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그의 발언에 대하여 ==
그레그는 공화당원이면서도 클린턴때 주한 미국대사를 했다. 그 전에는 CIA 한국지부장이었다. 94년 클린턴이 북한 침공을 거의 결심했을 때, 그는 ‘북한 침공은 위험한 짓’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김영삼한테 조언을 했다. 그 조언을 듣고 김영삼이 전화통을 붙잡고 클린턴을 설득하여 ‘침공 포기’를 끌어냈다. 지금 그레그의 나이는 아마 80을 넘었을 것이다.
이미 은퇴한 그 늙은이가 작심을 하고 천안함, 대북 관계에 대해 발언을 했다. “북한에 대해 몰아붙이기 일변도만으로 가서는 안된다. 천안함 사건은 (어뢰 폭발이 아니라) 사고였다!” 한국으로서는 대단히 비중 있는 사람의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그 사람, 정보기관에서 잔뼈 굵은 노회한 사람이다. ‘천안함 사건’을 지금처럼 처리한 것이 미국 지배세력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서 (미국 지배층으로서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한미 두 지배층이 천안함으로 ‘전쟁몰이’를 하게 된 배경에는 ‘이란 침공 목표’가 있다. 그 사전 정비 작업으로 동아시아에서 ‘전쟁 상황’을 만들어 놔야, 북한이건 중국이건 참견하지 못하게 묶어둘 수 있다. 이란을 꺾은 다음에는 중국을 본격적으로 포위할 차례가 된다.
그런데 천안함 전쟁몰이는 벽에 부닥쳤다. 북한도 만만찮게 뻗대고 나왔을뿐더러, 중국이 두 차례나 북한측과 만나 ‘동맹’을 과시했다. 이 상태에서 한반도에 군사충돌을 빚었다가는 오히려 정치적 군사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북한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고 단언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 있다가는 패권국이 웃음거리가 되게 생겼다. 어떤 식으로든 뒤로 물러서서 ‘천안함 시비’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이른바 ‘출구 전략’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은퇴한 늙은이 그레그는 그런 충정에서 나섰다. “천안함 침몰과정에서 미국도 좀 미안하게 됐다. 그런데 그 침몰은 ‘사고’였을 뿐이니 한국인들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정도로는 솔직하게 털어 놔야, 이 사건도 마무리지을 수 있고 ‘6자 회담’도 다시 열어 유연하게 외교를 벌일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북한 응징, 전쟁몰이’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랬다가는 북한/중국 동맹에게 ‘되치기’를 당하지 않겠는가?
* 그동안 한국의 진보세력 누구도 명박정권의 ‘전쟁몰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쐐기를 박지 못했더랬는데 미국의 지배세력의 한 사람이 나서서 한미 지배층에게 쐐기를 박았다. “천안함 침몰은 북한 짓이 아니라”는 강력한 발언으로!
* 이 사실을 앞에 놓고, 남한에서 ‘민주’인사입네, ‘진보’세력입네 명함 내밀고 다녔던 사람들은 김씨 이씨 박씨 최씨 강씨.... 하나도 빼지 않고 다 광화문 네거리든, 부산 자갈치 시장 앞에든 돗자리 갖고 나가서 석고 대죄해야 하지 않는가?
‘민주’단체입네, ‘진보’단체입네 행세하고 지냈던 시민사회 각 단체들은 지금 이 순간, 다 팻말 내리고 그 소속 인사들은 ‘정치’와 전혀 무관한 생업에로 다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이 사회에 더 유익하게 봉사하는 것이 아닐까?
거명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노총, 민주노조들,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 숱한 노동, 시민, 통일단체, 지금으로서 단 1그램도 무게감이 없다. ‘존재 의의’가 없다. 존재하지 않아 주는 것이 오히려 이 사회를 돕는다.
행세해온 사람들 모두는 그레그 앞에, 지방선거때 현 정권에 반대표를 던졌던 숱한 민초들 앞에, 진보적 정치의식이 부족하긴 해도 ‘전쟁’은 반대할 줄 알았던 20대 30대 젊은이들 앞에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보’인사가 아니라, 그래야 사람의 탈을 쓴 사람이다. 왜냐하면 한미 두 지배층의 전쟁몰이를 ‘주춤거리게’ 만든 데에, 숱한 민초들과 그레그 전 대사는 한 웅큼이라도 기여한 반면, 민주진보세력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꼼지락거린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진보연대, 민주노동당 등등은 지방선거때 ‘천안함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 득표에 유리하지 않다’고 쉬쉬하고 지냈던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않는가? 그들은 이 땅의 전쟁몰이 반대에 진정으로 실천한 것이 터럭만큼도 없으면서 그 민심이 표현된 ‘지방선거’의 결과를 누릴 줄만 아는, 이 사회의 ‘무임 승차자’들이 아닌가?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는 데 대해 불쾌하게 여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는 그거, 북한 짓 아닌 거 같아요”하고 나서서 말한 데도 여럿 있지 않냐고 사납게 눈 치켜 뜰 곳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물을 진정한 눈으로 바라보라. 아예 입 한번 뻥끗하지 않은 곳도 많았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익을 챙기는 곳이지, 정치활동 하는 데가 아니지 않냐”고? 노동조합은 ‘정치’를 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했나, 석가모니가 말했나? 민족의 운명이 걸린 일에 침묵하는 노동조합이 과연 무슨 존재 가치가 있는가?
