키기 위해, 사회주의경제로의 이행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토대를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제공하기 위해 이러한 예비군을 활용할 수 있고 또 활용해야만 한다는 것.


 

  6. 민족문제



  이 주제에서 나는 두가지 문제를 다룰 것이다.

  1) 문제의 제기

  2) 피억압 인민의 해방운동과 프롤레타리아혁명


  1) 문제의 소개. 최근 20년 동안 민족문제는 얼마간의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제2 인터내셔널 시기의 민족문제와 레닌주의 시기의 민족문제는 동일하지 않다. 그것들은 범위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고유한 성격에 있어서 서로 매우 다르다.

  이전에는 대개 민족문제가 우선적으로 “문명화된” 민족들과 관련하여, 문제의 좁은 영역에 국한되었다. 아일랜드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세르비아인, 그리고 몇몇 다른 민족들 —– 이것이 제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불평등한 운명을 가진 인민들의 범위였다. 가장 야만적이고 비참한 형태의 민족적 억압을 당하고 있는 수억의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은 보통 그들의 시야 밖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백인과 흑인, “문명”과 “비문명”을 동렬에 두기를 주저했다. 식민지 해방이라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회피한 두 세개의 무의미하고 미온적인 결의안 —– 이것이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자랑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이제는 민족문제를 다룸에 있어 이같은 표리부동과 무성의함이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레닌주의는 이러한 심한 부조화를 폭로하였고, 백인과 흑인, 유럽인과 아시아인, 제국주의의 “문명” 노예와 “비문명” 노예 사이의 벽을 허물었으며, 그리하여 민족문제를 식민지문제와 결부시켜내었다. 레닌주의에 의해 민족문제는 특수한 국내적 문제에서 보편적인 국제적 문제로, 즉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종속국 및 식민지의 피억압 인민들의 해방이라는 세계적 문제로 전화되었다.


  이전에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대개 잘못 해석되었으며, 매우 빈번하게 민족의 자치권이라는 인식으로 협애화되었다. 심지어 제2 인터내셔널의 어떤 지도자들은 자결권을 문화적 자치권으로, 즉 피억압민족들이 정치권력 전부를 지배민족의 수중에 남겨둔 채 그들 자신의 문화제도를 갖는 권리로 변형시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자결의 사상은 합병에 투쟁하는 권리로 변형시키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자결의 사상은 합병에 투쟁하는 도구로부터 합병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될 위험에 처했다. 이제 이러한 혼동은 청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레닌주의는 민족자결이라는 개념을 종속국 및 식민지의 피억압인민의 완전한 분리(secession)의 권리로, 모든 민족이 독립된 국가를 가질 권리로 해석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자결권을 자치권으로 해석하여 합병을 정당화할 가능성을 미리 배제시켰다. 따라서 자결의 원칙 자체가 제국주의전쟁기에 명백히 사회배외주의자(soual-chauvinists)의 수중에 있었던 대중기만을 위한 도구에서 모든 제국주의적 열망과 배외주의적 책동을 폭로하는 도구로, 국제주의 정신속에서 대중의 정치교육을 위한 도구로 변형되었다.


  이전에는 피억압민족 문제가 대개 순수히 법률적인 문제로 “민족 평등권”에 관한 엄숙한 성명서와 “민족 평등”에 대한 무수한 포고문들 —– 이것이 바로 한 무리의 민족(소수)이 다른 한 무리의 민족을 착취함으로서 연명하는 제국주의하에서 “민족의 평등”이란 피억압민족을 완전히 우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리려는 제2 인터내셔널의 상투적 수법이다. 이제 민족문제에 대한 이런 부르조아-법률적 관점은 폭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주의는 민족문제를 목청높은 선언이 지닌 고상한 극치에서 견실한 지반으로 끌어내렸으며, 피억압민족의 해방투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당의 직접적 지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민족 평등”에 관한 선언은 무의미하며 거짓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리하여 피억압민족의 문제는 피억압민족을 지지하는 문제, 민족의 진정한 평등과 독립된 국가를 위해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그들에게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다하는 문제로 되었다.


  이전에는 민족문제가 자본의 권력과 제국주의의 타도 및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일반적 문제와 무관한 독립된 문제로서, 개량주의적 관점에서 고찰되었다.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식민지해방운동과의 직접적 동맹 없이도 가능하고, 민족-식민지 문제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없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대로로부터 떨어져 내밀히, “자발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가정되었다. 이제 이런 반혁명적 관점은 폭로되었다고 할 수있다. 레닌주의는 민족문제가 프롤레타리아혁명과의 연관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만 해결될 수 있으며, 서구에서 혁명승리의 길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식민지 및 종속국 해방운동과의 혁명적 동맹을 통해 뻗어있다는 것을 입증했고, 또 제국주의전쟁과 러시아 혁명은 이 점을 확증하였다. 민족문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일반적 문제 가운데 일부분이며,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의 일부분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 피억압국의 혁명적 해방운동에 잠재된 혁명적 가능성은 이미 소모되었는가? 소모되지 않았는가? 만약 아니라면,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이 가능성을 활용하고, 식민지 및 종속국을 제국주의 부르조아지의 예비군으로부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으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군으로 전환시킬 어떤 가망성, 어떤 근거가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레닌주의는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즉 피억압국의 민족해방운동 내부에 혁명적 역량의 존재와 또 이 역량을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에 활용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제국주의의 발전역학과 제국주의전쟁 그리고 러시아혁명은 이 점에서 레닌주의가 갖는 결론이 올바름을 완전히 확증하고 있다.


  따라서 “지배”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피억압 · 종속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할 —– 결연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할 —–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개개의 구체적 경우에 어디서나 항상 모든 민족운동을 지지해야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지는 제국주의를 강화시키고 보존하려는 민족운동이 아니라 그것을 약화시키고 타도하려는 민족운동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피억압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발전이 지니는 이해와 상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런 경우에, 지지는 물론 전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민족의 권리문제는 고립적인, 자족적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일반적 문제의 일부분이고 전체에 종속되며 전체의 관점에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1840년대에 맑스는 폴란드인과 헝가리인의 민족운동을 지지했던 반면 체코인과 남부 슬라브인의 민족운동에는 반대하였다. 왜? 왜냐하면 체코인과 남부 슬라브인은 당시 “반동적 인민”, 즉 유럽의 “러시아의 전초부대”, 절대주의의 전초부대였기 때문이다. 반면 폴란드인과 헝가리인은 절대주의와 투쟁하는 “혁명적 인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체코인과 남부 슬라브인의 민족운동에 대한 지지는 유럽혁명운동의 가장 위험한 적인 짜리즘에 대한 간접적 지지와 같았기 때문이다.


  레닌은 쓰고 있다 : “자결권을 포함한 민주주의의 여러 요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민주주의적(현재 : 일반사회주의적)세계운동의 작은 부분이다. 개개의 구체적 경우에서, 부분은 전체와 모순될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자결권의 개요에 관한 토의」)


  이것이 특정한 민족운동의 문제, 이들 운동중에서 있을 수 있는 반동적 성격 문제에 관한 태도이다 —– 물론 그것들이 형식적 관점, 즉 추상적 권리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혁명운동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평가되는 한에서.


  일반적으로 민족운동의 혁명적 성격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거의 대다수 민족운동이 지닌 혁명적 성격은 명백히 특정한 민족운동의 있을 수 있는 반동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고 특수적이다. 제국주의의 억압적 조건하에 존재하는 민족운동의 혁명적 성격은 운동에 프롤레타리아적 요소의 존재, 운동의 혁명적 혹은 공화주의적 강령의 존재, 운동의 민주주의적 토대의 존재를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의 국왕이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위해 수행하고 있는 투쟁은 국왕과 그의 동조자들이 지닌 군국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고 분열시키며 그 토대를 와해시키므로 객관적으로 혁명적 투쟁이다. 반면에 예를 들어 제국주의전쟁 동안 케렌스키와 레텔리, 쩨레나우델과 샤이데만, 체르노프와 단, 헨더슨과 클린스와 같은 “필사적인”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 “혁명주의자”와 공화주의자에 의해 행해진 투쟁은 그것의 결과가 제국주의의 미화와 강화, 승리로 되었기 때문에 반동적인 투쟁이다. 동일한 이유로, 이집트의 군주와 부르조아지식인들이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행하고 있는 투쟁은 이집트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 가진 부르조아출신과 부르조아신분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이 사회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혁명적 투쟁이다. 이에 비해 영국 “노동당” 정부가 이집트의 종속적 위치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벌이고 있는 투쟁은 그 정부 구성원이 프롤레타리아출신이고 프롤레타리아신분이고, 그들이 사회주의를 “위하고”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이유에서 반동적인 투쟁이다. 인도와 중국과 같은 다른 더 큰 식민지 및 종속국에서의 민족운동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해방의 길을 향한 그들의 한걸음 한걸음은 비록 그것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제국주의에 증기해머(steam-hammer)를 내리치는 것, 즉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적인 발걸음이다.


  피억압국의 민족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총결산에 의해 보여 지는 것과 같은 실제적 결과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적 규모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레닌이 말한 것은 올바랐다.


