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style="TABLE-LAYOUT: fixed"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 <tbody> <tr> <td vAlign=top>기아차 사태에서 드러나는 다함께의 대중추수주의 노선 비판<br /><br /><br />다함께는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의 점거파업과 그 이후의 통합에 대한 여러 주장을 제기했었다. 이에 대해 몇몇 비판들이 제기되었는데, 최근 다함께의 전지윤이 다함께에 대한 몇몇 비판에 대한 반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러한 다함께의 주장과 반론들은 여전히 다함께가 기아차 사태에서 드러낸 대중추수주의와 기회주의 그리고 지금까지도 운동 내에서 저지르고 있는 내부교란과 분란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더 나아가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기아지부의 관료주의를 비판하고 원칙을 옹호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초좌파적이라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으며 자신들보다 원칙을 강조하면 초좌익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운동의 중심에 서서 전략을 구사하는 듯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착각은 자유이다. 그리고 계급운동에 대한 비판은 언제든 가능하다. 그러나 다함께가 중심에 서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한 운동은 아마도 지금 남한 운동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와 개량주의 세력들의 운동일 것이다. 사실 다함께는 최근 몇 년간의 노동계급운동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노사협조주의세력의 2중대 역을 톡톡히 해왔다. ‘정규직의 위대한 연대’, ‘위대한 승리’라는 찬사를 남발하며 투쟁을 와해시킨 세력들을 두둔해왔다. 한편으로는 온갖 혁명적 문구를 들먹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 주류세력들의 개량주의와 기회주의에 봉사하여 왔다. 이번 기아차 사태에 대한 다함께의 기묘한 주장들은 그러한 역사성에 기초하고 있다. 다함께가 추구하는 운동은 무조건 다수 대중을 획득하는 것이다. 다수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것이 후진적 의식에 기초한 대중이라도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물론 우리도 역시 다수대중의 획득을 찬성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함께는 그것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다만 대중의 의식은 상황에 따라 급변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아마도 혁명기가 되면 다수대중을 흭득한 세력이 혁명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글은 전지윤의 최근의 글을 중심으로 그리고 다함께의 이전 주장들을 겸하여 비판한 것이다. <br /><br />다함께의 전지윤은 최근의 글에서 자신이 얼마 전 다음과 같이 말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br /><br />“지난 8월말에 기아차에서 전개된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이하 기아비지회)의 9일간의 점거 파업은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남겼다. <br />정규직·비정규직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려는 지배자들의 더러운 책략이 이 파업을 가로막았다. 현장 내 우파들은 이런 지배자들의 충실한 하수인과 구사대 노릇을 했다. <br />기아차정규직지부(이하 기아지부) 지도부는 우유부단하게 오락가락하며 이런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기아비지회의 투사들은 초전투적 태도로 정규직 현장조합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런 요소들의 결합 속에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br /><br /><br />다함께가 이번 기아비지회의 점거파업의 교훈을 찾으려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요소들을 지적하려 한 것도 역시 올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감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적 비판은 일면 그럴듯한 합리적 판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함께의 주장의 핵심은 여러 주장들에서 드러나듯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라는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회피하고 여전히 비정규직들의 초전투성(?)