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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 혁신
허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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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4월 25일 09시 57분 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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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 혁신

 

허 영 구

 

1.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오늘날 이 땅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100년이 넘는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가까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개된 민주노조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노동해방을 목표로 추구해 온 산업(별)노조건설과 노동자정치세력화다. 20년 전인 전노협 창립 1주년 심포지엄에서 몇 가지 주제가 발표됐다. “전노협과 민주노조운동”(조영건) 중 전노협 결성 의의를 ‘전노협은 미완의 변혁, 87년 6월 혁명 이후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축적물이며, 70~80년대를 관통한 한국 노동자 대중의 자주적 민주노동운동의 집체물이고,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정통적 계승조직’이라고 정의했다. “한국사회의 지배구조와 노동통제 정책”(이창호)에서 ‘전노협 결성 이후 국가와 자본의 총체적 탄압이 지속되는 가운데 합법투쟁은 필요하나 개량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지적했다. ‘국가가 노동운동을 체제내적 노동조합주의에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 정책을 포함한 개량적 노동정책의 허구성과 계급성을 폭로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것이 곧 노동자 계급의 정치의식 고양’이라고 했다. 이상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국가권력과 자본가 계급을 넘어 민중이 국가의 법, 제도, 정책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 자리매김 될 때 의미가 있으며, 이를 위해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각성과 전노협을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단결된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족민주운동과 전노협의 과제”(김세균)에서 ‘전체 민주노조의 전국적 투쟁 구심체로 발전해야 할 과제로 전국적 지도력 강화, 공동투쟁 조직화, 전국 수준의 제도개선 투쟁과 일반 민주주의 권리투쟁, 민중연대 투쟁 강화’를 강조했다.

 

현재 진보정당의 대표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 때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을 위해 산업(별)노조와 민주노총건설, 노동자 정치의식 제고를 주장했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노동위원장이었던 노회찬은 “넓은 연대, 굳센 단결로 민주노총 건설하자!”는 제목으로 ‘산업(별)노조와 단일 민주노총 건설 방향성을 갖고 산업(별)연합체인 전국 총연합, 민주노총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전노협 간부였던 심상정은 전노협 건설 배경을 ‘1987년 대투쟁 이후 열린 민주노조의 양적 확대, 공동투쟁의 성과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의 전국적 구심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건설하였으며, 1990년부터 강화된 정부의 폭력적 탄압에 전국적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였고 민주노총건설을 위해 ‘대중적 논의, 노동자들의 계급‧정치의식 확대, 산별조직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1년 전노협은 이후 업종회의, 전국노련, 전국노운협과 함께 <ILO조약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ILO공대위)>를 발족했고, 1993년 6월 <전국노조대표자회의>,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를 거쳐 1995년 11월 11일 역사적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창립했다. 민주노총은 선언, 강령에 이어 20대 기본과제를 제시했는데 세 번째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해 ‘첫째,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노동조합법과 선거법을 개정하고 각종 선거에 적극 대응하여 노동자 대표의 정치적 진출을 확대한다. 둘째, 민족민주운동을 비롯한 제민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확고한 대중적 토대를 구축하며 궁극적으로는 전체노동자 대중의 요구와 이해를 진실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을 건설한다.’고 명시했다.

 

2. 96/97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노개투)성과와 정치적 한계

 

1990년 3당 보수 야합에 뿌리를 두었고 1993년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OECD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하여 1996년 12월 12일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버리고 OECD 2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국가신용도를 높이고 한국제품에 대한 국제적 신뢰와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유에서 자유화와 개방화를 추진했다. 이는 미 재무부와 IMF 등이 추진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일환이었고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이 추진되었다. 한국에 불어 닥친 IMF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정부는 OECD가입의 전제조건으로 노동시장유연화와 개방화를 추진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전후 케인즈 자본주의는 자본의 평균이윤율 저하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70년대 초부터 통화주의가 발호했고 이는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미국과 남미를 거쳐 세계화하였다. 1990년대에는 아시아지역으로 확대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운동진영은 세계경제정세를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으로 표현된 ‘신보수주의’ 정도로 인식했다. 그래서 1년 후에 닥칠 IMF외환위기, 정확히 말하면 금융자본의 유동성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노동시장유연화는 자본이 자신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동시장유연화를 앞당기고자 ‘노사관계 개혁’으로 포장하고 1996년 5월 9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했다. 이는 차기 김대중 정권에 의해 IMF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타협기구인 <노사정위원회>로 대체되었다.

