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신불을 아십니까?
문수 스님을 아십니까? 사회 뉴스에 관심이 덜한 사람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뉴스란의 한 귀퉁이에 살짝 올랐다가 사라진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문수 스님을 모르는 분 중에도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은, 그 제목과 어렴풋한 줄거리만큼은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에서 ‘필독서’에 올라 있고 아마 고등학교 국어책에도 자주 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등신불 문수스님’에 대해 잠깐 추모하는 글입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대다수 분들께서는 옛 학업을 잠깐 ‘복습’하는 의미에서라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등신불’의 말뜻을 알아봅니다. ‘같을 등, 몸 신’. 첫 번째 뜻은 사람몸 크기와 똑같이 만들어진 불상입니다. 그러나 이 말뜻은 곧 넓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열반하셨는데(죽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 그 몸이 썩지 않은 분들을 ‘등신불’로 추앙해 왔습니다. ‘온 몸이 다 사리’이고, ‘그분은 우리 곁에 살았던 부처님’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죽은 분들의 몸에 금가루를 발라서 불상으로 모셨다는데 중국에는 ‘10대 등신불’이 전해 옵니다.
일본에서도 ‘등신불’과 거의 같은 뜻의 ‘즉신불’이 있었습니다. 일본 승려 중에는 즉신불이 되려고 토굴에 들어가 가부좌를 튼 사람들이 예전에 좀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수도 고행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앉은 채로 (굶어 죽어) 미이라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한 사람도 많고, 이를 완수하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대 일본법에서는 이렇게 돕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어 아마 더 이상 즉신불을 목격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씌여진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 이르르면 이 말뜻이 더 넓어집니다. 자기 몸을 불태워 죽은(=소신‘燒身 공양한) 스님도 ‘등신불’로 기리는 것으로!
<< 나'는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가 남경(南京)에 주둔해 있다가, 대학 선배인 진기수의 도움으로 탈출, 정원사란 절에 몸을 의탁한다. 그곳에서 금불각의 화려한 외양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금불각에 안치된 등신불을 보게 되는데, 그 불상 같지도 않은, 인간적인 비원을 담고 있는 모습에서 충격과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 불상은 옛날 소신 공양(燒身供養)으로 성불(成佛)한 '만적'이라는 스님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운 것이다. '나'는 원혜대사를 통하여 신비로운 성불의 역사를 듣게 된다.
'만적'은 당나라 때의 인물로, 자기를 위하여 이복 형제를 독살하려는 어머니로 말미암아 큰 갈등을 겪다가 집을 나간 형 '신'을 찾아 자신도 집을 나와 불가에 몸을 맡긴다. 10년 후 어느 날, 자기가 찾던 이복형이 문둥이라는 천형(天刑)에 고통받고 있음을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인간사의 번뇌를 소신 공양(燒身供養)으로 극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가 1년 동안의 준비 끝에 소신 공양하던 날 여러 가지 이적(異蹟)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부터 새전(賽錢)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 새전으로 '만적'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우고 금불각을 짓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불상에 인간적인 고뇌의 슬픔이 서려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를 마친 원혜대사는 '나'에게, 남경에서 진기수 씨에게 혈서(血書)를 바치느라 입으로 살을 물어뜯었던 오른손 식지(食指)를 들어 보라고 한다. 왜 그 손가락을 들어 보라고 했는지, 이 손가락과 '만적'의 소신 공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원혜대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와 목어(木魚) 소리만 들려 온다.>>
사실, 용맹하게 수도 정진하다가 돌아가신 것도 성불(成佛)이라면 중생을 위해 큰 소원을 밝히며 돌아가시는 것도 성불(成佛)일 것입니다. 소신 공양의 가까운 예는 1960년대 베트남에서 일어났습니다. 민중을 함부로 죽이고 불교를 억압했던 고딘 디엠 정권 하에서 틱 꽝 득 스님이 ‘민중학살에 대한 항의, 불교 포교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었습니다(인터넷에서 ‘소신 공양, 베트남’을 검색하시면 그 분신의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뒤로 베트남스님 수십 명이 소신공양의 대열에 따라 나섰습니다. 김동리도 이 사건에 감명을 받아 ‘등신불’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1998년에는 태고종 종정이 ‘남북의, 불교 교단의 화합’을 빌며 또 소신 공양했습니다.
