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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안경을 낀 '색'씨에게
연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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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0일 13시 11분 19초
 

 색안경씨가(이하, 그의 성을 따서 ‘색’씨라 부른다) 자기 글에서 ‘당건투’임을 밝혀서, 그의 이러쿵저러쿵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당건투에 대한 내 생각을 먼저 밝힌다.


1. 내가 당건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몇 달 전엔가? 노힘이 당건투에게 받은 비판을 되돌려주는 글을 읽었던 것 정도다. 당건투는 “비정규 문제가 더 중요한데, 너희는 엔엘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에프티에이 투쟁이나 벌이고 있니?”하는 식으로 비판한 것 같고, 그에 대해 노힘이 “우쉬...!! 그럼 에프티에이투쟁, 하지 말라는 거냐? 웃기고 있네”하고 반발하는 내용이었다. 당건투의 노힘 비판은 일리가 있다. 노힘은 ‘계급적 좌파’라는 선명성을 내세워서 민주노총내 권력 정치의 한 끄트머리를 차지하는 데 골몰한 적이 많았던 점도 비판될 일이겠고, 에프티에이싸움도 엔엘파의 ‘민족 담론’에 졸졸 따라간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힘 김태정이 그때 작성한 글을 봐도, 글 맨 앞에서 ‘계급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고 원론적으로 언명한 대목을 빼고는 엔엘파의 글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 범국본 내에서 ‘소수파’였는데 워쩔 거여? 하고 항변할 지 모르나, 자기들 자체 글에서는 계급적 내용이 더 확실히 나왔어야 하지 않는가? 실력있는 좌파라면 에프티에이가 ‘남한 초국적자본의 아-제국주의적 측면을 지니고 있음도 비판했어야 한다.

 아무튼 당건투가 노힘보다 ‘더 왼쪽’에 서고 싶어함은 알겠고, 노힘이 워낙 문제가 많으니 그들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일리 있는 것은 사실이겠는데, 문제는 그렇게 비판을 하는 당건투도 ‘관점의 협소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에프티에이투쟁은 손 놓으라구? 민족개량파가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내버려둬?”하는 노힘의 항변은 일리가 있다. 변혁성이라는 것은 이 투쟁감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저 투쟁감을 집어들자는 식의, ‘소재 선택’으로서 담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프티에이투쟁을 하려거든, 고로코롬 하지 말고, 요로코럼 해야 쓰것다”고 말해줘야 상대방이 부분적 수긍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왕이면 당건투가 실제로 그런 모범을 보여줬더라면, 노힘에서 괜한 입씨름도 나오지 않았을 터요, 노힘회원 여럿이 그 모범에 감복하여 노힘을 버리고 당건투에 가입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 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게시판에 ‘사노련’ 준비소식이 뜨고, 거기에 사회실천연구소의 오세철씨도, 당건투 등등도 함께 하는 것으로 안다. 오세철씨에 대해 전에는 ‘콤뮨’을 유달리 강조하는 분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근래에 한겨레신문에서 베네주엘라 혁명을 논평하는 글 세 개가 시리즈로 실렸을 때 그 글 중의 하나가 오세철씨의 글이었다. 그런데 그의 논조가 대단히 수상쩍고(...무슨 혁명의 배반자를 단죄하는 듯한 논조...) 어느 대목은 아주 불순한 느낌마저 풍긴 탓에 나는 그와 실천을 같이 하는 그룹들도 오세철씨의 그런 정견에 동조하는지 쪼금 궁금하다. ‘색’씨도 연대사회론쪽에 대해 이것저것 주문을 많이 했는데, 나도 공평하게?? 주문 하나 해야겠다. 오세철의 차베스 비판에 동조하는지 여부를 밝혀달라는 것! 싫으면 말고.   


2. ‘색’씨의 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당건투와 코민테른이 제시한 ‘노동자 국가’와 무엇이 다른지 밝혀달라, 연대사회론은 ‘민중권력’을 내세우는데 이는 엔엘피디알 이론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2단계 혁명론이다. (그 전의 글에서는 ‘이중 권력을 설명’해 달랬던가? 또 무슨 가치와 무슨 가치와 등등 경제이론에 대한 질문도 했었는데 무엇을 묻는 질문인지 알 수 없다고 대꾸했더니, 그 질문은 다시 정리해서 나중에 다시 제기하겠단다)


* 곁두리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나는 이따금 ‘좌파’와 의견을 주고받을 때 갑갑한 느낌을 받곤 했다. 일전에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를 우리쪽에서 거론한 적 있었는데 어느 친구 왈 “그 개념, 킴 무디 거에요? 누구 거에요?” 아니, 우리가 사회운동을 하자고 앉아 있지, 대학 강의실에서 시험 보자고 앉아 있나? 책상물림 좌파의 고질적 버릇이 ‘어느 학자의 개념이냐 따지기(=지적 재산권 다툼??)’ 아닌가. 물어보려거든 “당신들은 노조가 사회운동을 나가자면서 <그런> 점을 강조하는데 <이런> 점이 강조돼야 하는 거 아뉴?” 하거나

아니면 “사회운동, 하릴 없소. 경제투쟁이나 잘 합시다” 하는 식으로 들이대야 토론이 생산적으로 되지, 킴 무디 것이면 워떠코 조지 부시 것이면 워떠탄 말인감?