 

민주노총은 초기 노개위에 참가했지만 회의나 토론만으로는 요구가 관철되기 어렵다고 보고 8월에 투쟁본부를 발족한 뒤 파업투쟁 조직에 나섰다. 그리고 노동법 개악이 분명해짐에 따라 10월부터 회의 불참을 선언했다.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방향, 노동법 개정 핵심요구, 노동법 개정 투쟁방침을 정했다. 첫째, 노동법 개정방향은 ①ILO 기준에 따른 자주적 단결권 보장과 노사자치주의 확립, ②국민소득 1만 불 시대에 걸 맞는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과 고용안정 보장, ③노동조합의 경영참가‧정책참가, 둘째, 노동법 개정 핵심 요구는 ①자주적 단결권 쟁취(노동3권) : 공무원‧교사 노동3권, 복수노조금지조항 삭제, 제3자 개입금지조항 삭제,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삭제와 행정관청의 부당 지배‧개입‧간섭조항 삭제,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조항 삭제와 통합선거법 개정, ②개별적 근로관계법 개악저지 : 정리해고 요건 완화, 변형근로제 도입, 근로파견법 도입 저지, 주 40시간 노동제 도입과 정리해고에 대한 제한규정 신설, 근로기준법, 산재보상보험법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확대, 셋째, 노동법 개정 투쟁방침은 ①밑으로부터 노동법 투쟁 결의 : 1조합원 1교육, 대중적 결의, ②민주노총 위상과 조직 강화‧발전, ③정세흐름을 능동적으로 활용해 11월 총력 투쟁 집중하는 내용으로 노동법 개정 3대 투쟁방침을 정했다. 노동법 개정 내용으로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조항 삭제와 통합선거법 개정’을 요구하였으나 노동법 개정방향과 투쟁방침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제고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치밀하게 총파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OECD 가입 14일 만인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을 내세워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다국적기업과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에게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화를 가시화하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민주노총은 창립한 지 1년 만에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다. 김영삼 정권의 정리해고 자유화를 비롯한 노동법 개악에 맞선 전면적인 투쟁이었다. 1997년 2월 말까지 투쟁이 전개됐고 개악노동법은 폐기되어 국회로 되돌아갔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이 폐기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 의의를 ①건국 이후 최초, 최대 규모 정치 총파업, ②노동자 생존권과 노동기본권, 민주주의 쟁취 정치투쟁, ③총자본의 세계화, 신보수주의 공세에 맞선 투쟁으로 세계노동자의 연대와 지지투쟁을 실현했다고 평가하였다. 성과로는 ①날치기 노동법 저지, 법개정‧구속철회 등 정권의 후퇴 이끌어 냄, ②민주노총의 조직력 확대‧강화하고 산별노조 건설 토대 구축, ③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 강화, ④조합원 정치의식 강화, 노동자를 민주주의 투사로 각인시켜 정치세력화 토대 만듦, ⑤노동자 총파업 투쟁이 범국민적 투쟁을 선도하고 투쟁의 확산을 가져옴, ⑥강‧온 겸비한 투쟁전술과 다양한 투쟁형태의 개발과 전술에 있어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물론 2007년 1월 22일부터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데 따른 노개투 총파업의 역사적 평가는 과제로 남아 있다. 총파업 의의와 성과를 통해 ‘정치 총파업을 통해 조합원 정치의식이 강화’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총파업 총괄 현황을 보면 하루 이상 총파업 531개 노조 404,054명, 총파업 돌입 누적집계 3,422개 노조 3,878,211명, 1일 평균 파업규모 163개 노조 184,498명, 집회 참여 총인원 전국 주요도시 150만명(대규모 집회 일시 30일간), 대국민 선전물 390만부 제작‧배포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와 성과였다. 이러한 전국적인 정치총파업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와 향후 과제로 ①조직력과 투쟁력에 있어 결정적인 위력 부족 : 1995년 말 현재 노조조직률 16.5%,165만 명 중 민주노총 50만 명이 23일 간의 총파업, ②노동자 정치역량의 한계 : 여당 우위, 야당 지역정당화와 보수화, ③범국민운동 강화되었으나 민주노총 결합도 취약, 명실상부한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함, ④조직간 편차 드러났고, 탄압에 대한 대처 부족 : 파업참가 조합원 수는 81.1%였으나 노조 수는 60%, ⑤파업전술과 지도력, 내용 부족 : 파업이 노동자 학교로서의 정치투쟁과 의식고양에 한계, ⑥정치적으로 각성된 열성간부, 조합원들을 단련시킬 사업과 틀 필요하다고 자체 평가했다. 투쟁요구와 목표는 노동법 개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투쟁 계획단계부터 정치총파업으로서의 위상을 정확하게 설정하지는 못했지만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면서 분명하게 정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이나 지도부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파괴력을 갖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한계가 분명했다. 정치적 역량 한계와 정치의식제고를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자진보정치세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틀이 필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3. 민주노동당 창당과 원내 진출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민주노총은 96/97 노개투 총파업 과정에서 국내외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특히 그동안 자본과 권력의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부정적 인식을 심어왔던 노동자 총파업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아졌다. 