문제는 “국방부 발표, 믿기지 않는다. 북한 짓이 아닌 것 같다”는 정도의 의혹만 거론해 놓고, ‘우리 할 일 다 했다’고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다. 그 의혹 제기도 과연 열심히 했나? 현 정권이 사건 원인을 단정짓고 밀어붙인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혹투성이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입만 뻥끗하면 다 말을 뒤집었다. 사고가 난 장소와 시간과 세부 내용 모두, 의혹투성이인데 정말로 끝까지 파고 들었나? ‘1번 어뢰’와 그밖에 몇 가지 의혹만 거론하고 입 다물지 않았나? 가장 먼저 매를 들어 곤장을 쳐야할 대상은 진보언론, 개혁언론이라고 하는 000, 000, 000 등등이다.
하나만 예시하자. 그레그 발언이 나왔는데도 ‘전면 재조사하라’고 강력하게 발언한 언론, 정당, 단체가 하나라도 있었는가? 일본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자. 동해에서 전쟁연습 벌일 때, 일본 자위대가 버젓이 동참했다. 2차대전의 역사적 범죄의 책임을 물어 일본 자위대는 ‘공격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들을 버젓이 동참시킨 정권은 ‘국제법’을 위배하고 헌법에 있어 ‘내우외환’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지, 엄히 따져 물어야 하는데 따져 물은 곳이 어디에도 없다. 그 책무를 외면한 ‘민주’ ‘진보’ 단체들은 모두 스스로 해산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더 길게 말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잘해야 하는데, 또 그레그 대사의 정치실천에 편승하여 ‘무임 승차’하려고 하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그레그 대사가 북한 어뢰짓이 아니래요. 그러니까 북한 어뢰짓이 아니라는 것만 인정해 주세요.”하고 떠들면서 무슨 대단한 실천을 하는 것처럼 자화자찬을 할 것 아닌가?
기회주의자들에게 일러주자. “그것은 북한 짓이 아니다”라고만 단언하는 것은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 침묵하고, 그럼으로써 지배적인 흐름에 말없이 동조, 방조, 동참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사회단체 정치단체가 “그게 북한 짓이 아니면 그 원인이 대관절 뭔데?”라는 물음에 대해 책임있게 발언하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이는 또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레그는 “남한도, 미국도 약간의 잘못은 있다”는 정도로까지 반성했더랬다. 그런데 그동안 속 편하게 ‘좌초설’을 주장해온 사람들은 “그거? 북한 탓도 아니지만, 남한, 미국도 별 잘못은 없어.”하고 남한과 미국에 면죄부를 제공해온 것이다.
그게 좌초된 것이 정말로 ‘사실’에 부합한다는 말인가?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사실과 정황 증거들이 그 허튼 주장을 논박하고 있는데도? 그저 ‘좌초’였을 뿐인데도 저들이 저렇게 기를 쓰고 전쟁몰이를 했다고 과연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레그 대사가 단 한 마디로 ‘좌초’설을 날려 버렸는데도 우직하게 그런 주장을 해댈 수 있는가? 전쟁몰이가 정말로 위험천만한 짓이었는데도 그렇게 속편히 ‘면죄부’를 건네주는 민주단체, 진보단체들이라면 정녕 수상쩍지 않은가?
그레그는 김대중씨의 벗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 민중의 진정한 벗은 아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패권국 미국의 체면과 영광’이지 한민족의 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안함은 사고의 결과”라는 그의 발언에 ‘북한 짓이 아님’을 밝혀주는 측면이 들어 있다고 감격해 하지 말라. 천안함 사건과 그뒤 벌어진 전쟁몰이의 중요한 범죄를 한두 마디 ‘미안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가증스러운 속셈의 표현이니까 말이다. 그의 바람대로 된다 해도, 전쟁몰이 외길 수순에서만 벗어나는 것이지, 여지껏의 전쟁노선을 현저하게 수정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그레그의 발언 수준’에서 자기만족하는 것은 은연중에 미 제국주의를 편드는 짓이 된다. “현 남한 정권은 싫지만, 미국의 지배 질서는 받아들인다”는 내심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