2) 피억압민족의 해방운동과 프롤레타리아혁명   민족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레닌주의는 다음과 같은 주제에서 출발한다.


  ㄱ) 세계는 두 진영으로 구분 된다 : 금융자본을 소유하고 지구상의 인구의 광범한 다수를 착취하는 한줌의 문명민족 진영과 그 다수를 이루는 식민지 및 종속국의 피억압 · 피착취 인민 진영


  ㄴ) 금융자본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식민지 및 종속국은 제국주의의 거대한 예비군이자 매우 중요한 힘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ㄷ)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종속적 식민지국가의 피억압인민의 혁명투쟁은 억압과 착취로부터 그들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ㄹ) 가장 유력한 식민지 및 종속국은 이미 민족해방운동의 길로 들어섰으며, 이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몰고 오지 않을 수 없다.


  ㅁ)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이해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이해는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동의 전선으로 혁명운동의 이 두 가지 형태를 결합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ㅂ) 발달한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승리와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피억압 인민들의 해방은 공동의 혁명전선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


  ㅅ) 공동의 혁명전선의 형성은 억압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억압인민의 해방운동을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도 타민족을 억압하는 한, 자유로울 수 없기”때문이다(엥겔스).


  ㅇ) 이러한 지지는 민족이 분리할 권리,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할 권리라는 슬로건을 확정하고 옹호하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ㅈ) 이 슬로건이 실행되지 않는 한, 세계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물질적 기초인 단일한 세계경제체제 내부의 제민족의 단결과 연대는 형성될 수 없다.


  ㅊ) 이러한 단결은 인민들 사이의 상호신뢰와 형제관계의 기초위에 발양되는 자유의지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민족문제에는 두 개의 측면, 두 개의 경향이 있다 : 제국주의의 속박에서 정치적 해방을 추구하고 독립적 민족 국가의 형성을 추구하려는 경향 —– 제국주의의 억압과 식민지적 착취의 결과로서 나타난 경향과 세계시장과 하나의 세계경제 체제가 형성된 결과로서 나타났던 것으로서 제 민족사이의 밀접한 경제적 관계를 추구하는 경향.


   레닌은 말한다 :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민족문제에 대한 두 가지 역사적 경향을 체험한다. 첫째 : 민족생활과 민족운동의 각성, 모든 민족적 억압에 대한 투쟁, 민족국가의 창출, 둘째 : 민족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상호교류의 발달과 촉진, 민족적 장벽의 파괴, 자본과 일반적인 경제적 생활, 정치, 과학 등의 국제적 통합의 형성.

  두 경향은 자본주의가 갖는 범세계적 법칙이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초기에 지배적이었으며, 두번째는 사회주의사회로의 이행을 향해 운동하고 있는 성숙한 자본주의를 특징 지운다.“(「국가문제에 관한 비판적 비평」, 1913, 11~12)

  

   제국주의에 있어 이 두 가지 경향은 화해하라 수 없는 모순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착취하고 또 그것들을 “단일한 전체”의 틀 내부에 강제적으로 보유하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제국주의는 제 민족을 합병과 식민지 정복이란 수단 —–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것 없이는 제국주의에 대해 상상할 수 없다 —– 에 의해서만 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에 있어 이들 경향은 단일한 대의 —– 제국주의 멍에로부터 피억압인민의 해방이라는 대의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단일한 세계경제체제 안에 있는 민족들의 융합은 오직 상호신뢰와 자유의지에 따른 동의를 기초로 해서만 가능하며, 민족들의 자유의자에 의한 융합을 형성하는 길은 “단일의” 제국주의적 “전체”로 부터 식민지의 분리를 통해, 식민지의 독립된 국가로의 전환을 통해서 뻗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정부와 싸우려하지 않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분리를 위한 “자신들의” 식민지 피억압인민의 투쟁을 지지하려 하지 않는 지배민족들(영국, 프랑스, 미국, 이태리, 일본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지닌 지배민족적 배외주의에 대항하여 완강하고 지속적인 단호한 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한 투쟁 없이는 진정한 국제주의 정신으로, 종속국 및 식민지 근로대중과의 한층 긴밀한 연계의 정신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실질적 준비의 정신으로 지배민족의 노동계급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구 러시아제국의 피억압민족들의 공감과 지지를 영위하지 못했다면, 러시아에서 혁명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더우기 콜챠크(Kolchak)와 데니킨(Denikin)은 분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민족의 공감과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러시아 제국주의의 족쇄를 깨부수고 이들 민족을 민족적 억압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소비에트권력을 강화하는 것도, 진정한 국제주의를 불어넣는 것도, 나아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 불리워지고 또 하나의 단일한 세계경제체제 내에서 모든 인민의 미래와 연방의 살아있는 원형인 모든 인민의 협력을 위한 바로 그 괄목할 만한 조직을 창출해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민족적 편협함에서 벗어나려하지 않고 또 자기나라에서의 해방운동과 지배국가의 프롤레타리아혁명간의 연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피억압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지닌 민족분리주의와 편협성, 무관심에 대해 투쟁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러한 투쟁 없이는 국제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이 지배민족 및 피억압민족의 근로대중이 혁명적 국제주의의 정신으로 교육되어야 하는 방법이다.


  다음은 레닌이 국제주의 정신으로 노동자를 교육함에 있어 공산주의의 이러한 이중의 임무에 관해 말한 것이다.


  “그러한 교육이…큰 억압민족에서와 작은 피억압민족에서, 합병한 민족에서와 합병된 민족에서 구체적으로 동일할 수 있는가?

  명백히 그렇지 않다. 하나의 목표 —– 완전한 평등, 가장 밀접한 관계, 그리고 모든 민족의 장래의 융합으로 —– 를 향한 길은 여기서 각각의 구체적 경우에 있어서 분명히 서로 다른 통로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마치 주어진 페이지의 중앙에 있는 한 점에 이르는 통로는 한쪽 끝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반대편 끝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것과같다. 만일 억압하고 합병하는 큰 민족에 속해있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일반적으로는 민족의 융합을 주장하면서도, ‘그의’ 니콜라이 2세, ‘그의’ 빌헬름, 조오지, 포안카레 등도 역시 소수 민족과의 (병합이라는 수단으로) 융합에 찬성한다 —– 니콜라이 2세는 갈리시아와의 ‘융합’에 찬성하고 있고, 등등 —– 는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망각한다면, 그런 사회민주주의자는 이론적으로는 어리석은 공론가이며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선동꾼일 것이다.

  억압국의 노동자들에 대한 국제주의 교육의 중점은 피억압국가의 분리의 자유를 선전하고 옹호하는 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그러한 선전을 수행하지 않는 억압민족의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를 제국주의자로, 악당으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심지어 분리의 기회가 사회주의를 도입하기 전에 천번 중 단 한번이라도 가능하고 또 ‘실행할 수’있다면 , 이것은 하나의 절대적 요구이다…

  다른 한편, 소수민족에 속해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의 선동에서 우리의 일반적 정식에 있는 두번째 말, 즉 민족의 ‘자유의지에 의한 통합’을 강조해야 한다. 그는 국제주의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위반하지 않고서도 자기 민족의 정치적 독립이나 인접국 X, Y, Z 등에 그것이 포함되는 것중의 어느 하나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소민족의 편협성과 분리주의, 무관심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하며, 전체와 일반의 승인을 위해, 특정의 이해를 보편의 이해에 종속시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문제를 철저하게 간파하지 않는 사람은 피억압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는 ‘통합의 자유’를 주장하는 반면 억압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는 ‘분리의 자유’를 주장하는데 있어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주어진 상황에서 국제주의와 민족에 융합에 도달하는 어떤 다른 길, 이 목표에 이르는 어떤 다른 길이란 없으며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자결권의 개요에 관한 토의」)   

  


7. 전략과 전술



  이 주제에서 나는 여섯 가지의 문제를 다루겠다.

  

  1)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서 지도와 과학으로서 전략과 전술

  2) 혁명의 단계와 전략

  3) 운동의 간만(干滿)과 전술

  4) 전략적 지도

  5) 전술적 지도

  6) 개량주의와 혁명주의


  1)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서 지도의 과학으로서 전략과 전술.  제2 인터내셔널이 지배하던 시기는 다소간 평화로운 발전이라는 조건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조직체들이 형성되고 단련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는 계급투쟁의 주요한 형태로서 의회주의의 시기였다. 격심한 계급투쟁의 문제, 혁명적 격돌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준비에 관한 문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문제가 그 당시에는 관심사로 여겨지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체의 형성과 단련을 위하여 합법적인 발전의 모든 수단,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위가 하나의 반대자의 지위로 머물러 있던 —– 머물러야만 했던 —– 조건에 따라, 임무는 의회주의의 활용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시대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관한 이런식의 인식하에서는 어떠한 완전한 전략이나 정교한 전술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점은 논증할 필요도 없다. 전술과 전력에 관한 단면적이고 분리된 인식이었을 뿐 말 그대로 전술이나 전력에 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2 인터내셔널의 커다란 과실(過失)은 제2 인터내셔널이 그 당시에 투쟁의 의회주의적 형태를 활용한 전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적 투쟁형태가 지니는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사실상 유일한 투쟁형태로 인식한데에 있다. 또한 공개적인 혁명적 전투가 전개 되가고 의회주의 이외의 투쟁형태의 문제가 목전에 다가왔을 때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이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등을 돌리고 이러한 임무를 떠맡기를 거부한 데에 있다.