그런데 불교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비-종교적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불한다는 것, ‘등신불’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간단하게나마 그 뜻을 살펴 봅니다.
문수 스님은 ‘4대 강 사업 반대, 서민을 위하는 나라가 돼라’는 비원(悲願)을 발하며 지난 5월 31일, 경북 군위의 한 냇가에서 자기 몸을 태워 없앴습니다. 이 죽음을 놓고 그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한 불교계 사람이 “소신 공양에는 사회 열사들의 죽음과 다른 뜻이 있다.”는 말과 “문수스님의 행위를 폄하하는 스님들도 있다”는 또다른 말을 했더군요. 어떤 사람은 “그를 너무 신격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스님의 뜻을 이어받아 4대강 사업을 저지하자”고 말했더군요.
‘문수스님을 너무 신격화하지 말라’는 말에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현대는 종교 담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닙니다. 소설 ‘등신불’의 만적 스님은 여러 이적(異蹟)을 일으켰지만, 그 ‘이적’은 뒷시대에 덧씌워진 설화일 뿐이고 우리는 문수스님으로부터 아무런 이적(異蹟)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격화 염려’는 괜한 노파심의 말로 들립니다. 불교계는 그의 육신에 금가루를 발라 전시할 생각은커녕 그의 행위를 폄하하는 분위기도 꽤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무리 그를 가리켜 “성불했다”고 칭송한다 한들, 불교 신도회 회장의 말처럼 “그저 눈물 나고, 말문이 막히는” 것이 현실임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열사들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도 새겨볼 구석이 있습니다. 문수 스님이 수행에 용맹 정진한 분이었다고 하니, 그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구도 행위’의 일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전에도 손가락을 태우는 공양을 한 적 있다고 합니다. 굳이 ‘성불’이라는 특정 종교의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그의 영혼은 무척 깊었을 것이고 그의 행위에는 자기 삶을 송두리째 던지는 ‘숭고한 차원’이 들어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적은 소신공양과 열사들의 분신을 칼같이 가르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문수스님의 공양이 숭고한 것처럼 열사들의 분신도 숭고하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두쪽 사이는 차원이 다르다기보다 문수스님이 (다른 여러 열사들보다) 공력이 더 깊다는, 정도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세상(중생)을 구한다! 저마다 자기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자기 것(지위, 명예 등등)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는, 이기주의를 삶의 원칙과 동력으로 삼게 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만적의 시대보다도 더 숭고한 행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문수스님이나 여타 열사들의 행위를 은연중에 깎아내리는 시각들에 대해 더 경계하게 됩니다. “스님의 뜻을 이어받아 4대강 반대, 생명 살리기를 더 열심히 하자”는 말은 해볼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의 소신 공양에 담긴 뜻을 자칫하면 ‘현안문제 해결용’으로 협소하게 좁힐 수 있습니다. 노동현장에서는 “열사의 뜻 이어받아 0000 쟁취하자!”는 등의 구호를 많이 외쳤더랬는데 이것도 “0000을 쟁취하기 위해 내 목숨을 던졌다”는 의미로 읽힐 염려가 있습니다. 분명히, ‘분신’이든 ‘소신 공양’이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말려야 할 일이지, 때에 따라서는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실천행동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니 분신과 소신 공양 행위 속에 깃든 온전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탐욕과 거짓으로 얼룩진 이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 나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죽을 터이니, 나와 더불어 바른 세상을 만들려고 애써온 너희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라. <나의 나>인 너희는! 부디 나약하게 자기 속에 움츠러들지 말고 세상을 바꾸는 일꾼으로 너희는 거듭나라!” 그러니 분신과 소신을 맞은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할 것입니다. “열사(또는 스님)의 뜻 이어받아, ‘나’를 바꾸고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자!” 문수스님의 행위는 “세계 변혁에 대한 절절한 부르짖음”으로 읽어야지, ‘눈 앞의 현실 개선’을 요구하는 행동 쯤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점에서 김동리의 ‘등신불’을 다시 거론합니다. 중학교 3학년들이 이 소설에 대한 ‘독후감’으로 쓴 것을 (평가하느라) 수백 편 읽어본 적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이 고작해야 만적스님의 소신공양을 불교적인 수도행위로 설명하는 데 머물렀습니다. 이는 불교 이야기를 따라 읊조린 데 불과합니다. 아마 만적이 일으킨 이적(異蹟)과 금가루를 칠한 불상 등에 생각이 갇힌 것이겠지요. ‘1인칭 화자(나)’가 혈서를 쓰느라 손가락을 물어뜯은 것과 만적의 소신 공양을 비교해 보라고 소설가는 유도했는데 이같은 ‘소설가의 유도’가 그렇잖아도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내용을 더 어렵게 느껴지게 합니다. 김동리씨야 ‘자신의 불교 귀의’ 결단을 더 그럴싸하게 미화하고 싶었겠지만 저는 그것이 과연 대단하게 음미할 이야기일까, 싶습니다.