날치기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반국민들의 총파업 지지는 50%를 넘어 80%에 달했다.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을 통해서 진정한 합법성을 쟁취했다. 민주노총 나름대로 총파업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한 것도 사실이지만 준비한 것보다 성과는 훨씬 더 컸다. 이는 김영삼 정권이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새벽에 야당이나 국민 몰래 신한국당 단독으로 날치기를 강행한 것이 국민들의 분노를 샀고 이것이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결합한 결과였다. 일반 국민들의 총파업 지지가 단순히 민주노총에 대한 지지만은 아니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개투 총파업 성과에 고무되었고 그 해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전국연합 등과 연대해 <국민승리21>을 출범시켰다. 김영삼 정권이 비록 노동운동 약화와 노동시장유연화를 위한 노동법 개악은 실패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자본의 입장에서 이 프로그램은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을 민주노총을 비롯한 한국의 운동진영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1997년 11월 IMF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대선구도는 결국 IMF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수행할 적임자를 뽑는 선거가 되었다. IMF깡디쉬가 한국을 방문해 IMF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제시했을 때 야여 보수 후보들 모두 IMF의 한국경제신탁통치프로그램에 동의했다. 사실 이 때야말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벌여나가야 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승리21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매우 중요한 시기에 민주노총은 직무대행체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라경제위기와 경제 살리기 경제위기극복 분위기에 밀려 노사정대타협 분위기로 말려들고 말았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역사적인 노개투 정치파업을 전개하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은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니 의미 있는 득표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유효표의 1.2%를 얻는데 그쳤다. 총파업에 대한 지지가 곧바로 선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민승리21에 뒤 이은 2000년에 민주노총을 모태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그 해 16대 총선과 2002년 대통령선거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나갔다. 노동자 투쟁만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노동자대표의 의회진출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4년 총선을 전후하여 민주노총의 많은 지도력과 인력들이 민주노동당으로 옮겨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전노협과 민주노총건설 과정에서 추구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킴으로써 가시적으로 달성했다. 의회를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진행되는 동안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에 대처하지 못하고 후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선자는 IMF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수행했다. 기업, 금융, 공공, 노동 등 4대 부문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었고 민주노총이 참가했다. 신자유주의 정세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기가 꺾인 민주노총의 지도력과 투쟁력은 약화되었다. 민주노총은 그해 2월 6일 김영삼 정권이 OECD가입을 위해 2006년 내내 밀어붙였던 노개위를 통한 노동시장유연화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2월 9일 대의원대회에서 소위 ‘사회적 대타협’안이 부결되었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정부에 합의안 폐기와 재교섭을 요구하는 대신 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파업은 철회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국회를 통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을 통과시켰다. 역사적인 노개투 총파업의 성과는 1년 만에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은 IMF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정책을 강행했다. 금모으기를 비롯한 애국심까지 발동시켜 노동자 민중들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시켰다. 기업에 대한 해외매각과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1998년 만도기계의 해외자본 매각과 정리해고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자 공장 안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민주노총은 5월 노동절 때 종묘에서 경찰에 맞서 가두투쟁을 벌였으나 위력 있게 저항하지는 못했다. 이어 현대자동차 대규모 정리해고와 파업이 전개됐다. 1998년 민주노총 2대 이갑용 집행부는 임기 1년 반 만에 사퇴했고 단병호 위원장 체제가 출범했다. 2001년 2월 대우그룹해체와 워크아웃으로 해외매각과 1,754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김대중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이에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퇴진을 걸고 투쟁했다. 