  단지 이후의 시기, 즉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직접적인 행동의 시기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시기, 부르조아의 타도의 문제가 당면한 실천적 행동의 문제로 되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전략)를 준비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된 때, 의회주의적 전술과 의회주의 이외의 전술을 포함하여 투쟁과 조직의 모든 형태가 매우 명백하게 표현되었을 때 —– 단지 이러한 시기에 이르러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위한 하나의 완전한 전략과 정교한 전술이 완전하게 수립되었다.  그 시기는 정확히 말해서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로 인해 나타나지 못했던 맑스와 엥겔스의 전술과 전략에 관한 빛나는 사상을 레닌이 밝혀내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 특유의 전술적 명제를 복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지도부를 위한 지도원칙과 법칙의 모든 체계와 결합시키면서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고 새로운 개념과 명제로 보충하였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두 가지 전술』, 『제국주의』, 『국가와 혁명』,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좌익” 공산주의』같은 팜플렛은 확실히 맑스주의의 전반적인 보고(寶庫)와 맑스주의의 혁명적 병기고에 매우 귀중한 기여를 했다. 레닌주의의 전략과 전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계급투쟁에 있어서 지도의 과학을 구성한다.


2) 혁명의 단계와 전략.  전략이란 주어진 혁명의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타격 방향의 결정이며, 혁명세력(주요 예비군과 2차 예비군)의 배치를 위한 상응하는 계획의 작성이며, 주어진 혁명단계 동안 이 계획을 수행하는 투쟁이다.


  우리 혁명은 이미 두 단계를 통과했으며 10월혁명 이후에 제 2의 단계로 돌입했다. 우리의 전략은 혁명단계에 따라 변했다.


  1 차 단계.  1903년 2월~1917. 목표 : 짜리즘을 타도하고 중세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일소하는 것. 혁명의 주요세력 : 프롤레타리아트. 직접 예비군 : 농민. 주요 타격방향 : 농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면서 짜리즘과의 타협으로 혁명을 종결지으려 했던 자유주의적 —– 군주주의자 부르조아지의 고립화. 세력배치계획 :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의 저항을 분쇄하고 부르조아지의 동요를 마비시키기 위하여 농민대중과 동맹하여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2 차 단계.  1917년 3월~1917년 10월. 목표 : 러시아에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제국주의전쟁에서 물러나는 것. 혁명의 주요세력 : 프롤레타리아트. 직접 예비군 : 빈농, 가능한 예비군으로서 인접국의 프롤레타리아트, 유리한 요인으로서 장기적인 전쟁과 제국주의의 위기. 주요 타격방향 : 농민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면서 제국주의와의 타협으로 혁명을 종결지으려 했던 소부르조아 민주주의자(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세력 배치계획 :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동맹. “부르조아지의 저항을 힘으로 분쇄하고 농민과 소부르조아의 동요를 마비시키기 위하여 주민 내부의 반프롤레타리아트분자 대중과 동맹하여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해야 한다.”


  3 차 단계.  10월혁명 이후 목표 :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패퇴를 위한 기지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하는 것. 혁명은 일국에 국한되지 않고 확산되어 세계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혁명의 주요세력 : 일국의 프롤레타리아독재, 모든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 직접 예비군 : 발전된 국가의 반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대중, 식민지 및 종속국의 해방운동. 주요 타격방향 : 소부르조아 민주주의자의 고립화,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고립화. 세력 배치계획 : 프롤레타리아혁명과 식민지 및 종속국의 해방운동과의 동맹.

  

3) 운동의 간조 · 만조와 전술.  전술은 운동의 간조와 만조, 혁명의 고양과 쇠퇴의 비교적 짧은 시기동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노선의 결정이며, 투쟁과 조직의 낡은 형태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낡은 슬로건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이러한 형태들을 결합하여 그 노선을 수행하는 투쟁이다. 전략의 목표는 짜리즘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를테면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며 짜리즘에 대항하는 투쟁 혹은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하는 것인 반면에, 전술은 보다 덜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술의 목적은 전쟁전반에 걸친 승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전투의 어떤 특정 싸움에서의 승리이며 혁명의 고양과 퇴조의 해당 시기에 있어서 구체적인 상황에 부합하는 어떤 특정한 켐페인이나 행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전술은 전략의 한 부분이며 전략의 하위에 위치하며 전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전술은 조수의 간만에 따라 변한다. 전략적 계획은 혁명의 1차 단계(1903년~1917년 2월)동안 변하지 않았지만 전술은 그 기간동안 여러번 변했다. 1903년부터 1905년에 이르는 시기에 당은 공격전술을 추구했는데 왜냐하면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고 운동이 고양되었으며 전술이 이러한 실제 상황에 따라 수립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쟁형태는 고양된 혁명의 물결에 부합해야 했기 때문에 혁명적이었다. 지역적인 정치적 파업, 정치적 시위, 전면적인 정치파업, 두마의 보이콧트, 봉기, 혁명적 투쟁슬로건 —– 이러한 것들이 그 시기 동안 투쟁의 잇따른 형태였다. 투쟁형태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조직형태에 있어서 상응하는 변화를 동반하였다. 공장위원회, 혁명적 농민위원회, 파업위원회,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다소 공개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자당 —– 이러한 것들이 그 시기동안의 조직형태였다.


  1907년부터 1913년에 이르는 식에 당은 퇴각전술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운동의 쇠퇴, 혁명의 퇴조를 맞이하면서 전술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직형태뿐만 아니라 투쟁형태도 적절히 변하였다 : 두마의 보이콧트 대신에 두마에의 참여, 두마외부에서의 공개적인 혁명적 행동 대신에 두마내에서의 행동과 활동, 전면적인 정치파업 대신에 부분적인 경제적 파업이나 활동의 일시적인 중지. 혁명적 대중조직이 문화조직, 교육조직, 협동조합, 보험조직 그외 합법적인 조직으로 대체되었지만, 당은 물론 그 시기 동안에도 지하활동을 계속했다.


  혁명의 2차, 3차 시기에도 이상에서 전술한 것과 같은 바 그 시기동안에 전략은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지만 전술은 여러번 변하였다.


  전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형태와 조직형태 그리고 그것들의 변화와 결합을 다룬다. 혁명의 주어진 시기에 전술은 여러번 변하며 혁명의 간만, 고양 · 퇴조에 의존한다.


4) 전략적 지도.  혁명의 예비군은 다음과 가다.


직접 예비군 : 1) 농민과 일반적으로 그 국가내의 주민 내부의 중간계층, 2) 인접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 3) 식민지 및 종속국에서의 혁명운동, 4)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획득 —– 프롤레타리아트는 세력의 우세를 유지하는 반면 강력한 적을 따돌리고 유예기간을 벌기위해 일시적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일정부분을 양보할 수 있다.


간접 예비군 : 1) 프롤레타리아트가 적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예비군을 강화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그 국가내의 비프롤레타리아계급간의 모순과 투쟁 2) 프롤레타리아트가 강요된 퇴각을 하는 경우 공격이나 책략에 활용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국가에 적대적인 부르조아국가들간의 충돌, 분쟁, 전쟁(예를 들면 제국주의전쟁).


  첫째 범주의 예비군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바,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항상 분명하지만은 않은 두번째 범주의 예비군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들은 간혹 혁명의 전진에 있이서 가장 중요한 세력이라고 말해야 한다. 1차 혁명 동안과 그 이후에 소부르조아 민주주의자(사회혁명당)와 자유주의적 군주주의자 부르조아(케렌스키)간의 대립이 지니는 엄청난 중요성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며, 이러한 대립은 농민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영향력을 제거하는데 확실히 그 역할을 해내었다. 10월혁명이 일어났던 시기에 제국주의의 주요한 그룹들이 격렬한 전쟁에 몰두해 있었으며 그들 사이의 전쟁에 빠진 제국주의자들은 미숙한 소비에트권력에 대항할 그들의 세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으며 콜챠크(Kolchak)와 데니킨(Denikin)의 대패(大敗)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의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부인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제국주의그룹 간의 충돌이 더욱 더 심각해지고 그들 사이의 새로운 전쟁이 필연적인 지금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간접 예비군은 더욱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전략적 지도의 임무는 혁명발전의 주어진 단계에 혁명의 주요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이러한 모든 예비군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예비군의 적절한 활용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어떠한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음의 것들이 원칙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첫째. 결정적인 순간, 즉 혁명이 이미 성숙해 왔고, 공세가 최고조에 달하고 봉기가 임박하고 예비군을 전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성공의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때에 적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혁명의 주요세력을 집중시키는 것. 예비군을 활용하는 이러한 방식의 실례로 1917년 3월부터 10월에 이르는 시기 동안의 당의 전략을 들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 확실히 적의 가장 취약점은 전쟁이었다. 주요한 문제로서 당이 프롤레타리아전위의 주위로 광범위한 주민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 예비군을 운용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 시기 동안 당의 전략은 정견표명과 시위를 통한 가두행동으로 전위세력을 훈련시키는 한편 후방에서는 소비에트를 통하여, 전방에서는 병사위원회를 통하여 예비군을 전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혁명의 결과는 예비군이 적절하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레닌은 봉기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유명한 테제를 부연설명하면서 혁명세력을 전략적으로 운용하는 조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봉기는 결코 장난삼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일단 봉기를 시작했다면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2)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지점에 세력의 핵심을 집중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준비와 조직의 면에서 보다 유리한 적이 봉기한 세력을 분쇄해버릴 것이다.

