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정체성을 몰랐단 말인가?
민주당, 한나라당, 정부 3자가 밀실야합을 통해 오늘(5.4) 국회에서 한EU FTA를 통과시키기로 했다. 어제(5.3) 국회 본청 앞에서 FTA범국본, FTA국회비상시국회의 국회의원, 상인, 농민 등 시민사회단체가 열려던 기자회견은 경호권 발동으로 경위들의 방해 속에 한참동안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민주당에서 정동영, 천정배 최고위원도 함께 했다. 민주당은 지도부는 한EU FTA는 잘 된 협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하기야 자신들이정권을 잡았던 시절에 시작한 FTA를 지금 와서 반대한다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 머릿속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은 불가피하고 아주 좋은 것이라는 신념이 들어차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정치적 선택과 행보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그들은 무죄다! 그런 신자유주의 세력들과 선거연합, 정책연대를 추진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번 4.27 보궐선거에서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곳에서 당선하여 민주당 내 차기 대권주자로 한 발 나간 손학규 대표를 보자. 그는 군사독재정권과 김영삼, 김종필이 야합한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에서 14년 동안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등 권력의 호사를 누린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한나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길 승산이 없자 탈당해 민주당으로 온 인사다. 그의 머릿속에 신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엔진이 되고 있는 FTA를 반대할 리가 없다. 박지원 원내대표 역시 30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한인회 회장까지 경험한 사람으로 김대중 정권 때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 땅에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그 외에서 노무현 정권 때 한미 FTA에 앞장섰던 인사들이 즐비하다. 그런 그들이 한EU FTA를 찬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무현‧이명박 정권에 이어 FTA를 주도하는 김종훈 통상교섭본장이 모시는 대통령은 ‘노명박’이 아닐까?
문제는 소위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집단에 있다. 노동자 정당은커녕 누구나 진보라고 주장하는 세상에 진보정치대통합 운운하면서 급기야는 반MB 야권연대와 2012년 정권교체를 내세워 실질적인 민주대연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번 보궐선거에서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통해 MB와 한나라당을 심판하고 승리에 들떠 있었다. 선거전 야4당 대표는 철저한 검증 없는 한EU FTA는 반대한다는 정책연대 합의문에 서명했다. 그러나 보궐선거가 끝나자마자 민주당은 그들이 심판했다고 주장한 한나라당과 야합해 한EU FTA를 비준하기로 결정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그런 합의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발뺌했다. 어제 국회 기자회견에서 진보연대 대표는 “낮에는 야권연대, 밤에는 야합하는 사쿠라”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를 통해 편하고도 보수주의적인 정체세력화의 망상에 빠져 또 다시 민주당에 뒤통수를 맞았고 속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함께하자고 매달린다면 구제할 수 없는 일이다.
민주노동당 10년 만에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이처럼 무너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보수양당 사이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는 꼼수가 그대로 드러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제3의 노동자 진보정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빌붙어 권력을 구걸하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비판적지지가 횡행하는 이유다. 96/97노개투 총파업을 이끌었고 1997년 국민승리21을 통해 대통령에 출마했으며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초대 대표였던 권영길 의원은 10여년 전 에 이렇게 말했다.
“ 현 시기 진보정치의 핵심적 요구는 ‘반신자유주의’여야 한다. IMF가 요구하고 있는 일방적 금융개방, 대기업의 해외매각, 공기업 사유화, 대량해고 등을 반대하는지가 이 시대 진보의 기준이다. 민주당 내 소위 ‘개혁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범진보진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당 가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것이 범진보진영의 역할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구조조정, 공기업사유화, 금융개방에 찬성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진보세력인가.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 차별성을 분명히 내걸어 각 세력의 본질을 대중적으로 홍보해야 한다.”(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2002.1.14)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민주당의 힘을 빌어 2012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가 되고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김종필, 박태준과 야합해 권력을 잡은 김대중정권이 김종필 사당인 자민당이 원내교섭단체인 20석에 미달하자 의원 3석을 빌려준 것과 다르지 않을 국회의원 선거를 꿈꾸고 있다. 소위 보수개혁세력들은 절대로 노동자 진보세력과 힘을 합쳐 권력을 잡을 생각이 없다. 김영삼의 3당 야합이나, 김대중의 DJP연합이나, 노무현의 정몽준연대 모두 보수세력의 힘을 빌려 권력을 잡았다. 내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꺾기 위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힘을 빌린다고? 그냥 방해하지 말라는 것일 뿐이다. 최근 유시민에게 한나라당에 입당하라는 보수신문의 요구가 그냥 해 본 소리만은 아니다. 이런 보수정치판의 권력놀음에 끼어 떡고물을 챙겨보겠다는 생각은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이는 노동자진보정치의 후퇴며 몰락의 길이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몰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