 무슨 토론을 ‘개념 따지기’로 환원해 버리는 것에 대해 진저리를 내는 사람에게 개념 몇 개 들이대고 ‘아나 콩콩’하는 글을 색씨가 제출하였으니

내 입에서 고운 이야기가 나가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개념’들을 희롱하여 색씨는 ‘운동, 잘 했다’는 보람을 얻을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개념’에 대해서 말해보라는 식의 공방전은 내게는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하도 성화를 부리니까 억지로 대꾸할 뿐이다.


3. 당건투가 말한 ‘노동자 국가’와 무엇이 다른지를 말해달라는 요구는, 당건투를 세상의(아니, 운동권의) 중심에 놓고 보는 이야기다. 나는 색씨가 그런 말을 한 것을 읽고 게시판을 뒤지고서야 ‘당건투가 노동자 정부를 주장하는구나’ 알게 되었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보라. 왜 내가 당건투 게시판에 들어가 일일이 독서를 하고서 그에 답해야 하는가? 우리 강령집에는 ‘연대사회’에 대한 해설이 들어 있다. 물론 처음 제기하는 개념이라서 아직 넉넉히 온축돼 있지 못하고 세부적으로는 더 연구돼야 할 부분도 많으니, 세부적인 질문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본 얼개는 말해 놓았으니 색씨는 이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 글을 읽어보니, 우리네 노동자국가와 당신네 연대사회가 이런 점에서 다른 것 같소. 그런데 <이러저런 점에서> 우리 ‘노동자국가’ 개념이 훨-- 낫소.”

왜 우리가 당신이 궁금해 하는 것 하나하나를 일일이 ‘개념 설명’부터 다시 해야 하는가? 토론에서 무례한 태도가 아닌가?


색씨는 ‘코민테른’에서 말한 노동자국가와 무엇이 다른지도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는 지금의 사회주의 혁명이 소련 현실사회주의의 경로와는 많이 달라야 한다고 진작부터 생각해 왔기 때문에 옛날의 담론들에 대해 별로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다.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한 것만 기억할 뿐이다. 색씨는 어떤 활동가가 실력 있는지 여부는 “코민테른에서 말한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느냐 여부”로 판단하는가 본데, 나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타개전략을 제 머리로 찾아내는 것이 훨씬 주체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귀찮게 옛날 코민테른 자료를 뒤지고 싶지 않다. 색씨는 “연대사회론이 코민테른 것과 이러저런 점에서 다르군요.”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그것이 성경책이 아니잖은가. 훈고학을 즐기고 싶은가),

“연대사회론이 그 자체로서 이러저런 결함을 갖고 있다. 어때, 내 <논증>을 반박해 보세요. 용용 죽겠지”하고 말하는 것이 온당한 토론의 예절이다.


4. 색씨가 난데없이 ‘민중권력’을 성토하고 나선 대목에 대해 나는 좀 놀랐다. “연대사회론이 민중권력론이었던가?” 나는 연대사회 강령의 주된 부분의 작성자가 아니고, 이론통이 아니라서 강령집을 다시 뒤지면서 그 ‘단언’에 대해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엔엘피디알이 민중권력론이라는 단언도 새삼 살펴야 했다. 연대사회론은 엔엘피디알 이론과 한 통속이라고 색씨가 자꾸 늠름하게 단언을 하니, 좀 답답해졌다. 미국에 안 가 본 사람들에게 “나, 미국 다녀왔소. 거기 참 천국이요”하고 우겨대면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솔깃할 수밖에 없고, “연대사회론과 엔엘피디알 이론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누가 늠름하게, 끊임없이 외쳐대면 두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런가 보다’하고 멍하니 바라보겠지. 목소리 큰 사람이 장땡이듯이.