  3) 일단 봉기를 시작했으면 최대의 결단을 갖고서 행동해야 하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반드시 공세를 취해야 한다. ‘방어는 모든 무장봉기에 있어서 곧 죽음이다’

  4) 적을 기습하도록 힘써야 하며 적의 세력이 흩어졌을 순간을 포착하도록 힘써야 한다.

  5) 작은 성공일지라도 매일 매일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며(한 도시의 경우 매 시간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기의 우세’를 유지하라.(「방관자의 충고」, 1917. 10.)

   둘째. 결정적인 공격을 위한 순간과 봉기를 개시하는 순간의 선택을 때를 잘 보아서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전위가 끝까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예비군이 전위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고 적진영이 최고로 당황하는 순간과 일치하도록 맞추는 것.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1) 우리에게 적대적인 모든 계급세력이 그들의 힘을 능가하는 투쟁에 완전히 말려들어 내분이 일어나고 충분히 약화되었다”면, “(2) 갈팡질팡하고 동요하고 불안정하고 중간적인 모든 분자들 —– 소부르조아, 부르조아지와 구별되는 소부르조아 민주주의자 —– 이 인민들앞에 완전히 폭로되고 그들의 실천상의 파산으로 완전히 망신당하고 있다”면, “(3)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서 가장 단호하고, 최고로 대담하며 혁명적인 행동이 일어나고 왕성하게 급증하기 시작했다면, 결정적인 전투가 완전히 성숙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때야말로 혁명이 성숙한 것이고, 우리가 위에서 지적한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판단했다면… 그리고 순간을 옳게 선택한다면 우리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10월 봉기가 수행되었던 방식은 이러한 전략의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면 “속도 상실”이라는 위험에 오류에 빠지게 되고 당은 운동에 뒤처지거나 지나치게 앞서가게 되고 실패의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봉기의 순간을 잘못 잡은 이러한 “속도 상실”의 실례는 소비에트 내부에 동요가 여전하고 전선에서 군대가 여전히 기로에 서 있으며 예비군이 아직 전위로 성장하지 못했던 때인 1917년 9월에 민주주의협의회(Democratic Comference)를 체포함으로써 봉기를 개시하려했던 일부 동지들의 시도에서 보여진다.


  셋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복잡함에 직면하더라도 채택된 경로를 벗어나지 않고 추구하는 것은 전위가 투쟁의 주된 목적을 놓치지 않고 대중들이 전위의 주위에 집결되어 투쟁하며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면 어부들에게 잘 알려진 “방향 상실”이라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방향 상실”의 실례로 우리는 민주주의협의회 이후 곧이어 당이 예비의회(per-parliament)에 참여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던 우리 당의 잘못된 행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비의회는 우리나라를 소비에트의 길로 부터 부르조아 의회제도의 길로 변경시키려는 기도이며, 이러한 기관에 당의 참여는 모든 것을 혼란시키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하에 혁명적 투쟁을 수행하고 있던 노동자와 농민을 혼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우리 당이 잠시 망각했다. 이러한 오류는 예비의회로부터 볼셰비키가 탈퇴함으로써 바로잡아졌다.


  넷째. 퇴각이 불가피하고 적이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전투에 응하는 것이 명백하게 불리할 때, 주어진 세력관계상 적의 타격으로부터 전위를 보호하고 전위의 예비세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일 때, 적절한 퇴각을 실행하는 것을 고려하면서 예비군을 기동(機動)시키는 것.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적 정당은 자신의 교육을 완성시켜야 한다. 그들은 공격하는 것을 배워왔다. 이제 그들은 공격에 관한 지식이 적절하게 후퇴하는 지식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한다. 공격하는 방법과 더불어 적절하게 후퇴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며, 혁명적 계급은 그 자신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그 점을 배우게 된다.”(앞의 글)


이러한 전략의 목적은 시간을 벌고 적을 분열시키고 후에 공세를 취하기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브레스트 강화조약은 이러한 전략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조약의 체결은 당으로 하여금 시간을 벌게 했고, 제국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을 이요하게 했으며 농민의 지지를 확보하게 해주었으며, 또한 콜챠크와 데니킨에 대항한 공세를 준비하기 위한 힘을 축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단독강화를 체결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가능한한 적대적인 제국주의그룹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대항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그들 상호간의 불화와 전쟁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일정한 기간 동안 사회주의혁명을 진전시키고 공고히 하기 위한 시간을 벌게 되었기 때문이다.”(「불행한 강화문제의 역사에 관하여」, 1918. 2.)


  레닌은 브레스트강화 후 3년이 지난 다음 이렇게 말했다 : “이제는 아무리 멍청한 바보일지라도 ‘브레스트강화’가 우리를 강화시키고 국제적제국주의 세력을 분쇄시킨 양보였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새로운 시대와 새롭게 변장한 낡은 오류들」, 1921. 8.)


이상이 올바른 전략적 지도를 보장하는 주요한 조건이다.


  5) 전술적 지도. 전술적 지도는 전략적 지도의 한 부분이며 전략의 임무와 요구에 종속한다. 전술적 지도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형태와 조직의 모든 형태에 정통(正統)하는 것이며 주어진 세력관계에서 전략적 성공을 준비하는데 필수적인 최대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하여 투쟁과 조직의 형태들이 올바르게 이용되도록 책임지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과 조직의 형태를 올바르게 이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떠한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음의 것들이 주요한 것들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첫째. 주어진 순간의 운동의 간만 동안 우세한 조건들에 가장 적합하고 따라서 대중들을 혁명적 견해로 이끄는 것을 조장하고 보장할 수 있으며 또한 수백만을 혁명전선으로 출정시키고 혁명전에서 그들을 배치하는 것을 조장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투쟁과 조직의 형태들을 정확하게 전면에 내세우는 것.


  문제는 전위가 낡은 권력이 존속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것을 타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 대중이 이러한 필연성을 이해하고 전위를 지지할 각오를 표명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대중은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광범위한 대중들이 낡은 권력의 전복의 불가피함을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도록 해주는 것과 그들이 혁명적 슬로건의 올바름을 경험으로부터 터득하는 것을 보다 용이하게 해줄만한 투쟁의 방법과 조직의 형태를 조장하는 것이 전술의 임무이다.


  당이 그 당시에 두마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지 않았다면,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의 경험으로 두마 무용하다는 점, 카테츠의 약속이 허위라는 점, 짜리즘과 타협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점, 농민과 노동자계급간의 동맹의 불가피성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두마내에서의 활동에 당의 힘을 집중시키고 이러한 활동의 기반위에서 투쟁을 발전시킬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전위는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을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대중들과의 연계를 상실해버렸을 것이다. 만약 대중들이 두마 시기동안 그들의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면 카테츠에 대한 폭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환주의자(Otzovist)의 전술이 지니는 위험성은 그 전술이 수백만의 예비군으로부터 전위를 유리시킬 우려가 있었다는 점이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전쟁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그들의 정체를 아직 드러내지 않았고 대중들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평화와 자유에 대하여 떠들어대는 것이 거짓임을 그들 스스로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했던 1917년 4월에 봉기를 부르짖었던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추종했었다면 당은 노동계급으로부터 분리되었을 것이고 노동자 계급은 농민과 병산들의 광범위한 대중들사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대중들이 케렌스키내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고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부르조아당과 소비에트내에서의 공개적인 투쟁이 지니는 오류를 “끈기있게 설명하는” 전술이 유일하게 올바른 전술이었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이 지니는 위험성은 그 전술이 당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지도자로부터 설 기반이 없는 소수의 보잘 것 없는 음모가들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었다는 점이다.


  레닌은 말한다 :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 혼자만으로는 쟁취될 수 없다. 전체 계급과 광범위한 대중들이 전위를 직접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거나 적어도 전위에 대하여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기 전에 전위 혼자만으로 결정적인 전투를 감행한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범죄 행위일 것이다. 전체 계급과 노동 인민의 광범위한 대중 그리고 자본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선전과 선동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의 정치적 경험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혁명의 기본적인 법칙이며 이제 러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놀랄만한 힘과 원기를 갖고서 확립되었다. 러시아의 교양없고 종종 문맹인 대중들뿐만 아니라 고도로 문화적이고 문맹이 한 사람도 없는 독일의 대중들도 단호하게 공산주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무기력과 무정견함, 부르조아지에 대한 완전한 무력함과 노예적 근성, 제2 인터내셔널의 지배하는 기사(騎士)들의 극도의 비열함,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유일한 대체물은 극도의 반동적 부르조아독재(러시아에서 코르닐로프, 독일에서 카프와 코오)뿐임을 그들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자각해야만 했다.”(『“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둘째. 어떤 주어진 순간에 여러 과정의 사슬 가운데서 그것을 파악하여 사슬전체를 움켜쥘 수 있게 해주고 전략적 성공을 준비하게 해주는 특정 고리를 찾아내는 것.


