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착한 사람 먼저 데려가는가?
-- 김인봉 선생을 추모하며
1. 장수중학교장 김인봉 선생을 조문하러 전주 전북대병원으로 가면서 문득 ‘하느님은 착한 사람 먼저 데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압(징계) 받을 줄 뻔히 알면서 교장으로서 외롭게(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제고사 반대에 나서는 사람은 착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자기 일신에 손해날 짓을 나서서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는 올 5월에 병원에 갔는데 ‘간암’ 자각 증세가 왔을 때는 이미 암이 다 퍼진 뒤였다. 정권의 탄압이 틀림없이 그의 병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서양 속담에 “The good die young”, 우리 속담에 “곧은 나무 먼저 찍힌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착한 사람이 더 풍파를 맞는 것은 동서 고금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는 왜 하필 장수(長壽) 중학교에 몸을 담았을까. 그러지 않아도 괘씸한 사람이 ‘장수(長壽)’라는 팻말까지 달았기 때문에 심성이 삐뚤어진 하느님께서 더 괘씸죄(?)를 때린 것 아닐까? 참으로 호상(好喪) 아닌 악상(惡喪)이다!
2. 김인봉 선생은 착하기만 할뿐 아니라 ‘된’ 사람이었다. 내 주관으로 말하자면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의 3년이라는 긴 학업과정을 마친 사람은 ‘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다. 전교조에도 그 졸업생이 여러 분 되는데 다 훌륭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는 졸업장 받아봤자 승진과 출세에 아무 보탬도 되지 않고, ‘활동이 바쁘다’는 이유로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이 수두룩한 전태일 노동대학을 1기로 마쳤다.
김 선생은 보이지 않게 일도 많이 한 분이다. 진보교육감 여섯 중에 가장 선명한 김승환 교육감(전북)을 만들어내는 데는 그의 공이 컸다고 한다. 교육단체들을 설득하여 교육감 만들어내는 테이블을 주관한 것이다.
3. 김인봉 선생은 (공립학교 중에) ‘진보 교장 1호’가 된 분이니 이 참에 ‘교장 선출보직제’9줄여서 ‘교선보’)에 대해 살펴보는 게 좋겠다. 전교조 투쟁에 열성을 보인 분들 중에는 ‘공모제’를 통해 평교사가 교장으로 진출하는 데 대해 마뜩지 않게 여겨온 분도 없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교장선출보직제(=교선보)를 쟁취하여 본때있게 학교민주화를 벌이는 것이 중요하지 전교조 한두 사람이 교장 되는 것이 무에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교선보의 전술적 의의>에 대해 예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풀어보겠다. 87대투쟁의 열기가 솟아오를 때 이 구호가 처음 등장했는데 그 열기 속에서는 ‘이게 무에 어려운 일이냐’ 싶었다. 그러나 87투쟁의 기세가 가라앉은 지금 분명해진 것은 이것이 노태우 김영삼 정권은 물론이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어림 반푼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시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실현될까? 혁명을 통해 집권한다면 모를까, 사회경제적 위기 국면을 땜질해줄 ‘위기관리용’으로, 즉 민중저항에 대한 ‘방파제’로 미국/남한 지배층이 멍석을 깔아줘서 탄생한 진보정권일 때에도 어림 한푼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선보’의 실현을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줄곧 ‘교선보’를 제기할 일이 아니라 남한 사회에 혁명이, 우선 정치혁명이라도 일어나도록 준비하는 일에 나서야 옳다. 감나무 밑에 누워 감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계적 이분법을 피하는 뜻으로 덧붙이자면) 물론 이것은 ‘교선보’ 의제는 전혀 제기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혁명의 준비에 필요한 만큼 <한정해서> 거론하라는 것이다.