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br /><br />전지윤은 이어서 이들(노정협과 사노신)의 주장을 초좌파적 종파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다함께가 기아비지회 투쟁에 다수 연대했고 또 구사대에 대한 비판과 기아지부 대한 유감표명을 들어 자신들의 주장이 공정함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함께가 과거 올바로 주장했다거나 많은 수의 동지들이 집회에 연대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과거의 올바른 입장이 오늘의 올바름의 기준이 되 수 없다. 얼마나 많은 과거의 투사들이 오늘은 오류를 저지르고 노동계급을 배신하고 있는가? 또 집회에 대한 연대가 즉 관심과 애정과 참여가 곧바로 올바른 노선평가의 잣대는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함께가 많은 회원들이 연대했음과 기아내의 다함께 동지가 있음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혹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주장이 문제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br /><br />다함께는 기아지부에 대해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와 명예를 더럽히는 태도”라고 비판했음 등을 예로 들며 다함께가 기아지부에 대해 비판했다고, 즉 이 문제에 대해 공정하게 비판했다고 말하려 한다. 그러나 다함께는 이동우 부지회장 관련 비판글에서도 나타나듯이 너무나 뻔한 의미를 말꼬투리를 잡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진정이라 하더라도 다함께가 기아차 사태와 지금의 통합문제의 모든 책임을 비지회측에 지우려 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br /><br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음이다. 다함께는 기아 비정규직 점거파업이 ‘실패’라고 규정하면서 그 실패의 책임을 더 많은 대중, 즉 더 많은 기아 정규직의 공감을 얻지 못하게 만든 비정규직지회의 초전투적 투쟁에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이 초전투적 투쟁이란 말인가? 기아 비지회는 지난 3년간의 끈질긴 투쟁을 통하여 노동운동의 원칙을 지켜왔다. 금년 들어서도 원하청의 반복되는 노사합의 무시와 노조파괴에 대응하여 왔고, 분사와 해고위협 등의 사안을 가지고 원칙있게 투쟁하여 왔다. 그것이 초전투적이라면 다함께가 말하는 올바른 투쟁은 조합주의자들의 형식적 집회를 말하는 것인가? 다함께는 비지회가 초좌익적 전투성의 증거라도 되듯 이틀간의 점거파업 계획을 연장시킨 것을 들고 있다.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다함께가 주장하듯 이틀하고 끝내면 초좌익이 아니고 연장하면 초좌익이 되는 것인가? 또 점거파업을 연장시킨 것이 문제라면, 만약 당시 점거파업을 풀었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지회가 다시 연대하여 민주노조가 잘 되었을 것이라 말하고 싶은가? 참으로 기묘한 논리들이 아닐 수 없다. 다함께는 그렇게 비지회의 투쟁을 초좌익적이라 몰아가면서도 기아지부가 비지회의 투쟁에 연대하기는 커녕 직가입을 통해 비지회를 파괴하고 악선동을 통해 비지회를 비난하고 공격했던 것은 말하지 않는다. 비지회의 투쟁에 오히려 유감을 표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는 커녕 오히려 비난한 지아지부가 문제인가? 아니면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이 문제였는가? 다함께는 교묘하게도 2005, 2006년 많은 수의 정규직이 연대했던 점을 들어 그러한 연대했던 동지들이 올해는 연대하지 않게 된 원인이 비정규직지회의 초좌파적 투쟁에 있고, 그러므로 이번 파업투쟁의 실패책임은 초좌파적 비정규직지회에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다함께는 민주노조의 모든 원칙이 무너지고 변혁운동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진실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투쟁했던 동지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기아지부로의 통합을 비지회가 꺼렸다는 주장은 다함께가 주장하는 통합과 단결이 어떤 통합이고 단결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비지회는 처음부터 계급적 통합을 내세웠으며 이 주장이 올바른 것이었음은 기아지부가 비지회의 투쟁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태도들에서, 그리고 이후의 비지회에 대한 선거권 부결과 통합반대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결국 다함께가 말하려는 것은 그러한 민주노조의 원칙,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투쟁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비지회가 다수대중이 있는 기아지부에 왜 기꺼이 통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작게는 여전히 다수 대중이 있는 기아지부, 크게는 노동운동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운동 현 지도부와 그 세력들의 노선에 아부하고 추종하는 대중추수주의에 다름 아니다. <br /><br /><br />전지윤은 다함께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레닌과 맑스을 끌어들이고 있다. <br /><br />“혁명가들은 구체적 상황에서 투쟁 돌입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예컨대 맑스는 파리 꼬뮌이 벌어지기 전에는 부르주아 공화제에 맞선 파리 노동자의 봉기는 무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도 1917년 혁명 때 아직 소비에트에서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7월의 때 이른 봉기에는 반대했다. 