우선 엔엘피디알이론에 대해 ; 현실에서 ‘엔엘’과 ‘피디’로 두 정파가 각기 한 부분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장사들을 해먹고 있는 것도 문제이려니와,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스탈린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이라는 一國일국적 혁명틀에 갇힌 이론이라는 사실이다. 일국 혁명만 먼저 자꾸 생각해대니까 그 권력을 우찌 잡을꼬, 하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고, 그러려면, 즉 국가권력을 잡으려면 ‘정당을 만들어야 될낀데...’하고 정당론에 자꾸 빠져들고, 이 점에서 7년전부터 ‘우리, 정당 만들어요옹’하고 노래해온 노힘쪽만 문제 있는 게 아니라, “우리야말로 진짜 당을 만들어요옹”하고 뒤늦게 노래하고 나선 당건투 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국적 혁명틀에 갇혀 있기는 당건투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었는데(당건투 문건을 일일이 들여다본 것은 아니니까), 그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당건투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만,


그래서 연대 사회론은 ‘세계 혁명’의 관점에서 여러 나라 민중이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함께 나아간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인데(=색씨가 남의 말을 경청할 진정성이 있다면 자주통일 강령을 들여다 보기 바란다),

‘엔엘피디알 이론’과 다를 바 없다고 저렇게 늠름하게 자꾸 우겨대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한번에 왕창 폐절시킬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금세 길러질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고 언젠가 먼 훗날을 기다리며 손가락을 빨고 앉았는 것도 대책 없는 짓이고,

문제는 이행 과정이 더딜 망정 이 이행을 ‘스타트’시킬려면

지금부터 공산주의 높은 단계의 사회까지 동시에 추구해야지,

지금은 오로지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만 추구해야 하고,

높은 단계를 넘보는 것은 무모한 과격주의이고....

하는 식의 스탈린 기회주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열심히 말하고 있건만, 마이동풍, 우이독경... 귀를 꽉 막은 채,

“응, 쟤네는 2단계론이에요, 호호홋!”하고

색씨는 색안경을 끼고 섹시하게 웃어대고,

네에- 미이- 럴, ‘당건투’가 2단계 혁명론을 뛰어넘었다는 것에 대해서나 논증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싫으면 말고.

연대사회론이 2단계 혁명론이라는 것을 그렇게 자기 말하고 싶은 대로 '단언‘만 하지 말고

제발 부디 바라옵건대 “이러저러해서, 그것은 거시기”라고 ‘논증’을 해 주었으면 좋겠고,

물론 싫으면 말고.


5. 다음은 민중권력 // 강령을 토론할 때 ‘민중권력이 우리의 화두’라는 식의 토론을 벌인 적이 없는데, 난데없이 ‘민중권력’이 연대사회론의 키 워드라니??

정치강령에는 그 낱말이 어디 ‘중간 제목’으로 들어간 바도 없고, 다만 내용 서술의 한 대목에

“국가 소멸은 장구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창설되어 날로 강화되고 아래로부터 통합을 이뤄나가는 민중 권력과 기존 국가는 병존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민중 권력 강화와 국가기구의 혁명적 개조 과정에서 다양한 민중 부문에 대한 혁명적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자, 대관절 무엇을 딴죽 걸고 트집 잡고 싶어 할까? 색씨의 섹시한 말들을 약간 인용해 보자.


11) 민중이 권력을 잡느야, 아니면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고 있느냐는 아주 미세하여 무시할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혁명을 수행행 야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추성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서 민중, 쁘띠부르조아를 포함한 민중의 개념은 노동계급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들며, 투쟁의 성과를 부르조아에게 헌납할 수 밖에 만든다.


⇒ 노동자계급이 정치 권력을 잡은 뒤(...그러나 사회경제 영역에 대한 자본가의 영향력은 아직 완강하므로, 이중권력의 옥신각신을 벌여야 함...), 밑으로부터 ‘인민 자치’의 비국가기구들을 넓혀나감으로써 점점 국가 소멸의 길로 가자는 말을 했을 뿐이고, 거기서 ‘인민 자치’의 권력을 ‘민중 권력’이라 이름한 것인데

어째서 난데없이 “민중이 권력을 잡느냐, 다시 말해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 정권을 세우느냐, 독자적 정권을 세우느냐”하는 논란이 끼어 나오는가? 이것은 동문서답이고, 제 다리 가렵다고 남의 다리 긁는 일이고, 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난데없이 봉창을 두드리는 일이 아닌가? 어째서 이렇게 생각이 딴 생각으로 즉 상대방 공격하고 싶은 생각으로만 가득하여 ‘아무 얘기나 마구 끄집어내서’ 욕질의 근거로 삼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글이 아닌가?


22) 다음 글은 ‘점입 가경’이다.