소설 ‘등신불’을 제대로 읽으려면 베트남의 틱 꽝 득 스님과 남한의 문수 스님의 소신 공양에 담긴 온전한 뜻을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분명히 이 두 스님은 현실의 어떤 절박한 고난을 헤쳐나가기 위해 자기 몸을 던진 것이고, 마찬가지로 ‘등신불’의 만적 스님도 탐욕스런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린다는 사회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눈길이 ‘가족 관계의 변혁’ 차원에 머물렀다면 현대의 두 스님은 ‘사회 전체’를 향해 메시지를 던진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 글의 독자들께서는 중고교에 재학하고 있을 자기 자식이나 조카나 동생들에게 세상도 일깨워주고 학교 공부도 도와주는 뜻에서 한번쯤 소설 ‘등신불’과 문수스님의 행위를 견주어 말해주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마무리 짓겠습니다. 문수 스님을 굳이 ‘부처’라고 신격화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쯤은 ‘문수스님이 등신불’이라고 일컬어주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의 몸은 태워 없앴지, 지금 금가루를 발라서 ‘우상’으로 모셔놓고 있지 않으니 ‘우상화 염려’는 섣부른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 ‘아,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일어나는구나!’하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세상이 자못 넓고 깊다는 생각을 다시 갖추었을 것이니까요. 이 충격이 ‘숭고한 감정’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숭고할까요?
굳이 ‘등신불’을 들먹이는 것은 열사들의 ‘분신 행위’도 그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와 비슷하게 숭고한/신성한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아울러 환기하고 싶어서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포섭되고 세뇌되어가는 우리는 ‘숭고함’을 느끼는 안목마저 혹시 약해져 가고 있지 않을까요? 문수스님의 행위에 충격 받은 수경 스님은 자기의 감투와 명예, 모든 것을 내려 놓았습니다만 우리는 열사들을 투쟁에 써먹기만 했을 뿐, 열사들의 투신을 계기로 자기 자신들을 변혁하는 데로까지 나아갔던가요?
어떤 면에서는 열사들의 분신이나 문수의 소신공양에는 ‘잠수함의 토끼’와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의 불교나 지금의 사회운동이 현대의 절박한 과제들을 과연 정면으로 받아안고 있는가? 이 사회에서 ‘존재 의의’가 있는가?”를 엄중하게 묻는 행위들이니까요.
그들이 우리의 상징계에 마지막 자취만 남기고 떠나간다는 것은 ‘인간 사회’라는 잠수함 속에 산소가 거의 희박해져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켜보며 숭고함과 더불어 ‘눈물 나고 말문이 막히는 감정’도 아니 느낄 수 없습니다.
문수는 자기 몸에 석유를 붓기 전에 반 말이나 되는 석유를 한참이나 들이마셨습니다. 내장 속까지 철저히 다 태우겠다는 것이었고, 몸뚱이는 온통 숯가루가 되어버렸습니다. 시신을 부검한 경찰관이 ‘이런 경우, 처음 본다’고 충격을 받을 정도로 그의 뜻은 굳었습니다. 틱꽝득 스님은 자신을 호곡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죽었지만 그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외롭게 죽었습니다. 법화경에는 “몸을 스스로 태워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니, 그 광명이 두루 80억 항하사의 세계를 비춘다.”고 적혀 있습니다만, 그의 불사름이 빚어낸 광명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세상을 비추었을까요? 그의 소신 공양에 담긴 의미를 우리가 온전히 이어받는 정도까지만 그 불이 타오르는 것 아닐까요? 혹시 그가 일으킨 광명이 벌써 사그라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님의 뜻 이어받아, 저마다 제 인간됨을 변혁하고 송두리째 세상을 바꿔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