역시 공기업인 발전회사에 대한 해외매각에 반대해 발전노조노동자들의 38일간의 산개투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의 IMF구조조정은 외형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신자유주의적인 방식과 삶이 자리 잡았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몰고 온 재벌 2세 정몽준과 민주당에서 극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노무현의 후보단일화로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 정권은 당선자 시절에는 노사간 균형을 잡겠다고 했지만 동북아 금융허브국가 건설과 뒤이어 전방위적인 FTA를 추진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정권임을 명확히 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회 과반의석을 얻었고, 민주노동당 또한 10석으로 제3당으로 등극했다. 국회를 통한 노동자정치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한편 민주노총은 그 이전과 성격을 달리하는 4대 이수호 집행부가 선출되었다. 투쟁과 협상을 병행한다는 명분으로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를 시도했다. 물리적 충돌이 연이어 발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가했다. 이후 민주노총은 지도력 상실과 내부분열을 촉진시켰다. 그러다가 수석부위원장의 뇌물수수혐의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투쟁력 약화와 내부분열이 가속화된 출발점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이 민주노총 내부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주장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합하면 민주노총 내부갈등이 치유되고 투쟁력이 복원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병의 원인도 모른 채 수술이나 처방을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노동자정치는 노동자 대중이 현장에서 투쟁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이 있을 때 실현된다. 따라서 노동자 투쟁 없는 노동자정당은 진정한 의미의 노동정치세력화 완성이라 할 수 없다. 2004년 총선을 통해 10명의 노동자 국회의원이 탄생했지만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면서도 투쟁했던 시절에 비해 제도적 개선이나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못했다. 오히려 더 후퇴하였다. 언론을 통해 민주노총이 담당하던 노동문제에 대한 각종 토론과 이데올로기 선전선동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대신한 대가로 스타정치인이 만들어졌다. 그런 이는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토대 없는 정치적 거품일 뿐이며 개인의 정치적 출세라는 환상으로 심어줄 뿐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당하고 비정규직은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 400만 명이나 늘어났다. 양극화와 빈곤은 확대됐다.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길거리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노동자‧농민이 목숨을 잃었다.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정권은 임기 5년 동안 1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구속했다. 이는 6.10민주화 항쟁 이후 5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인 노태우정권 당시 2000명의 구속자를 낸 이래 두 번째로 많은 구속노동자 숫자다. 현재까지는 이명박 정권이 노동자를 가장 적게 구속시켰는데 이는 그가 인권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제대로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소득분배율 악화와 노동자 삶의 퇴락, 비정규직 확산과 고용불안 증대, 양극화와 빈곤 확대 등 노동자민중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2006년 한미FTA와 비정규직악법 저지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들에게 무기력감과 실망감을 안겨줬고 신뢰와 기대를 상실당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서 한 때 20%대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5%내에서 고착되고 있다. 이를 2008년 분당으로 돌리려는 것은 사실 왜곡이다. 그나마 2008년 총선에서 5명의 국회의원이라도 당선된 것은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국회의원 비례대표제선거제도 덕분이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보수정당과 연대연합에 치중하는 사이 지지와 신뢰를 잃었다. 민주노총이 노동조합으로서 스스로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고 민주노동당 나아가 보수정당에 기대하면 할수록 투쟁력은 무너질 밖에 없다. 투쟁하지 않는 민주노총에 대해 조합원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도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의회주의 노동자정치만으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를 돌파할 수 없다. 현장투쟁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청년)실업자, 알바를 포함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불안정고용노동자들의 현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 창당과 역시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의회주의 정치는 실패했다. 이 실패는 매우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 있다. 그런데 물리적 통합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다.

