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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대사회, 주체형성'을 말하는가??
전태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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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6일 21시 39분 18초
 

 1. 무엇이 위기인가?


① 방향 착오의 세월 ; 작년 올해, 노동운동은 ‘산별 전환’이 위기 해소책이라며, 모든 정파가 다 찬성하여 대부분이 산별로 옮아갔다. 그러나 “‘산별 전환’으로 나아진 것은 별로 없고, 오히려 힘없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더 외면할 위험이 높지 않으냐”는 비판에 대해 누구도 당당하게 변호하지 못한다. 무익한 ‘헛발질’에 다 동참한 것이고, “(산별로 뿔뿔이 나뉠 게 아니라) 민주노총 전체가 하나의 대단일노조로 뭉쳐야 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자연스레 제기되고 있다.

② 방향 없는 ‘변혁론’ ;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여러 해 나돌았다. 자주파가 이 말을 앞장서 했는데 그들 속내는 ‘민족해방’일 것. 그러나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선거용의 즉흥적 발상일 뿐이고, 자주파든 평등파든 사회변혁의 상은 공백이었다.

 실리적 노동운동에 대한 반성으로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이 제창되었는데, 그 취지는 옳았으나 ‘어떤 사회’로 가느냐에 대해 뚜렷한 ‘상’을 제시하지 못해서, “실리추구 아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식이 되었다. 누구는 여성에, 누구는 생태에 몰두하는 백화점식 운동. ‘변혁과 더불어 시민사회운동적 과제’가 추구되었어야 하는데, ‘변혁’은 실종하고 시민사회운동(여성/환경/인권/평화 등등)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③ 운동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 객관적 조건은 ‘1970년대부터 비롯돼 수십년 이어진 세계적 자본위기’다. 70년대의 유럽 노동운동이 이 위기에 대한 저항으로, 개량과 복지는 약간 따냈지만 지도부가 ‘개량주의’ 노선을 굳힌 바람에 결국 계급투쟁에서 패배했다. 80년대 레이건, 대처는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밀어붙여 자본의 위기를 노동에 떠넘겼다(착취 강화, 노동유연화). 국가자본주의의 방파제로 보호되었던 한국은 IMF의 공격에 굴복해 그 방파제가 무너진 뒤로, 세계자본의 공세에 속절없이 노출되었다. 중국의 자본주의화와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주의(중동 침략)로 지탱해오던 세계 자본주의는 달러화의 끝없는 하락, 미국 패권의 약화, 북경올림픽 이후 닥칠 중국 거품의 붕괴 등으로 제2의 IMF 사태 같은 것들을 재발시킬 것이다.

(‘돈을 낳는 돈’으로서 자본이 투자처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자본이기’를 그친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못할 때, 실존의 위기를 겪듯이 자본으로서 제 구실을 못하는 자본들은 살아남기 위해, 단 한푼의 이문이라도 짜내기 위해 극악하게 노동자 계급을 공격한다. 자본도 이윤을 챙기고, 노동자의 주머니도 두둑해질 ‘계급 타협’의 여지는 없다.)

④ 주체의 위기 ; 투쟁에서 핵심은 ‘기세 싸움’인데, ‘자본주의를 기꺼이 끝장내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하지 않은 노동운동이 자본을 이길 수는 없다.


2. 왜 혁명에 앞서, ‘이행’에 주목해야 하는가?


* 물론 사회주의는 ‘개량, 개혁’으로 실현될 수 없다. ‘사대부의 나라’에서 단순히 왕권 강화를 꾀한 정조 개혁이 결국 실패하고, 갑오 농민혁명을 통해서 비로소 봉건체제가 무너졌듯이. 자본가들더러 ‘자본가로서 구실하기’를 포기하도록 강제하려면 혁명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 그런데 하나의 사회체제가 완전히 다른 원리의 사회체제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에도 수백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도 수백년이 걸릴 것으로 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지난 20세기에 스탈린이 만들어 퍼뜨린 잘못된 ‘통념’이 변혁의 발걸음을 오히려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한 차례의 혁명’으로 완결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를 완성하는 데 어떤 변화들이 필요했는가? 프랑스는 1879, 1930, 1948, 1871년 파리콤뮌까지 네 차례의 혁명을 거쳤다. 영국도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차티스트의 반란 등이 일어났다. 단 한 차례의 급진적 변화가 새 체제를 완결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허무맹랑한 믿음이고, 왜 스탈린이 그런 주장을, 이데올로기를 펼쳤는지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우리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완성했다. 그러니까 우리 볼세비키, 사회주의 국가/당 집권세력에게 괜히 딴지 걸고 도전하지 말라!” 자기네 체제를 변호하고, 국제적으로 변혁운동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권력 동기가 너무 분명했다. 소련이 주도하는 ‘콤민테른’이 국제 변혁운동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좌절시켰는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 ‘혁명은 한 차례로 족하다’?? ; 그것은 로또식 운동관이다. ‘한 탕 잘 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80년대, 변혁적 기풍에 감염된 많은 386들이 그리하여, 너나없이 ‘혁명가’를 자처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혁명’이 도무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들 와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스탈린이 퍼뜨린 이 통념은 ‘숱한 기회주의자들’을 만들어냈다.