교사집회에서 구호를 외칠 때에는 다른 감이 들지 모르겠으나 직시해야 할 것은 “<교선보>는 (김영삼이든 노무현이든) 부르주아정부에게는 불가능한 요구”라는 사실이다.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 들이대는 것이 <개량주의 운동>이라는 것을 점을 당신은 이해하시는가? 부르주아 정권들이 들어줄 리 없는 일이다. 왜? 교육을 국가가 관장한다는 틀을 송두리째 허무는 것이므로. 유럽에는 사민당 정권도 자주 집권했더랬는데 이 제도가 도입된 적이 없고 거론된 적도 없는 것으로 안다.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성도 약하다. 사회주의 혁명정권이 들어선다면 어떨 것 같은가? 독재적 교육관료 제도를 타파해야 한다 해서 ‘교사들이 알아서 뽑으라’고 꼭 내맡길 일은 아닐 것이다. 전교조든 다른 무엇이든 진보적 변혁적인 사회운동집단이 잘 양성해준 사람들을 ‘교장’으로 앉히는 것이 더 진중한 방책이 아닐까? 교사들이 알아서 뽑는 것이 얼마쯤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면도 있지만 ‘아무나 뽑힐 수’도 있다. 이 제도는 교사들의 바람 만으로 성사될 일이 아니고 사회여론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유방임’ ‘무정부주의’ 발상이 아니라고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추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국가(교육관료제도)가 따로 저희끼리 노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그 국가(교육관료제도)를 완전히 허물어 사회(시민사회 아닌 민중사회) 속으로 돌려놓는 것이 우리의 추구 방향이어야 한다. 그럴 때 어느 학교의 ‘교장’은 그 콤뮨(=공동체사회를 총괄하는 공동체국가)가 여론을 모아 지명해야 옳은 것이지, 각 학교에 알아서 떠맡길 일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적 발상이다. 그 콤뮨은 교육내용과 체제를 (인간해방교육을 위해) 끊임없이 혁파하고 실험해야 하는데 변화, 변혁에 저항하는 사람이 교장이 된다면 어쩌겠는가?
그러므로 ‘교장선출보직’ 구호가 나온 시대적 특수성을 읽어야 한다. 독재적 교육관료제도에 시달리느라 수십년간 원성이 쌓이고 쌓인 배경 속에서 이 바람은 터져 나왔다. 워낙 되어먹지 못한 교장이 수두룩했던 시절이라서 교사들은 “평교사 아무나 저 교장 자리에 갖다 앉혀도 저 사람들보다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 박정희 하의 교장집단이 너무나 형편없는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민중이 공감할 때에만, 공감하는 한에서 이 구호는 얼마쯤 의미를 갖는다. 지금도 그럴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에서 낙하산으로 임명하는 사람은 다 저 모양으로 개차반이 된다”는 것을 입증할 때라야 “교장은 반드시 교사들이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위에서 임명한 사람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주장은 다소 허무주의적인 발상이 아닐까? 핀란드의 교장들은 다 타락한 사람들이니 거기도 시급히 ‘교선보’가 도입돼야 할까?
이 지점에서 개량주의를 살펴보자. ‘진보’와 ‘사민주의’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정권/체제가 들어줄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들을 마구 퍼부었다. 그럼으로써 “이렇게 정권을 볶아대는 야당이 필요하지 않냐”고 대중이나 유권자들에게 자기를 선전했다. 정권/체제는 이렇게 시달리는 것이 부담스러우니까 약간의 양보를 한다. 사회단체나 정당의 주도층은 이 행로를 사실 잘 안다. 대단히 높은 요구들을 하는 것 같지만, 이 자본체제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자기들의 실제 목표는 따로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 목표는 빈약할 정도로 너무 낮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이런 개량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계급지배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요구’를 퍼부으면서 ‘선명 야당의 입지’를 확보하자는 속셈이 아니라,
<계급지배의 실재(the real)를 상당하게 뜯어고칠 경우에는>
(만만치 않기는 해도)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목표를 대중에게 제기하고
십년이 걸리건 백년이 걸리건 그것의 실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럴 주체만이 역사 앞에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주체다.
지금의 사회체제가 그대로 가는 한, 국가 관료제도의 근간을 허무는 요구는 ‘불가능한’ 요구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목표로 하여 일하는 주체들이 형성된다면 국가 관료제도를 허무는 것은 가능하고 현실적인 과제가 된다. 십 년이 걸리든 백 년이 걸리든.
== 그동안 전교조 내 ‘교선보’를 둘러싼 논란은 사람들 진이 빠지는 소모적인 것으로 흘러온 점이 없지 않았다. 제도 개선의 열매를 당장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이 다툼을 더 악화시킨 측면이 물론 크다. “교장선출보직 같은 과격한 요구는 곤란하다? 그래서는 정부가 썽을 내서 들어줄 것도 안 들어준다? 현실에서 정부가 받을 요구를 걸어라?” 이들은 교장선출보직 주장이 터져나온 덕분에 ‘교장 공모제’ 따위가 선보였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머리에 넣지 않는다. 교선보 주장이 없었어도 ‘교장 공모제’가 나올 수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평교사를 발탁하는’ 내부형 공모제가 교선보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전투적인 ‘교선보 주창자’들에게도 캐물어야 한다. “교선보를 외친 결과는 약간의 내부형 공모제 실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일찌감치 예상할 수 있었지 않은가?” 당신들이 진정한 ‘교선보’ 주창자라면 교선보 요구를 이제 그만 접고 ‘교사운동의 변혁적 성격 강화’에 나섰어야 하지 않는가? 눈앞의 열매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실리형 개량주의라면 당신들은 ‘강성 개량주의’ 아닌가? 전투적이라는 미덕은 훌륭하지만 개량주의에 갇히는 하릴없는 운동 말이다.
