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불비속을 헤쳐오신 항일의 전설적 여장군 김정숙 여사님께서 삶의 푸른 언덕을 앞에 두고 그처럼 바라시던 조국통일의 날도 보지 못하신채 애석하게 세상을 떠나신것은 1949년 9월 22일이었다.
여사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모습은 김일성 주석님에 대한 깨끗한 충성심을 최상의 높이에서 보여주신 친위전사의 거룩한 모습이었다.
여사님의 서거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서거 전날인 9월 21일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새조국건설에 떨쳐나선 민중을 찾아 토산군에로의 현지지도의 길에 오르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여느때처럼 문밖에까지 나가시어 주석님을 바래드리시었다. 걸음도 여전하시었고 인사말씀도 여전하시었다.
그러나 그때 여사님의 병환은 매우 무거운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사님께서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시었다. 먼길을 떠나시는 주석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으시기 위해서였으리라.
여사님께서는 자제분과 함께 정문가에서 밝은 기색으로 웃으며 장군님을 바래우시었다. 이때도 오직 주석님의 먼길에 안녕이 있기만을 기워하신 여사님이시었다. 여사님께서도 이것이 주석님에 대한 마지막 바래움으로 될줄은 아시지 못했다.
승용차가 멀리로 사라지자 시계를 보신 여사님께서는 그때껏 옆에 서계시는 자제분께서 오늘만은 유치원에 가지 않고 어머님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올리시자 ≪어머니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은 네가 공부를 잘하면 저절로 나을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생각말고 어서 가거라.≫ 라고 말씀하시었다.
이제까지 참고 참으셨던 아픔이 일시에 엄습해 왔으나 여사님께서는 모진 아픔을 이겨내시며 주석님께 드리려고 짬시간마다 손수 떠오시던 털내의를 마저 뜨시었다.
여사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모습은 또한 주체위업의 미래를 위해 자신께 지워져 있는 역사적 사명감에 무한히 충실한 민족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토산으로 향하시는 주석님과 유치원에 가는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바래주신 후 시간이 퍽으나 흘러 털내의를 다 마무리하시었을 때 아픔은 더욱 심해져 여사님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신 여사님께서는 모진 아픔 속에서도 겨레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자신께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유치원에서 돌아오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가까이 불러앉히시고 주석님께서 조국을 해방하는 최후공격전에로 떠나실때 입으셨던 군복을 자제분의 무릎위에 올려놓으시고 ≪아버님은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인민들이 다 잘살수 있게 보살펴 주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너희들은 아버지장군님을 잘 모셔야 한다. 아버님께서 건강하셔야 우리 나라가 튼튼해지고 인민들이 더 잘살 수 있게 된다.≫ 라고 말씀하시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여사님의 병세는 더욱더 위독해졌으나 병원으로 가셔야 한다는 권고를 마다하시었다. 주석님께서 귀가하시기 전에는 자리를 뜰 생각이 아니시었다.
부관은 여사님의 위급한 병세를 장거리전화로 주석님께 알려드리려고 했으나 여사님께서는 전화를 걸지 말라고, 주석님사업에 지장을 드려서는 안된다고 굳이 만류하시었다.
부관은 더 참지 못하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사님께서는 감고 계시던 눈을 힘겹게 뜨시면서 더이상 만류할수 없으시었던지 사정하듯 ≪그럼 정 전화를 걸겠으면 장군님께서 언제 돌아오실수 있는가 그것만 알아보아 주세요. 내가 앓는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라고 말씀하시었다.
여사님의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여사님께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침상곁으로 부르시었다.
눈물을 흘리시는 자제분의 두손을 꼭 잡고 여사님께서는 아버님을 잘 받들어 모시며 아버님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해 나갈데 대해 간곡하게 말씀하시었다.
여사님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에게 하신 마지막 유언은 바로 이것이었다.
김일성 주석님께서 돌아오시였을 때에는 여사님께서 주석님께서 옆에 서계시는 것도 알수 없는 상태에 계시었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깊은 혼수상태속에서도 주석님의 음성을 가늠해 들으시고 눈을 뜨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애쓰시었으나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여사님께서는 생전 처음으로 주석님을 누우신채로 맞이하고 다시 의식을 잃으시었다.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즉시 여사님을 병원에 입원시키도록 하시었다. 의식을 잃으신채 여사님께서는 병원으로 실려가시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사님께서 수술을 받고 입원실 침상에 누우신지 얼마후 주석님께서 방에 들어오시었다.
임종의 시각은 분초를 다투며 다가오고 있었으나 여사님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시었다.
≪장군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근심마시고 어서 돌아가 보시던 일을 마저 보십시오. 치료를 받으니 정신이 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치료를 좀더 받고 곧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너무도 밝은 미소였고 너무도 평온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미소, 그 말씀이 여사님께서 이 세상에 남기시는 마지막 미소, 마지막 말씀이 될 줄을 어이 알았으랴.
여사님께서 다시 잠이 드시는 것을 보신 주석님께서는 입원치료를 받고 있던 항일투사 강건의 건강을 알아보고자 옆방으로 가시었다.
주석님께서 그와 마주앉아 문병의 말씀도 채 못하시었는데 한 일꾼이 문을 열었다.