  여기서 문제는 당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임무들 중에서 특정한 당면 임무 —– 그 임무의 수행이 주요한 목표를 이루고 있고 그것의 완수가 그 외의 다른 당면한 임무의 성공적 수행을 보장해주는 특정 임무 —– 를 뽑아내는 것이다.


  이 명제가 지니는 중요성은 두 가지 실례로 설명될 수 있는 바, 하나는 오래 전의 일(당이 형성되고 있던 시기)이며 다른 하나는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일(네프시기)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써클과 조직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써클의 아마추어성과 편협한 견해가 당을 속속들이 좀먹고 있으면서 사상적 혼란이 당 내부 생활의 주요한 특징이었던 시대에, 당이 직면하고 있던 임무와 사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 임무는 전 러시아적 비합법 신문(『이스크라』)을 창간하는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왜 그런가? 그 당시의 조건하에서는 전러시아적 비합법 신문의 창간만이 수많은 써클과 조직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킬 수 있는 당의 견고한 핵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사상적 조직적 통일을 위한 조건을 준비하고 진정한 당을 형성하기 위한 기초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부터 경제건설로 이행하는 시기, 즉 공업은 붕괴상태에 처해있고 농업은 도시의 공업제품의 부족으로 고통 받고 국유공업과 농업경제의 결합이 성공적인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임무중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로 된 시기, 이러한 시기에 있어 여러 임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는 상업(trade)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왜 그러한가? 네프라는 조건하에서 공업과 농업경제의 결합은 상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확립될 수 없으며 판매가 없는 생산은 공업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며, 공업은 상업발전의 결과물로서 판매의 확장에 의해서만 팽창될 수 있으며, 상업분야에서 우리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상업의 통제를 확보한 이후 즉 이  고리를 확보한 이후에만이 사회주의경제의 기반을 건설하기 위한 조건의 창출을 위해 공업과 농업시장을 결합시키고 여타의 당면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혁명가, 사회주의의 지도자 혹은 공산주의자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사슬 전체를 장악하고 다음 고리로의 이행을 견고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움켜쥐어야 하는 사슬의 특정 고리를 매 순간마다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이 고리는 적절한 국가 통제(지도)하에서 국내의 상업을 활발하게 하는 것이다. 상업 —– 이것이 바로 1921년부터 1922년 사이의 사회주의건설의 과도기적 형태에서 ‘전력을 다하여 우리가 움켜쥐어야 하는’ 역사적 사건의 사슬 내부의 ‘고리’이다”(「귀중한 현재의 중요성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이후」, 1921. 1. 11)


  이상이 올바른 전술적 지도를 보장하는 주요한 조건들이다.


  6) 개량주의와 혁명주의. 혁명적 전술과 개량주의적 전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레닌주의는 개량에 반대하고 일반적으로 타협과 협정에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이는 전적으로 틀렸다. 볼셰비키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소한 것도 도움이 된다”는 점과 어떤 조건하에서는 일반적으로 개량과 타협 그리고 특히 협정을 필요한 것이고 유용하다는 점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다.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 “국제부르조아지를 타도하는 전쟁, 즉 국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전쟁들 중에 가장 완전한 전쟁보다 백배 이상으로 어렵고 장구하고 복잡한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책략을 쓰고 (비록 일시적이라 해도) 적들 내부의 이해 충돌을 이용하는 것을 미리 거부하는 것 그리고 (비록 일시적이고 불안정하고 망설여지고 조건적이라 해도)가능한 동맹자들과의 협정이나 타협을 거절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극도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탐험되지 않고 아직 접근하기 어려운 산으로 힘든 등산을 함에 있어서 지그재그로 움직여 보고 가던 길을 되돌아 가보며 한번 선택한 코스를 버리고 다른 코스를 잡아보는 것을 미리 거부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그러므로 확실히 문제는 개량이나 타협 그리고 협정이 아니라 개량이나 타협을 이용하는 목적에 있다.


  개량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활동은 어떤 부수적인 것 말하자면 단순히 눈가림을 위한 것이지만 개량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조아지의 지배 하에서 개량주의자들의 전술에 의한 개량이 필연적으로 부르조아지의 지배를 강화시키고 혁명을 붕괴시키는 도구로 바뀌어 버리는 이유이다.


  반대로 혁명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혁명적 활동이지 개량이 아니다. 혁명주의자에게 있어서 개량은 혁명의 부산물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조아지가 지배하는 조건하에서 혁명주의적 전술에 의한 개량이 부르조아지 지배를 붕괴시키고 혁명을 강화시키는 도구, 혁명운동을 더한층 발전시키는 거점이 되는 이유이다.


  혁명주의자들은 합법작업과 비합법작업을 결합시키는데 있어서 하나의 원조물, 즉 부르조아지를 타도하기 위해 대중들을 혁명적으로 준비시키는 비합법활동의 엄호물로 활용하기 위하여 개량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 하에서 개량과 협정을 혁명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의 본질이다.


  반대로 개량주의자들은 모든 비합법활동을 포기하기 위하여 “묵인된” 개량의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며 대중들을 혁명적으로 준비시키는 비합법 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개량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개량주의적 전술의 본질이다.


  이상이 제국주의 하에서 개량과 협정에 관한 태도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타도 이후, 즉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에서는 상황이 어느 정도 변한다. 특정한 조건이나 상황하에서 프롤레타리아권력은 일시적으로 기존 질서를 혁명적으로 재건하는 길을 채택하지 않고 레닌이 그의 잘 알려진 「귀중한 현재의 중요성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이후」라는 논문에서 비프롤레타리아계급을 붕괴시키고 혁명에 일시적인 휴식을 주며 새로운 공세를 위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새로운 공세를 위하여 준비하기 위하여 우회하는 길, 개량의 길, 비프롤레타리아계급에로 양보하는 길로 명명한 것처럼 점진적인 이행, 말하자면 “개량적 길”을 취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하나의 “개량주의적 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개량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는 바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강화시키며 프롤레타리아권력에 필요한 휴식을 조달해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개량의 목적은 혁명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프롤레타리아계급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개량은 그것의 반대물로 전화된다.


  지난 시기에 혁명은 진전이 충분했고 공세 전술을 취하기 위하여 일시적인 후퇴전술 즉 우회하여 가는 전술을 대용(代用)할 만큼 충분히 폭넓은 확장이 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권력이 이러한 정책을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부르조아지가 지배하던 이전 시기에는 개량이 혁명의 부산물이었던 반면,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의 지금에 이르러 개량출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획득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축적된 비축물이여 이러한 획득을 이루고 있다.


  레닌은 말한다 : “오직 맑스주의만이 개량과 혁명의 관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정의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관계를 하나의 측면에서만 즉 일국에서라도 어느 정도 영속적이고 지속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의 승리가 있기 전에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올바른 관계는 다음과 같았다 : 개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계급투쟁의 부산물이다… 일국에서라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이후에는 개량과 혁명의 관계에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개재된다. 원칙적으로는 이전과 동일하지만 형태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났으며 맑스 자신은 예견할 수 없었지만 그 변화는 맑스주의의 철학과 정치학의 기반위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 승리한 이후에 (국제적인 자(尺)로 본다면 여전히 하나의 ”부산물“로 남지만) 그것들(개량-스탈린)은 더우기 승리를 거둔 나라를 위한 것이며 최대한의 노력을 다한 후에 이런 저런 변화의 혁명적 달성을 위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 필요로 되는 정당한 휴식이다. 승리는 심지어 하나의 강요된 퇴각에서 계속 지탱하는 것, 물질적 도덕적으로 계속 지탱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힘의 비축을 만들어 낸다.“

(「귀중한 현재의 중요성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이후」.)



  8. 당



  혁명 이전 시기, 다소간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 즉 제2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당이 노동계급 운동내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점하고 의회주의 투쟁형태가 주요한 투쟁형태로 간주되었던 시기 —– 이러한 조건하에서 당은 이후의 공공연한 혁명적 충동이라는 조건하에서 획득했던 그토록 위대하고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질 수도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한 비난에 반대하면서 제2 인터내셔널을 옹호하기 위하여, 카우츠키는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은 평화의 도구이지 전쟁의 도구가 아니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던 시기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행동의 시기에 어떤 중요한 걸음을 내딛기에는 무력했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상 맞는 말이다. 이는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에는 걸맞지 않으며, 그 당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적 정당이 아니며,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이끌지도 못하며, 단지 의회선거와 의회투쟁에 적합한 선거조직일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는 실제로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우세하던 때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정치조직이 당이 아니라 의회그룹이었던 점을 설명해준다. 그 당시의 당이 사실상 의회그룹의 하나의 부하이며 부속물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권을 쥔 당내의 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준비란 잇을 수 없었다는 점은 거의 논증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면서 문제는 근본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시대는 공공연한 계급충돌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행동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시기, 즉 혁명적 세력이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장악을 위하여 분발한 시기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새로운 임무 —– 새로운 혁명적 노선에 입각하여 당의 모든 작업을 재조직하는 임무, 노동자들을 권력장악을 위한 혁명적 투쟁의 정신으로 교육시키는 임무, 예비군을 준비하고 이동시키는 임무, 이웃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을 건설하는 임무, 식민지 및 종속국의 해방운동과 확고한 연계를 확립하는 임무 등등 —– 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새로운 임무들이 낡은 사회민주주의 당에 의해 실행될 수 있고 또한 그 당들이 의회주이ㅡ라는 평화스러운 조건하에 처해 있었을 때 이러한 새로운 임무들이 제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망적인 자포자기와 필연적인 패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낡은 당의 지도권 하에서 이러한 임무들을 짊어진채 남게 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완전히 무장해제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상태를 용인할 수 없었다는 점은 논증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전투적인 당. 혁명적인 당, 권력장악을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할만큼 대담하고 혁명적 상황의 복잡한 조건 가운데서 진로를 찾아낼만큼 충분히 숙련되어 있으며 목적지에 이르는 길에 잠복하고 있는 모든 암초를 피해서 갈만큼 유연한 당이 요구된다.