==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인봉 샘을 떠올린다. 내부형 공모제가 없었더라면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교장’은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그의 실천은 전교조 투쟁의 열매다. 그러므로 “왜 전교조는 교선보로 가야 하는데, 교장에 간 것은 대열 이탈이 아니냐”고 바라보는 눈길은 이해할만한 의구심이기는 해도 좀 여유가 없는 눈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른 상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과 같이?
“진보교육감들이 내부형 공모제를 최대한 늘려, 거기 진출한 전교조 출신 교장들이 다들 일제고사 반대에 나선다. 그래서 현 정권은 이놈의 ‘내부형 공모제’를 당장 깡그리 없애려고 설친다. 그래서 그나마의 교육개혁도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후퇴일까? 거기 머물러 버린다면 물론 후퇴다. 그러나 “이 놈의 정권은 지난 20년 민주화의 성과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제거해 버리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네? 무슨 구단이 나야 쓰것네?”하고 자기를 변혁하는 활동가들이 늘어날 때, 그것은 ‘1보 후퇴, 2보 전진’이 될 것이다. 민주화의 열매를 자기가 맛보려는 사람들을 설령 비판한다 할지라도 ‘도덕적 단죄’는 위험하다. “당신, 왜 그렇게 교장 되고 싶어 조바심냅니까?”가 아니라 “당신, 훌륭한 교장이 돼 보고 싶은 모양인데 주머니에 늘 <징계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갖고 다닙니까? 내일 쫓겨날 각오로 가는 것이지요?”
지금 진보교육감 여섯 분이 대단히 고생하고 있을 터인데, 그분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정세 변화에 따라서는 바로 다음 선거때 ‘교육감 간선제’로 바뀔 수도 있다.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씨가 당선되자마자 조/중/동에 그 얘기가 나왔다. ‘진보 교육감’이 한때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엄중한 정세와 대결하여 그런 ‘반동’을 물리치려면 진보교육감들이 어떤 플랜을 세워야 할까? 민주당이나 민노당 등등이 현 정권과 대충 ‘대결하는 시늉’만 벌이면서 표를 얻는 지금의 흐름 속에서? ‘4대 강’ 반대로 표를 얻은 민주당 도지사들이 벌써 정권과 물밑 타협에 들어간 이런 시점에서? (민주당은 ‘4대강’ 타협으로 실리?를 챙기는 대신 천안함 북풍몰이는 대충 받아주는 가증스런 야합의 길로 갈 것이다)
4. 전교조 전주의 터주대감 김정훈 선생이 김인봉 샘을 기리는 멋드러진 시를 지었다. 그 시에 보니, 그가 태어난 고향(전북 장수군)의 골짜기가 ‘매계’라 불렸다고 한다. 매화 골짜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정훈은 그의 호를 ‘매계’로 지어 부른 것 같은데, 그렇게 따라 불러야겠다.
=== 어즈버, 삼천리 심심유곡 청청히 흐르는 골짜기에 정갈한 매화 한 잎이 또 떨어졌구나! ‘민주화의 봄’이 이렇게 저무는가?
=== 나는 그와 동갑내기다. 회갑도 맞지 못하고 그는 안타까이 스러졌지만 백년 전만 해도 회갑맞기가 드문 일이 아니었던가? 앞으로의 인생은 ‘덤’으로 여겨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집에 들어서는데 누군가 대뜸 ‘건강검진 빨리 받으라’고 성화다. 아, 고인의 하직을 벌써 잊어버리는 영락없는 소시민의 삶.
=== 선생은 ‘올튼’과 ‘예튼’ 두 장성한 자녀를 두었다. 국어샘 답다. 독자 제위께 권한다. 내년의 담임반 급훈을 “올튼아, 예튼아! 몸 성히 커라!”로 짓는 것은 어떤가? 이때의 올튼, 예튼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올바르고/예쁘고 튼튼하게 자라는 아이’라는 일반 명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