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밖에서 바라 본 진보정치의 오늘
허 영 구
진보정당 통합논의가 무성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부터 사회당, 국민참여당(국참당) 나아가 민주당까지 확대하자는 등의 다양한 논의가 쏟아지고 있다. 최근 심상정씨는 한나라당을 제외하고 2012년 진보적 연립정부로 정권을 교체하자고까지 주장한다. 말만 진보일 뿐 보수정치판으로 귀화할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진보정당 통합논의를 지켜보면서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는 진보정치를 포기하고 개인의 권력과 출세에 치중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김문수․이재오나 민주당과 국참당의 486세대 또는 노동운동가들 역시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혁명과 변혁을 포기하고 운동을 떠났다. 지금 논의되는 통합의 의도는 반MB의 연장선에서 2012년 선거연합 또는 민주대연합을 통한 권력창출에 있다. 이는 보수양당 구조에 편입되는 것이다. 정책적 연대가 아니라 권력을 잡기 위해 민주당이나 국참당과 선거연합이나 통합을 모색하는 것은 진보정치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진보정치 실현의 조급함이다. 진보정치는 역사발전과 함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기 대에서 권력의 맛을 보겠다는 조급함으로는 진보정치를 실현할 수는 없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던 3김씨도 보수정치판에서 4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권력을 잡았다. 하물며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진보정치세력이 10년, 20년에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설치는 것은 잘못이다. 대를 이어 투쟁해야 할 과제다. 변혁의 초석을 놓고 동시에 권력까지 잡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해방세상은 더 빨리 다가올 수 있다.
민주(열린)당 정권 10년은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를 확대해 온 시기였다. 아이엠에프 구조조정과 금융(허브)세계화, 한미에프티에이, 노사관계로드맵, 비정규직악법과 비정규직확산, 미제국주의 침략동맹과 이라크 파병, 평택미군기지 이전, 새만금건설 강행과 환경파괴, 노동자 2000여명의 구속과 노동탄압이 이를 말해 준다. 야당이 된 민주당은 2012년 정권 재탈환을 위해 복지담론을 앞세워 현재의 60% 수준인 보험적용을 유럽수준인 90%로 확대하여 무상의료보험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공공병원이 7%에 불과한 현실에서 과잉진료, 과잉처방과 고가 약의 오남용, 노동자․서민의 높은 보험료부담, 확대되는 의료보험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병원․의료․제약자본의 이익만 보장할 뿐이다. 부유세나 부자증세조차 없는 이들의 무상의료는 기만적 선거전략 일뿐이다. 무상교육 역시 국립대를 법인화하고 삼성이나 두산 등 재벌과 자본이 대학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상교육이 실현될 수 없다. 대학생 등록금 반값 역시 현재의 등록금 1000만원을 2000만원으로 인상하면 달라지는 게 없다. 보수집단들이 무상급식조차도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상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기관과 운영의 공공성을 확립해야 한다. 나아가 공개념에 입각한 토지와 주택의 사회적 소유를 실현해야 한다. 진보전략은 보수정치세력 중 덜 나쁜 세력(차선책)과의 선거연합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이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통합과 2012년 반MB권력 창출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민주노총이 노동조합인지 아니면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가 되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조운동은 1996~19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노개투) 이후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를 시작으로 하강국면에 돌입하였다. 2006~2007년 비정규직법개악저지와 한미에프티에이 반대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2009년 이명박 정권과 자본의 총공세에 맞선 77일간의 쌍용자동차 총파업투쟁전선을 지키지 못했다. 2010년에는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정권과 자본의 타임오프실시에도 불구하고 대의원대회 결정사항이었던 총파업을 두 차례(천안함 사건, 6월 자방선거)나 포기하며 앉아서 당했다. 작년 말에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파업에 맞선 금속노조의 총파업이 무산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이 바뀌면 노동운동의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멀게는 1세기 넘는 한국노동운동 역사를 통해서 가깝게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외쳐온 “노동해방”은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산업(별)노조건설이라는 구체적 실천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변혁적 과제였다.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의회주의 정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통한 ‘노동(자)정치’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 산업노조 역시 통계청이 분류한 산업분류표 상의 업종이나 직종별 노동자들의 구분이 아니라 산업자본주의 초기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체로 출발했다. 지금처럼 노동자 투쟁은 방기한 채 진보정당 통합이나 보수정치력과의 연대에 치중하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노동자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조합은 정당이나 국회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는 로비단체가 아니다. 국민여론만 살피는 시민단체는 더더욱 아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할 때만이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다. 민주노조운동의 확대발전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 없이 노동자정체세력화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1945년 11월 전평 결성에서부터 지금까지 일선에서 활동하고 투쟁하고 있는 이수갑 철도노조명예조합원과 같은 운동가로부터 배워야 한다.
국민의 지지가 낮다고 상층에서 통합을 밀어붙이거나 이념과 노선을 불문하고 권력을 잡기 위한 섣부른 통합은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일 뿐이다. 이는 노동자 민중들에게 정치혐오감만 안겨줄 것이다. 최근의 선거에서 투표율은 60% 정도 된다. 나머지 40%는 여전히 정치적 무관심 내지 투표조차 할 수 없는 영세자영업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진보정치를 하기에도 바쁠 터인데 정치 공학적 통합에만 눈이 멀어 있다. 민주노총은 전체 임금노동자 1600만 명 중 5% 정도만 조직하고 있다. 전체조합원 중 5% 정도가 진보정당에 가입해 있다. 지금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노동자들의 온전한 정치적 대표체라 할 수 없는 민주노총에만 기대어 진보정치를 펼치려는 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민주노총 일부의 요구대로 보수정당까지 끌어들여 2012년 총선과 대선국면을 열어가겠다고 한다면 이는 진보정치의 쇠락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각자의 컵에 절반만 차있는 물을 서로의 컵에 담겠다며 합치는 데만 급급하면 결국 한 컵도 다 채우지 못할 것이다. 각자의 실력대로 노동자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어 진보정치를 가꾸어야 한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정책적으로 유럽의 사민주의보다 못하다. 그나마 본격적인 진보정치 10년 만에 우경화․보수화의 길을 걸으며 조급한 권력 잡기에 매몰되고 있다. 정치적 출세주의와 소영웅주의가 난무하고 있다. 권력과 출세를 위해 보수정치판에 뛰어들겠다면 솔직하게 떠나면 될 일이다. 더 이상의 변명이나 구차한 논리를 펴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아예 한나라당으로 간 인사들처럼 자신의 변신(절)을 떳떳하게 설파하는 게 낫다. 현장과 밑바닥에서 노동자․진보정치를 위해 묵묵히 활동해 온 당원이나 지지자들을 더 이상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소수의 정치실험과 출세를 위해 조직을 깨고 합치는 이합집산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라도 떠나겠다면 합당이든 뭐든 빨리 해치우는 게 옳다. 그래야 다시 새로운 노동자․진보정치판을 만들 수 있다.
(2011.2.14, 웹진 ‘좌파저널’ 창간준비 2호 게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