  이러한 당이 없다면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이룩한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러한 새로운 당은 레닌주의 당이다.


  이러한 새로운 당의 명확한 특성은 무엇인가?


  1) 노동계급의 선진부대로서 당. 당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계급의 선진적 부대이어야 한다. 당은 노동계급의 최량의 분자들, 그들의 경험, 그들의 혁명적 기질,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대한 그들의 헌신적인 애착을 흡수해야 한다. 그러나 당이 진정으로 선진적인 부대이기 위해서는 혁명적 이론과 운동의 법칙에 관한 지식 및 혁명의 법칙에 관한 지식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이것이 없다면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지휘통솔 할 수 없다. 당이 노동계급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 자신을 제한하고, 자연성장적인 운동의 꼬리에 끌려다니며, 자연성장적인 운동이 지니는 정치적 무관심과 타성을 극복하지 못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시적인 이해를 초월할 수 없고, 대중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인 이익을 이해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당이 아니다. 당은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야 하며, 노동계급 보다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하며, 자연성장적인 운동의 꼬리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지휘통솔해야 한다. “추수주의”(khvostism)를 설교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조아지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운명지우는 부르조아 정책의 전달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부대라는 견지를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익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당만이, 오직 이러한 당만이 노동계급을 노동조합주의의 좁은 길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당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도자이다.


  나는 앞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의 어려움, 투쟁의 복잡한 조건들, 전략과 전술, 예비군과 책략 그리고 공격과 후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전쟁이라는 조건과 다를 바 없이 복잡하며, 전쟁이라는 조건 이상으로 나을게 없다. 이러한 조건들을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올바른 지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떠한 군대라도 전쟁에서 패배의 운명에 처하고 싶지 않으면 노련한 참모부를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나 자신들의 불구대천의 적들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러한 참모부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나 어디에 이러한 참모부가 있는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당만이 이러한 참모부로서 복무할 수 있다. 혁명적 당이 없는 노동계급은 참모부 없는 군대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참모부다.


 그런데 당은 단지 하나의 선진부대일 수 만은 없다. 당은 당시에 계급의 일 분견대, 계급의 한 부분이어야 하며, 그 존재의 모든 뿌리가 계급과 밀접하게 묶여져야 한다. 선진부대와 노동계급의 나머지 부분과의 차이, 당원과 당원이 아닌 인민들과의 차이는 계급이 소멸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차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이 다른 계급으로 보충되는 한, 전체 노동계급이 선진부대의 수준에 오론 처지가 아닌 한 존속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넓어지고 또한 당이 비당원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어 분리된다면, 당은 하나의 당이기를 멈출것이다.   비당원 대중들과 연결되지 않고, 당과 비당원 대중들 간에 유대가 존재하지 않고, 이 대중들이 당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중들 사이에서 도덕적 · 정치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당은 계급을 지도할 수 없다.


  최근에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200,000명이 우리 당의 새로운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단지 그들 스스로 당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당원으로 입당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비당원 대중들의 모든 나머지 부분에 의해 당으로 보내어졌으며 그들의 찬성이 없었다면 어떠한 새로운 당원으로 입당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비당원 대중들의 모든 나머지 부분에 의해 당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당원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대중들이 우리 당을 그들의 당, 그들에게 가깝고 친근한 당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의 확대와 강화에 참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그들의 운명을 당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을 비당원들과 연결하는 이러한 무형의 줄이 없다면 당은 그 계급의 결정적인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당은 노동계급의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

 

  레닌은 말한다 : “우리는 계급의 당이다. 따라서 거의 전 계급이(전쟁기나 내전기에) 우리 당의 지도하에 행동해야 하며, 우리 당에 가능한 밀접하게 밀착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한시라도 거의 전 계급 혹은 계급 전체가 그 계급의 선진부대 즉 사회민주주의당의 의식성과 활동력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닐로프주의(Maniolvism)이며 ‘추수주의’이다. 지각있는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 하에서 심지어 (보다 원시적이며 미발달한 계층에게 더욱 받아들여지기 쉬운) 노동조합조직들도 거의 전 노동계급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혹은 전노동계급의 선진부대와 그것에 의해 이끌리어지는 전체 대중과의 차이를 망각하는 것, 광범위한 계층을 이러한 선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할 선진부대의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 단지 자신을 기만하고 우리 임무가 지니는 중대함에 눈을 감고 이러한 임무를 제한하는 것을 뜻한다.”(『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1904. 2~5.)


2) 노동계급의 조직화된 부대로서 당.  당은 단지 노동계급의 선진부대만은 아니다. 진정으로 계급투쟁을 지도하길 원한다면 당은 동시에 그 계급의 조직화된 부대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당의 임무는 막대하고 대단히 복잡하다. 당은 국내외적인 새로운 사태의 극히 어려운 조건 하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지도해야 하는데, 정세가 공격을 요구할 때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세로 지휘해야 하고 정세가 퇴각을 요구할 때는 강력한 적의 타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벗어나게 지휘해야 하며, 수백만의 미조직된 비당원 노동자들에게 투쟁에 있어서의 규율성과 체계성 및 조직성과 내구성을 심어주어야 한다. 당은 그 자체가 규율과 조직의 화신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된 부대라면, 당은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면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한 대중들을 지도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2)


  당은 노동계급의 조직화된 부대이다.


  조직화된 전체로서의 당에 대한 개념은 우리 당의 규약 첫째 단락에 있는 레닌의 유명한 공식화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거기에서 당은 조직의 총화로 간주되고 있으며 당원은 당 조직들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한 사람이다고 되어있다. 1903년에 이미 이 공식화에 반대했던 멘셰비키는 이 공식화를, 당에 자진하여 입당할 수 있으며 “교수”나 “고등학교 학생” 및 한가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당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당조직들 중의 어느 하나에 가입하지 않거나 가입하지기를 원하지 않는 “지지자”나 “동조자자”에게도 당원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이런 기묘한 “제도”가 우리 당에 기반을 굳혔더라면, 그 “제도”는 필연적으로 우리 당을 교수들과 고등학교 학생들로 넘치게 하고, 당은 하나의 느슨하고 무정형적이며 지리멸렬한 “대형(隊形)”으로 타락하였을 것이며, “동조자들”의 파도속에서 파괴되었을 것이며, 당과 계급 사이의 경계선을 지워버렸을 것이며, 미조직 대중들을 선진부대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당의 임무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라는 점은 논증할 필요가 거의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기회주의자이의 “제도”하에 있었더라면 우리 당이 우리 혁명의 진전과정에서 노동계급의 핵(核)을 조직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레닌은 말한다 : “마르토프동지의 견해로는 당의 경계선이 매우 불명확한데, 왜냐하면 ‘모든 동조자’가 ‘자신을 당원으로 주장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무슨 용도로 쓰일 것인가? “자격”의 방만한 확대. 그것의 해악은 해당(解黨)의식과 당과 계급을 혼동하는 것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런데, 당은 단순히 당 조직들의 총화만은 아니다. 당은 동시에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고 모든 당원들에게 구속력을 지니는 실천적 결정을 하는, 이러한 조직들의 하나의 유일한 체계이며 그것들의 형식적인 결합이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된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당은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지도력을 발동할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전체일 수가 없다.


  레닌은 말한다 : “이전에는 우리 당은 하나의 공식성을 지니는 조직화된 전체가 아니라 단지 분산된 그룹들의 합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관계 이외의 그룹들 사이의 다른 어떤 관계도 가능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조직화된 당이 되었으며 이는 권위의 확립과 사상의 힘이 권위가 지니는 힘으로 전화되었고 당의 하급기관이 상급기관에 복종한다는 것을 뜻한다.”(앞의 글)


  다수가 소수에 복종하고 중앙이 당 활동을 지도한다는 원칙은 “관료주의”와 “형식주의”등을 배격하고 동요분자들에 대한 공격을 드물지 않게 발생시킨다.3) 이러한 원칙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전체로서의 당에 의한 체계적 작업과 노동계급투쟁의 지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거의 논증할 필요도 없다. 조직무제에 있어서 레닌주의는 이러한 원칙을 확고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원칙에 반대하는 투쟁을 어리석고 비판할 가치도 없는 “러시아적 허무주의”, “귀족적 무정부주의”라 부른다.