* 다들 상식으로 알았던 ‘2단계 혁명론’은 사실상 ‘혁명은 한번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숨기고 있었다.

  첫 번째 혁명이 완수되면, 그리하여 집권한 혁명세력이 슬기롭게 통치를 해서 5년이나 10년 만에 다음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그렇게 속편한 예상들을 했다. 러시아가 그러했듯이. 그러니까 두 번째 단계의 혁명은 영명하신 ‘전위세력’들이 국가권력을 발휘하여 어렵지 않게 성사시킬 수 있으므로 첫 번째 혁명만이 중요한 과업이 된다. (러시아 볼세비키들은 10월혁명을 ‘판단/결단’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 10월혁명 자체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권력이 공백 상태였으므로)


* 그런데 첫 번째 혁명은 민족해방 혁명 또는 민중민주 혁명(이라고 자주파, 평등파는 각각 주장했다).

  그래서 자주파는 민족주의 사상과 통일 주장을 주로, 평등파는 (부르주아민주주의보다 좀더 철저한) 민중민주주의 선전만을 줄곧 퍼뜨렸다. <대중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퍼뜨려야 한다>는 책무감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 그런데 ‘전위세력’이 알아서 세상을 바꿔줄 것이라는 속편한 ‘운동론’은 20세기에 여지없이 파탄나지 않았는가.


* 사회주의를 세우는 과업은 수백년에 걸쳐, 여러 차례의 혁명을 동반하는 어려운 과업임을 올바르게 직시하려면 눈앞의 혁명을 숙고하기 앞서, ‘이행 과정’의 그림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


3. 왜 ‘연대 사회’인가?


 * ‘연대사회’라는 개념이 등장하니까 ‘구 좌파’ 이론을 편하게 믿어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동적 권위가 빛이 바래기 때문에 심사가 불편하다. 논증도 없이 한두 마디로 깎아내린다. “이렇게 흉잡기의 대상이 될 바에는, 그냥 ’사회주의 빡세게 하자‘는 말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 사회주의 이념은 ‘장기적’으로 추구할 과제다. ‘연대사회’는 중기(中期)적 비전으로 추구할 것으로 제시되었다. 사람은 무릇 자기가 일생 동안 추구하여 이룰 수 있는 어떤 목표를 제시할 때라야 ‘용기’를 내서 나서기 마련이 아닌가. 수백년 걸리는 과업을 하자고 하면 엄두를 못낼 수 있다.

‘中期중기’는 ‘세대’ 개념과도 잇닿아 있다. 한 세대는 통상 ‘30년’을 잡는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에 걸쳐 추구할 목표라는 말이다.


* 왜 ‘연대’ 사회인가? 우리 운동의 진출기에는 ‘연합’이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단체 이름에는 ‘연대’가 많아졌다. 노동자계급이 보장받은 노동자/비-보장 노동자로 양극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연합은 서로간의 동일성을 높게 보는 것이고, 연대는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출발하는 말. 연합은 힘이 강하고 연대는 약하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이 뿔뿔이 분단된 지금, 우리는 ‘연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와 민중이 ‘연대’에서 출발하여,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상태’로 상승하는 것이 당면 목표다.


*** 몰락하는(흉포한) 자본주의에서 민중은 무엇으로 고통받는가?

--- 사회양극화로 ‘살림’이 더 옹색해진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민중은 ‘공동체 파괴’에 따른 심리적 고통에 더 시달린다. 자본이 왜 사회보장을 축소하려고 하는가? 자기들 돈을 ‘세금’으로 뺏기기 싫다는 면도 있지만, 더 깊은 동기는 ‘노동자들을 고분고분한 존재로 길들이기’ 위해서다.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은 고용주에게 굽신거리기 마련이 아닌가. 그래서 농촌 공동체를 파괴하고, ‘가족’마저도 ‘맞벌이’로 내몰아서 파괴한다. 가족의 유대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나약한 존재가 되지 않는가. 상업방송에서는 ‘바람을 피우라, 피우라...자유롭게 놀아라...’하고 끊임없이 ‘가족’제도에서 뛰쳐나올 것을 선동하지 않는가. → 그러니 고립화되어가는 개인들의 ‘연대/유대’를 회복하는 일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 연대사회는 한 마디로 어떤 사회인가? “사회주의 지향의 자본주의 사회”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면 ‘사회주의 지향’을 작동할 수 있으나, 사회경제 영역에서의 자본가 지배는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생활 세계’에서 사회주의 지향을 높이는 것이 먼저요, 생산관계 속에서 자본가 지배를 타파하는 것은 더딘 일이다.