 

4. 반MB가 아니라 반신자유주의

 

현 시기 정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편의상 신자유주의)정세다. MB식 정치와 정책은 특정보수정치권력의 특정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IMF외환위기 이후 일반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확산과 지배는 김대중, 노무현 민주당정권 10년의 정치와 정책을 통해 강화되었다. 노동자 민중들은 4대 부문 구조조정을 내세워 공기업을 비롯해 국가기간산업을 해외에 팔아넘기는 과정에서 노동자를 정해고하고 공권력의 이름으로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경찰력을 동원해 폭력으로 탄압할 때 김대중 정권 퇴진을 주장했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은 노무현 정권이 동북아 금융허브와 한미FTA 를 비롯해 자유무역정책을 밀어붙일 때는 노무현 정권 퇴진을 외쳤다. 민주당 정부 신자유주의 10년 동안 2000여명의 노동자들이 구속된 것은 드러난 정치적 사건이었지만 그 외에도 신자유주의 희생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하루 1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의 극단적 이윤착취에 내몰려 산업재해로 죽어갔고, 청소년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루 30명 넘게 자살을 택했다. 잠시라도 빠르게 달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속도전 속에서 속출하는 교통사고사망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 최장시간 노동, 세계 최악의 남녀 임금격차, 비정규직 확대, 청년을 비롯한 실업자 증가, 낮은 최저임금 문제 등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정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국가권력을 잃었을 뿐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부자와 자본가들의 부의 축적에 문제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책 10년 동안 자본가계급이 얻은 이익만큼 노동자 민중은 삶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 최근 MB와 한나라당 3년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추가로 더 많은 것을 얻는 시간이 되고 있다.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권보다 자본(가) 그 자체인 정권이기에 그렇다. 그런 측면에서 반MB와 반한나라당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친민주당과 친국참당이 될 수 없는 정치적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장밋빛 약속만으로 현실을 신뢰할 수 없다. 지난 시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미래를 예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묻지마식 야권연대에 대해 신뢰를 보낼 수 없다.

 

지난 4월 20일 국회에서 저축은행 부실문제를 따지는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전·현직 재경부장관과 금융감독 당국 책임자들이 모두 출석했다. 그런데 지난 민주당 정권 시기 이헌재 재경부장관에 대해서는 한나라당이, 현 한나라당 윤증현 재경부장관에 대해서는 민주당이 공격성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윤증현 장관 역시 노무현 정권 초기 금융감독위원장을 역임했다. 금융정책에 관한한 두 정치세력의 차이는 없다. 최근 정치사회적으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인한 우리나라 원전 안전성과 전력공급체계에 관한 문제였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 원전인 고리원자력 1호기가 다시 고장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다. 문제는 그냥 고장이 아니라 건설 당시 계획했던 30년 수명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은 다시 10년 연장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간 토목건설이 환경파괴를 가져온다면 후쿠시마에서 보듯이 원전사고는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민주당 정권 역시 환경문제에 대한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다음으로 카이스트 학생 연쇄자살에 따른 사회적 문제였다. 소위 서남표식 경쟁교육방침에 내몰린 학생들의 죽음의 행렬이었다. 오늘날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성과연봉제 등 경쟁방식처럼 대학 내 성적 서열을 통한 등록금 차등제를 통한 교육의 시장화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서남표는 노무현 정권 시기에 미국에서 초빙된 사람이었고 당시 정권의 교육정책과 맥을 같이했다. 계약제·성과연봉제를 비롯한 이명박 정권의 공공부문선진화방안은 모두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의해 기초되고 시행되어 온 정책이다.