  이러한 동요분자들에 대하여 레닌이 그의 책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귀족적 무정부주의는 러시아적 허무주의의 특수한 성격이다. 그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복종과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농노제’로 간주한다. …중앙에 의한 노동분업을 두고 그는 인민들이 ‘수레바퀴나 톱니바퀴의 한 날’로 밖에 되지 못한다고 희비극적인 비명을 지르며 분개하고 있다 … 당의 조직규약에 대하여 언급하면,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상을 지으며 규약없이도 서로 아주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으로는, 악명높은 관료주의에 관하여 성토하는 것은 중앙조직체의 인적 구성에 대한 불만의 반영, 즉 하나의 무화과 나무잎에 불과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 당신은 한 명의 관료인 바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 대회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 … 당신은 한 명의 형식주의자인 바 왜냐하면 당신은 대회의 형식성을 갖춘 결정을 신뢰하지 나의 동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엄청나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바 왜냐하면 당신은 당 대회에서 ‘기계적인’ 다수를 변론하고 호선(互選)에 대한 나의 요청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한 명의 독재자인 바 왜냐하면 당신은 권력을 낡은 패거리들[2차 대회의 결의에 복종하지 않으려 하고 레닌을 “관료주의자”라고 비난했던 악셀로드, 마르토프, 포트레소프-스탈린]에 넘겨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레닌,<전집>, 6권 pp.310, 287를 보라.)



  3)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조직의 최고 형태로서 당, 당은 노동계급의 조직화된 부대이다. 그러나 당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조직인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또한 많은 다른 조직들을 가지는데 그 조직들이 없이는 자본에 대항한 성공적인 투쟁을 벌일 수 없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공장조직, 의회그룹, 비당원 여성협회, 출판 ‧ 문화 ‧ 교육 조직, 청년동맹, 혁명적 투쟁조직(공공연한 혁명적 행동에 대비하여), 국가조직의 형태로서 대표자들의 소비에트(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등. 이러한 조직들 중의 대부분이 당외조직이며, 그것들 중의 단지 몇몇 조직이 이 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거나 당의 분지(分枝)를 구성한다. 이러한 모든 조직들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노동계급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조직들이 없다면 당은 계급투쟁의 여러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부르조아적 질서를 사회주의적 질서로 대체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단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많은 조직들에게 단일한 지도가 행해질 수 있는가? 이러한 많은 조직들이 지도상의 이탈을 낳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무엇인가? 이들 각각의 조직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정분야에서 자신의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에 서로 방해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조직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활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조직들은 하나의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물음이 제기된다. 이러한 모든 조직들의 행동 노선, 일반적 방침은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지도의 통일성을 획득하고 연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로 되는 경험을 지니고서 이러한 총노선을 도출해 낼 수 있으며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서 이러한 조직들이 그 노선을 수행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중앙조직은 어디에 있는가?


  그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다.


  무엇보다 먼저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외조직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상시적으로 그 조직들을 지도하는 노동계급내의 최량의 분자들의 소집중앙이기 때문에, 두 번째로 노동계급내의 최량의 분자들의 소집중앙으로서 당은 그 계급내의 모든 형태의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노동계급 지도자들의 훈련을 위한 최고의 학교이기 때문에, 세 번째로 노동계급 지도자들의 훈련을 위한 최고 학교로서 당은 자신의 경험과 권한을 가지고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지도를 중앙화시킬 수 있고 노동계급 내의 각각의 모든 당외조직들을 하나의 지원기관이나 당과 계급을 연결하는 매개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기 때문에, 당은 이를 위해 요구되는 모든 권한을 가진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조직의 최고형태이다.


  물론 이 말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등의 당외조직들이 공식적으로 당의 지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러한 조직들에 소속되어 있으며 확실하게 그 조직들에 영향을 미치는 당원들이, 이러한 당외조직들이 그들의 활동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 근접하도록 이끌고 자발적으로 당의 지도를 수락하도록 설득, 권유할 수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정치적 지도력을 다른 모든 형태의 프롤레타리아조직에게 확장시켜야만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연합의 최고형태”가 당이라고 말한 이유이다.(『“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이것이 바로 당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소속의원, 저널리스트, 속물이 되어 버린 협소한 노동조합 관리나 협동조합 임원을 양산해내는 당외 조직들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기회주의적 이론이 레닌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상반되는 이유이다.


  4)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도구로서 당.  당은 프롤레타리아조직의 최고 형태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과 그 계급의 조직들 가운데 주요한 지도세력이다. 그러나 이 말이, 당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표나 자족적인 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연합의 최고 형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독재가 아직 달성되지 않았을 경우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며 독재가 이미 달성되었을 경우 독재를 공고히하고 확대시키기 위한 도구이다. 만약 당 이외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다른 조직들이 권력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고, 제국주의라는 조건 및 전쟁의 불가피성 그리고 위기의 존재가 부르조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모든 세력을 한 점으로 집중시키고 혁명운동의 모든 실오라기를 한 지점으로 모이게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당은 그렇게 중요한 의미로 부상할 수 없었을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다른 모든 조직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확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성공적인 권력장악을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자신의 참모부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당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조직을 자신의 주위로 불러 모으고 투쟁이 전진하는 동안 전체 운동의 지도력을 중앙화할 수 있는 당이 없었다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적 독재를 수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논증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재를 수립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독재를 유지하고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독재를 공고히 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도 당을 더한층 필요로 한다.


  레닌은 말한다 : “확실히, 거의 모든 사람이 이제 다음의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즉 우리 당내에 가장 엄격하고 철같은 규율이 없었다면, 노동계급의 전체 대중 즉 후진 계층을 지도하거나 납득시킬 수 있는 사려깊고 정직하고 자기희생적이며 유력한 모든 분자들이 당을 가장 충실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면, 볼셰비키는 2년 반이 아니라 두달 반도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앞의 글)


  그런데, 독재를 “유지하고 확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말은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조직성과 규율성을 불어넣는 것, 프롤레타리아대중들 사이에 소부르조아 분자들의 좀같은 영향력과 소부르조아적 습성들에 대항하는 굳은 힘과 방파제를 만드는 것, 소부르조아층을 재교육시키고 개조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 활동을 늘리는 것, 프롤레타리아대중들이 계급을 폐지시키고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화하는 조건을 준비할 수 있는 세력으로 그들 스스로를 교육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공동일치나 규율을 지닌 강력한 당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닌은 말한다 :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낡은 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대항하는 유혈 ‧ 무혈의 폭력적이고 평화적인,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교육적이고 행정적인, 하나의 완강한 투쟁이다. 수백 수천만의 습성(習性)이 지닌 힘은 심히 가공할만한 힘이다. 투쟁으로 단련된 철의 당이 없다면, 대중들의 분위기를 주시하고 그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당이 없다면, 이러한 투쟁을 성공적으로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앞의 글)


  프롤레타리아트는 도재를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당을 필요로 한다. 당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나 이 말 다음에, 계급이 소멸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사라지만 당도 역시 사라질것이다는 말이 이어진다.


  5) 의지의 통일체, 분파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통일체의 화신으로서의 당.  공동일치와 철의 규율을 지닌 강력한 당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달성과 유지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의지의 통일이 없다면, 모든 당원들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행동의 통일이 없다면, 당내에서 철의 규율은 불가능하다. 이는 물론 당내에서 의견대립의 가능성이 행동통일이라는 것에 의해 거세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철의 규율은 비판주의와 당내에서 의견대립을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이, 규율은 “맹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반대로, 철의 규율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을 거세하는 거시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의식적인 규율만이 철의 규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대립이 좁혀지고 난 후, 비판이 남김없이 행해지고 하나의 결정이 내려지고 난 후에는, 모든 당원들의 의지와 행동의 통일은 —– 그것이 없이는 당적 통일이나 당내 철의 규율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 필수적인 조건이다.


  레닌은 말한다 : “현재의 격심한 내전시대에 있어서 공산주의당은 가장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야만, 거의 군사적 규율에 가까운 철의 규율이 당내에 널리 보급되어야만, 당 중앙이 구속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고 당원들 전체의 신뢰를 누리는 강력하고 권위적인 기관이어야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입회 조건」, 1920. 7.)


  이것이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완수에 선행했던 투쟁의 시기에당내에서의 규약에 관한 견해였다.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완수된 이후의 당내에서의 규약에 관해서도 거의 대부분 동일하다고 말해야 한다.

 

  레닌은 말한다 : “(특히 프롤레타리아독재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철의 규율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실제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하는 부르조아지를 돕는 셈이다.”(『“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혼란』)


그렇지만 분파의 존재는 당의 통일이나 당의 철의 규율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다음에 계속된다. 분파가 있다면 여러 개의 중앙이 있게 되는 셈이고, 여러 개의 중앙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내의 하나의 공통된 중앙이 없으며 의지의 통일이 깨어지고 규율이 약화되고 허물어 졌으며, 독재가 약화되고 붕괴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지도할 의사가 전혀없는 제2 인터내셔널의 당들은 분파의 자유라는 자유주의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철의 규율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완수하고 공고히 하는 임무를 조건으로 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당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분파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다.