≪장군님! 여사께서……≫
일꾼은 그만 억이 막혀 오열을 터뜨렸다.
≪그게 웬 말이오?!≫
강건은 주석님앞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버럭 소리쳤다.
주석님께서는 급히 여사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돌아오시었다.
≪어머니,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 왜 눈을 뜨지 못하십니까. 장군님께서 오셨단 말입니다. 어머니!≫
아무리 애타게 부르고 불러도 여사님께서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시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던 여사님의 결곡한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아직 따스한 여사님의 손을 움켜쥐시었다.
≪이제 방금 웃던 사람이 가다니…… 그 불같던 사람이 가다니…… 이렇게 빨리……≫
주석님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비통하게 울렸다.
≪나와 영원히 함께 있자고 하였고 원쑤를 앞에 두고서는 죽을 수 없다던 김정숙동무가 너무도 일찍이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인민들에게 행복을 주고 아이들에게 웃음만을 주자고 그리도 열렬히 말하던 동무가 큰일을 앞에 두고 이렇게 눈을 감으니 정말 애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석님께서는 너무도 비통하여 더 뒷말씀을 잇지 못하시었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신문, 방송들이 여사님의 서거에 대한 부고를 보도했다.
온 나라가 눈물의 바다로 화했다. 온 겨레가 오열하고 전민중이 통곡했다.
평양은 거족적 비애의 축도로 되었다.
여사님의 영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실에 안치되었다. 조객들이 당중앙위원회 회의실로 물결쳐 쇄도했다.
여기에 나오신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향기 그윽한 생화 속에 잠든듯 누워 계시는 여사님을 오래 굽어보시다가 눈물어린 목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김정숙동무는 조국의 광복과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운 열렬한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이름난 명사수였고 능숙한 지하공작원이었으며 모진 시련과 난관 앞에서도 굴할줄 모르는 강의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 동생을 다 잃고 친척들과도 생이별하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였고 동지들을 사랑하였으며 혁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동지를 위한 것이었지 자기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도 크신 비통함으로 말씀은 한동안이 지나서야 다시 이어졌다.
≪그는 나라가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이 통일되지 못하고 정세가 복잡하니 어찌 한시인들 제자리를 떠날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일가친척을 찾는 것도 미루어온 혁명동지입니다. …… 나는 그가 단 하루라도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살았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생동안 고생만 시키다가 먼저 보낸것이 제일 가슴아픕니다.≫
주석님의 말씀은 여사님의 거룩한 한생에 대한 총화였고 여사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위대한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
주석님의 절절한 말씀은 조객들의 애통함을 더크게 했다.
9월 24일 오후 여사님의 영구를 모신 삼두마차는 당중앙위원회 회의실 앞마당을 떠났다.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위업을 앞에 두시고, 먼 길을 가셔야 할 주석님을 더 이상 보필하지 못하시고, 아직은 잠결에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할 너무도 어리신 자제분들을 두시고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시는 여사님의 무거운 마음을 실은 듯 마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이제 가시면 영영 다시는 돌아오실수 없는 길이었다.
수십만 군중의 눈물에 젖은 연도를 지나 여사님의 영구는 모란봉에 당도했다. 추도회가 엄숙히 거행되었다.
여사님의 빛나는 약력소개에 이어 그분의 서거를 애도하는 각계층 대표들의 추도사가 있었다.
비장한 조포소리가 하늘땅을 울리었다.
김정숙 여사님께서는 이렇게 가셨다. 당년 32세였다. 너무도 일찍이 가셨다.
그러나 여사님께서는 그 짧은 생애에 동서고금의 어느 혁명가도 기록해본 적이 없는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을 이루어놓으시었다.
여사님께서는 총대로 주체위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시고 조국해방과 민주조국건설위업 수행에서 큰 업적을 쌓으시었다.
여사님께서 조국통일의 길에서 쌓아올리신 공적도 그에 못지 않게 크고 값높은 것으로 섬광처럼 사해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여사님께서는 김일성 주석님의 자주적 조국통일노선을 높이 받드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온 겨레를 힘있게 불러일으키심으로써 분열노선에 대한 통일노선의 필연적 승리의 대로를 개척하시었다.
여사님께서는 민족단합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김일성 주석님을 구심으로 하여 남북의 온 겨레를 굳게 묶어세우심으로써 지난날 조국광복위업이 필승의 위업이었던 것처럼 조국통일위업이 그 개척기로부터 필승의 위업으로 되게 하시었다.
여사님께서 우리 겨레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통일업적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고의 업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미래의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안아올리신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 민족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높이 모시고 통일경륜을 받들어도 국방위원장님께서 밝히신 통일경륜을 받들고 하나의 구심에 뭉치어도 그분을 구심으로 뭉치고 있으며 영도의 손길을 따라도 그분의 영도의 손길을 따르고 있다.
여사님께서 이루어놓으신 통일업적은 그분께서 쌓아올리신 모든 공적과 더불어 나이를 초월하는 불멸의 업적이다.
김정숙 여사님은 그것으로 하여 우리 민족통일의 앞길을 휘황히 밝혀주는 영원한 통일의 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