(스탈린주의에서는 소유관계만 ‘국유화’로 바꾸면 사회주의가 거의 달성된 것처럼 조잡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을 해소할 수 있을 때라야 ‘사회주의답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높여서 ‘국유화’를 명실상부한 ‘사회화’로 바꿔낼 수 있을 때라야 자본주의는 혁파된다.)


* 연대사회는 4분의 1쯤 ‘사회주의화’된 사회다. ‘생산관계의 변혁(자본가 지배의 해소)’보다 ‘생활세계의 변혁을 먼저 추진한다. 정치권력은 사회주의자가 잡았지만, 사회경제 영역의 ’자본가 지배‘를 일거에 타파할 수 없기 때문에 이중二重권력 상태에 있고, 그래서 때로는 멈칫거리거나 후퇴할 수도 있다. 베네주엘라가 ’사회주의 헌법개정‘에 성공했더라면 ’연대 사회‘라 부를 만하다.


                   <왜 ‘주체’를 중시하는가?>

--- ‘연대사회’를 목표삼자는 말은 “민중의 사회주의 지향성부터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는 뜻이다.

사회주의의 완성은 더딘 일이기 때문에, 긴 여정을 각오할 탄탄한 주체를 형성해내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왜 더딘가? 자본주의가 세계화된 탓에 사회주의도 세계적으로 함께 밀어올려야 한다. 사회주의는 높은 원리의 사회이기 때문에 민중이 사회주의적 ‘윤리’의 주체로 높아져야만 운영될 수 있다.


** 근대 자본주의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는가?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기 생산물의 일부를 뺏기고(착취), 구상과 실행의 분리로 하여 소외된 노동에 시달리고, ‘인류의 유적 본질’에서 소외되고, 타자로부터 소외된다고 했다. ‘유적 본질에서의 소외’란?? 이웃과 더불어 유대를 나눌 줄 아는 전인격적 인간이 아니라 ‘도구를 부려쓸 줄만 아는, 시키는 일을 해낼줄 알기만 하는’ 그런 황폐화된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말이다.     

 단지 ‘자본에 대한 분노’만 품은 사람은 정치권력의 획득까지밖에 벌이지 못한다. 그렇게 협소한 사회주의 프로그램이 20세기 국가사회주의의 패배를 초래했다.

전면 발달하고 높은 사회적 윤리를 품은 노동자들이라야,

스스로 기업의 자주적 관리, 지역의 주민 자치를 실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쌍생아, 소외된 권력인 ‘국가’를 지양해낼 수 있다.

(** 에스비에스에서 방영한 다큐멘타리 ‘맨발의 의사들’을 검색해 보라. 높은 윤리를 갖춘 쿠바 의사들 이야기다. 사회주의 주체형성의 ‘선례’가 될 만하다.)


* 근대 사회에서 학교교육은 ‘근대적 시민’ 형성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자체는 사적, 이기적 개인을 형성하는 강력한 기제를 발동시켰다. 자본주의 경제는 ‘원자화된, 사적인 개인’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니 ‘근대 시민성’만으로는 (진보적 교양을 갖춘) 사적 개인의 형성을 넘어설 수 없다. 

사회주의 교육은 ‘높은 사회적 윤리를 품은, 전면 발달한 인간의 형성’을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형성보다 끝없는 물질 생산(자본 축적)에 몰두해왔다.

그러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란 (이미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했듯이)

‘훌륭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하는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에서도 ‘주체 형성’이 최중요 과제일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는 ‘돈을 낳는 돈’이 핵심 동력인 사회다. 교환가치와 자본 축적을 위해 경제가 돌아간다.

 ‘돈 → 상품 → 돈’

 사회주의는 ‘인간 → 물질 생산 → 인간 형성’의 순환을 이루는 사회다. 물질생산의 목표는 ‘인간의 필요 충족’이지, 어떤 신神과도 같은 자본의 축적이 목표가 아니다. 자본은 본래 ‘죽은 노동의 표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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