  당은 모든 분파주의와 당내의 권위의 분산을 거세하는 의지의 통일을 대표한다.


  그래서 “당적 통일의 관점과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의지의 통일이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성공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가져온다는 견지에서 분파주의의 위험”에 대한 레닌의 경고가 우리 당의 10차 대회의 특별결의문 「당적 통일에 관하여」에 구체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레닌은 “모든 분파의 완전한 근절”, “다양한 강령을 가지고서 형성되어진 모든 그룹의 예외없는 즉각적인 해산”,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당에서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으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6) 당은 기회주의적 분자들을 숙청함으로써 강력해진다.  당내 분파주의의 원천은 기회주의적 분자들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립된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프롤레타리아트화한 농민과 소부르조아지 및 지식인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다시 채워진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상층, 주로 부르조아지가 식민지로부터 뽑아낸 초과이윤에 의해 부양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국회의원들은 부패되고 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생활방식에서, 수입의 규모에서, 전체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속물이 되어버린 부르조아화된 이러한 노동자층 혹은 ‘노동귀족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지주(枝柱)이며 오늘날 부르조아지의 주요한 (군사적이 아니라) 사회적 지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 운동에서 부르조아지의 실질적인 대리인이며 자본가계급의 노동자담당 부관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제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의 불독판에 부치는 서문”, 1920. 7.)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들 모든 소부르조아그룹들은 당내에 침투하여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풍조와 문란하고 모호한 기질을 유입시킨다. 분열성과 기회주의의 원천이 되고, 당을 내부로부터 해체시키고 붕괴시키는 주인(主因)은 대게 이들 소부르조아그룹들이다. 이러한 “동맹군”을 후방에 두고서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은 전후방으로부터 두개의 포화 사이에 사로잡히도록 스스로를 내버려 두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자들에 대항한 무자비한 투쟁과 당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투쟁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당내 사상투쟁으로 기회주의적 분자들을 “패배시킨다”는 논리, 하나의 유일당이라는 경계내에서 이들 분자들을 “극복한다”는 논리는 당을 활동불능과 상시적인 허약상태로 내몰고, 당을 기회주의의 먹이로 되도록 하며,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적 당이 없는 상태로 만들며,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주요한 무기를 박탈하게 할 우려가 있는 취약하고 위험스러운 논리이다. 우리 당의 대열내에 마르토프(Martov), 단(Dan), 포트레소프(Potresov), 악셀로드(Axelord)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우리 당은 광대한 탄탄대로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며,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조직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당은 내적 통일과 비할데 없는 단결을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제때에 기회주의적 오염을 깨끗히 청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당내의 청산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의 대열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당은 기회주의자, 개량주의자, 사회-제국주의자, 사회-배외주의자, 사회-평화론자들을 일소함으로ㅆ 발전하고 강고하게 된다.


  당은 그 스스로 기회주의적 분자들을 추방함으로써 강고하게 된다.


  레닌은 말한다. : “우리의 대열 내부에 개량주의자들, 멘셰비키들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승리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원칙적으로 자명하며 러시아와 헝가리 양국의 경험에 의해 두드러지게 확증되었다 … 러시아에서는 어려운 상황이 여러번 발생하였는데, 만일 멘셰비키와 개량주의자들 그리고 소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이 우리 당내에 남아 있었다면 소비에트권력은 거의 틀림없이 타도되었을 것이다… 이태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국가권력의 획득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가 임박해 있다. 이러한 때에 당으로부터 멘셰비키들, 개량주의자들, 투라티스트들(Turatists)을 제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동요하기 쉽고 개량주의자들과의 ‘통합’에 대해 동요하는 경향이 보이는 뛰어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모든 맡은 지위로부터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심지어 유익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혁명전에 그리고 혁명의 승리를 향한 가장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 당의 대열 내부에 가장 조그마한 동요도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혁명을 사산시킬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권력은 아직 공고하지 못하며 그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동요하는 지도자들을 버리는 것은 당과 노동계급운동 그리고 혁명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을 강화시키는 것이다.”(「이태리 사회당 내의 투쟁에 관하여」, 1920. 11.)




  9. 활동의 방식




  나는 문학상의 방식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활동에 있어서의 방식, 즉 레닌주의적 활동가의 특수한 전형을 창출하는 레닌주의의 실천에 있어서의 특수성과 독자성이다. 레닌주의는 당과 국가의 활동가의 특수한 전형을 양성하고, 활동에 있어서 특수한 레닌주의적 방식을 창출하는 이론과 실천의 학교이다.


  이 방식의 독자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 명확한 특징을 갖는다.


  ㄱ) 러시아적인 혁명적 일소(一掃)와


  ㄴ) 아메리카적인 능률

  레닌주의의 방식은 당과 국가의 과업속에서 이들 두 가지의 명확한 특징을 결합시키는 것에 있다.


  러시아적인 혁명적 일소는 타성, 판에 박힌 습관, 보수주의, 정신적 침체, 그리고 예로부터의 전통에 대한 노예적인 굴종에 대한 하나의 해독제이다. 러시아적인 혁명적 일소는 사고를 자극하고, 사태를 진전시키고, 과거의 것을 분쇄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생명력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전진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러시아적인 혁명적 일소는 만약 그것이 활동에 있어서 아메리카적인 능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실천상으로 공허한 “혁명적” 마닐로프주의로 타락할 온갖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타락의 실레는 매우 많다. “혁명적” 계획을 날조하고 “혁명적” 계획을 입안하는 것의 폐해가 모든 것을 정비하고 모든 것을 개조하는 명령의 힘에 대한 신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러시아 작가인 에렌부르그(Ehrenburg)는 그의 소설 『완전한 공산주의적 인간』(The Perfect Commun-ist Man) 중에서 이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볼셰비키”의 전형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는데, 그[“볼셰비키”의 전형-역자]는 이상적으로 완전한 인간의 방식을 찾으려는 임무에 사로잡혀 … 이러한 “소행”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극도의 과장을 내포하고 있지만 확실히 그 질병의 정확한 모습을 제공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레닌만큼 그렇게 무자비하고 신랄하게 비웃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닌은 계획을 날조하고 명령을 “공산주의적 자만”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병적인 신념을 비난하였다.


  레닌은 말한다 : “공산주의적 자만은 공산당의 일원이고 그것으로부터 아직 추방당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적 명령을 내리는 것에 의해 그가 그의 모든 귀찮은 일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뜻한다.”(「신경제정책과 정치교육국의 임무」, 1921.10.)


  레닌은 항상 공허한 “혁명적” 미사여구를 소박한 일상적 활동에 대비시키면서 “혁명적” 계획을 날조하는 것은 진정한 레닌주의의 정신에 그리고 레닌주의라는 말 자체에도 모순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레닌은 말한다 : “일상적인 활동에서 거만한 빈말을 보다 적게하고 보다 소박해져라 … 정치적인 소동을 보다 줄이고, 가장 소박한, 그러나 지극히 중요한 … 공산주의건설이라는 실제적 일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여라.”(「위대한 시작」, 1919. 6.)


  한편 아메리카적 능률은 “혁명적” 마닐로프주의와 공상적인 계획을 날조하는 것에 대한 해독제이다. 아메리카적인 능률은 장애물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정하지도 않고, 모든 장애물을 사무적인 인내를 가지고 제거하며, 일단 시작된 일은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완수될 때까지 계속하는 ――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건설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 불굴의 힘이다.


  그러나, 아메리카적 능률은 만약 그것이 러시아적인 혁명적 일소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편협하고 무원칙적인 실용주의로 타락할 온갖 위험을 가지고 있다 종종 일부 “볼셰비키”로 하여금 혁명의 대의를 타락사키고 방기하게 했던 편협한 경험주의와 무원칙한 실용주의의 병폐에 대해 들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불모의 해』(The BarrenYear)라는 필냐크(B.Pilnyak)의 소설에서 이 독특한 질병의 반영을 발견한다. 이 소설은 확고한 의지와 실천적 결단을 지니고서 “정력적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지만 통찰력이 없고 “발생하는 모든 일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로 인해 혁명적 활동의 경로로부터 이탈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여러 전형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실용주의라는 질병에 대해 레닌만큼 그렇게 통렬하게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에 “편협한 경험주의자” 그리고 “머리가 나쁜 실용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그는 항상 그것을 생생한 혁명적 활동 및 우리의 일상적  활동의 모든 문제에 대해 혁명적 전망을 가져야 할 필요성과 대비시키고 이 무원칙한 실용주의는 “혁명적” 계획을 날조하는  것만큼이나 진정한 레닌주의에 모순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러시아적인 혁명적 일소와 아메리카적 능률의 결합은 당과 국가의 과업에 있어서 레닌주의의 본질이다.


  이 결합만이 레닌주의적 활동가의 완성된 전형, 활동에 있어서 레닌주의의 방식을 제시한다.



1924년


J. V. 스탈린, 스탈린 선집 1 1905 ~ 1931(전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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