“통일전선에서 이미  쁘띠 부르조아와의 연대를 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인 모습을 감추고 대주에게 함께하고자 외치는 대동단결론으로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신념으로 나가는 방법이 있으며, 이 방법은 어떠한 경에라도 노동계급의 발전될 소지가 없다. 두번째로는 계급적인 모습을 가지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모습으로서 의 연대 방법이 존재하지만, 두번째 방법은 쁘띠부르조아가 지배계급의 억압에 저항하고자 노동계급에게 도움을 어쩔수 없이 요청을 할 때 일시적으로 가능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이하고 주장하면서 언제라도 배반의 칼을 꺼낼수 있는 계급인 이해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적인 연대는 불가능 하다. 노동계급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그룹을 자신의 연대 세력으로 만들어 갈 수잇으며 그들은 부르조아가 매수가 가능하지만 그래도하나의 가슴으로 안아야하는 도시빈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농촡 프롤레타리아트, 농촌의 소농이 가능하다.”


⇒ 연대사회론은 ‘덮어놓고 대동단결론’이라는 함축을 담고 있으니 그 무례함이 법원에 ‘명예훼손’으로 걸고 싶을 정도다. 논리적 일관성조차 없는 뒤죽박죽의 생각이 표명돼 있다. 이를테면 “쁘띠부르주아가 도와달라고 손 내밀때는 계급연대가 일시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가 바로 뒤에는 “그들은 언제든 배반의 칼을 품고 있으므로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어떻게 그렇게 동시에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 설익은 계급연대 불가론은 연대사회론과 더불어 논하기에는 전혀 생뚱맞다.


색씨는 당건투의 이행강령을 무색하게 만드는 연대사회론에 대해 적개심이 끓어 넘치고 있다. “너희가 광을 내면 우리가 죽는다!” 그렇게 미움이 눈이 멀었으니, ‘인민 권력’ 또는 ‘콤뮨 권력’이라 표현할 말을 (아직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히 가시지 못한 이 사회에서) 일종의 ‘노예 언어’로서 ‘민중권력’이라 이름 붙인 것을

무슨 ‘계급 연합’의 문제로 착각해 버렸다.

그리고는 ‘옳닷구나’ 비방의 언어를 마구 부어댔다. “쁘띠 부르주아의 뒤꽁무니나 좇는 낙오 분자들아” “조급증에 사로잡힌 쁘띠 부르주아들아”하고 말이다.

당건투나 등등 ‘현장좌파’들이 노동운동 내에서 실질적인 뚜렷한 실천력을 강인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그 권위를 존중해서라도 “응, 아주 열심히 실력 있게 일해나가는 쪽에서 우리를 좀 경시하는 말을 하는구나. 좀 성질은 나지만 저들이 참 실력이 있으니 듣고 넘겨야지”하고 지나갈 수도 있겠다. 그저 ‘우리는 정당 만들겠네’하는 주장 하나로 행세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흉보는 것은 운동가로서 성찰해볼 태도가 아닐까. 연대사회론에 담긴 뜻은 “구 소련의 방식대로 일국 안에 갇힌 전위정당 개념 갖고 대단한 것으로 장사 해먹지 말고, 여러 나라 민중이 함께 해 나갈 실천의 방도를 진중하게 찾아보자”는 뜻이다. ‘당건투’라는 깃발도 다소 섣부른 깃발이라는 뜻도 함축돼 있다. 당건투 게시판에는 ‘만델’의 글도 번역돼 있는데, 그렇다면 일종의 ‘트로츠키주의’ 스펙트럼에서 일하는 그룹이 아닌가 싶은데, 세상에 제발 트로츠키의 ‘핵심’은 빼갖고 나와도 좋으니, 그것을 ‘-주의’로 섬기는 일일랑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색안경씨, “나는 토론을 하자는 거에요” 하고 강변한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은 뒤 ‘한번 대답해 봐라’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너, 이거 아니?? 이거와 저거가 어찌 다른지 설명해 볼래”하는 식으로 묻는 것은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서 묻는 질문이다. 그 협력 관계 속에서는 상대방이 귀찮은 질문을 해와도 “저 사람이 좀더 아는 것이 전체 운동에 기여하니까”하면서 번거로운 대답도 기꺼이 해주게 된다.

 글의 첫 모두에는 “연대사회론이 참신하군요”하고 마음에도 없는 인사말을 건네고는(=그래야 일단 글을 읽게 되니까)

 맨 뒤에 가서는 “이 낙오 분자들아”하고 막말을 일삼는 인간에게 친절한 토론을 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한 마디만 첨언하자. 옛날 코민테른의 개념과 맞느니, 안 맞느니 떠드는 것을 생산적인 논의로 착각하지 말자. 지금의 21세기 조건에서 ‘세계 전체’의 차원에서 어떻게 변혁 운동의 흐름들이 일어나고 집결해야 하는지, 하는 현실적인 실천 방도를 놓고서 토론하자. 그래야 상대방의 ‘좀더 나은 의견’을 기꺼이 수긍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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