 

금융시장개방과 해외투기자본에 관련한 다른 두 가지 사례 역시 노무현 정권에서 출발했고 이명박 정권이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14명의 노동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쌍용자동차 무급휴직·정리해고노동자문제는 2006년 노무현 정권이 투기자본 상하이자동차에 공장을 팔아넘기면서 비롯되었다. 결과는 투기자본의 먹튀와 노동자 3000여명 해고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폭력경찰 투입을 통한 노동자 죽이기였다. 노무현 정권 출범해인 2003년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불법으로 팔아넘긴 당사자가 이명박 정권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하고 있다. FTA정책은 대표적인 노무현·이명박 정권의 합작품이다. FTA책임자인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 권력의 기초는 바로 국민이나 국회를 무시하고 진행되는 통상독재권력의 특징이다. 지금 한EU FTA 국회비준을 두고 국회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당이 FTA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책임을 면해 보려는 의도일 뿐이다. 그 외에도 노무현 정권 시절 진행된 경부고속철도, 새만금공사강행, 미제국주의 이라크 침략동맹 파병, 평택미군기지이전, 혁신도시건설을 빌미로 한 전 국토의 투기장화 등 하나하나 신자유주의 정책의 백미였다. 노무현 정권 때 노동소득분배율이 60%에서 이명박 정권 들어 59%가 되었다고 반MB를 외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늘어난 400만 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이명박 정권에서 늘어난 몇 십만 비정규직 노동자만 가리키며 반MB라 소리 지르는 야권연대와 진보는 정말 피곤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퇴진을 외치던 노동운동·진보진영이 고작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MB심판에나 매몰되어 있는 상황을 먼저 반성할 일이다. 현 시기 정세에 대응한 정치투쟁의 핵심은 반신자유주의투쟁이고, 이명박 정권의 잘못된 정책에 맞서 구체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투쟁은 회피하면서 민주당으로 정권만 바뀌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외치는 반MB 야권연대는 민주·진보·노동운동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길이다.

 

5.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향하여

 

사전적 의미로 정당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정권 획득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으로 정의한다. 정당은 ‘조직의 목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해서는 특정의 주의 및 정책의 실현이라고 하는 설과 정권의 획득·유지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후자의 설’이 있다. 정당의 본질 중 ‘하나는 정당을 다양한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시켜 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민주정치의 도구로서 보는 설이며, 또 하나는 소수 지배층이 선거를 통해서 유권자를 조종하여 민의(民意)를 조작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층의 득표조직(得票組織)에 불과하다고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당에 대한 두 가지 설은 현실적으로는 균형을 갖고 있기 보다는 정권을 잡기 위해 다수표를 획득하는 운동조직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에 의해 정당이나 조직 구성원들의 이념과 정책을 실현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보수정치판에서는 이마저도 무시하기 일쑤다. 2000년 진보진영이 민주노총을 토대로 민주노동당을 창당한 것은 당장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진보정치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정치의 희망을 담을 그릇을 만든 셈이다. 그 그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진보정치의 꿈을 담아야 했다.

 

진정한 노동자정치, 창조적인 진보정치는 고통 받고 있는 다수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상층의 조급한 집권전략과 어설픈 연대전략이 진보정치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정치적 출세주의가 진보정치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다. 선거공학에 몰두해 자신의 기초를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있다. 씨앗을 뿌리고 가꿀 생각은 하지 않고 열매를 수확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이념과 노선은 사라지고 정책은 뒤죽박죽이다. 반MB 야권연대를 신성시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무원칙한 연대를 주장한다. 여전히 대기업, 정규직 노조 단결체인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좁은 토대 위에 불안정한 권력 쌓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나마 배타적지지 정치방침을 고수하면서 진보정치의 폭을 스스로 좁히고 있다. 무리한 정치일정에 맞춰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진보대통합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인 민주대연합으로 가는 길이다. 비정규직노동자를 비롯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불안정고용노동자들 속에서 새로운 진보정치, 노동자정치의 전망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노동자정치를 통해 진보정치를 혁신해야 한다.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끈질기게 노동자민중과 함께하는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나가야 한다.

 

(새로운 진보정당(준)연구모임 2차 토론회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 혁신" , 2011.4.2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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