물론 둘 다 막상 투쟁이 벌어졌을 때는 그것을 지지하면서 함께 투쟁했다.”<br /><br />그러나 다함께가 인용하는 레닌과 맑스의 주장은 혁명기가 무르익은 시기에 모든 것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 분명한 시기의 정세분석에 있어 여러 조건의 신중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함께는 마치 중요한 판단을 요하는 혁명적 시기의 문제에 대한 신중함을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의 현장투쟁에 적용하면서 그들이 이 정세와 조건에서 적절치 못한 전술을 취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다함께는 ‘전술’이라는 전술적 용어를 통해 비지회를 비판하면서도 이에 대한 기아지부의 보다 근본적 문제들, 민주노조원칙의 위배라는 더 큰 잘못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넘어가려 한다. 만약 다함께가 기아비지회라는 작은 소부대를 진정으로 비판하려면, 이를 지휘할 위치에 있는 기아지부, 금속노조, 민주노총과 전체운동의 지도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하고 난 다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함께는 운동 지도부에 지워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소홀하면서, 일개 소부대에 불과한 기아비지회의 처절한 투쟁에 대해서만 전술적 책임을, 그것도 가혹하게도 억지를 동원하여 물으려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의 답은 바로 다함께의 다수대중추수주의에 있다. 그것은 비지회를 재물로 삼아 자신들의 대중추수주의를 합리화시키고, 자신들의 노선을 통해 다수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br /><br />전지윤은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인용하며 ‘비록 노동조합이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아지부에 들어가서 활동하면 될 것인데, 왜 비지회는 이를 거부하느냐 하면서 이를 좌익소아병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비지회가 엄연한 통합의 주체로서 주장하는 계급적 통합의 주장이 다함께에게는 단순한 통합거부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계급적 통합의 원칙에 대해서 기아지부가 진지하게 검토했다면, 그리고 그 전에 기아지부가 비정규직 투쟁에 원칙적으로 연대하고 신뢰를 보여주었더라면 그것은 적절하게 조정되었을 것이다. 다함께는 원칙을 위배하고 신뢰를 상실한 기아지부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계급적 통합의 원칙을 핑계삼아 통합 부결을 결정한 기아지부의 결정에 대해서까지 비지회의 책임으로 몰고 있다. 이것이 다함께의 원칙이다. 대중추주수주의라는 원칙. 그러나 그러한 다수대중추수주의는 최근 몇 년간 보여준 민주노조운동의 몰락에서 보여주듯 운동을 상승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다함께가 흠모해마지 않는 ‘정규직노조의 연대로 인한 위대한 승리’라고 찬양해마지 않던 그 많은 투쟁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노동계급운동은 대중에 대한 환상 뿐만 아니라 역으로 대중에 대한 불신이 있어서는 안된다. 또한 대중들에게 환상을 유포하거나 반대로 대중들에게 절망을 주는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다함께가 볼 때 다른 조직은 대중을 불신한다고 보는 모양이다. 대중에게 절망을 주고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다함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에게 환상을 갖는 것이고 또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오직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정확히 알리고, 무엇이 원칙이고 무엇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노동계급을 향해 비판과 충고, 격려와 주체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혁명조직이라 자처하는 조직의 임무일 것이다. 거기서 누구를 비판하고 누구를 격려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이것을 혼돈한다면 그것은 혁명조직이 아니라 혁명의 길을 방해하는 자로 전락할 것이다. 전술을 운운하며 원칙이 아니라 다수대중 획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야말로 더 논할 대상이 아니다. <br /><br />다함께의 전지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br /><br />“더구나 기아지도부는 반동적 노조라기보다는 대표적인 한국의 민주노조이고, 기아지부 지도부도 반동적 우파 관료가 아니 상대적 좌파 지도부인데 말이다. <br />이런 태도에 대해 기아차의 우파 현장조직 지도자들이 감사하고 있을 것도 분명하다. 이들은 기아비지회의 투사들이 기아지부로 가입해 들어와서 현장조합원들 속에서 투쟁을 선동하고 조직을 건설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혹시라도 기아비지회 투사들의 마음이 바뀔까봐 다음 대의원 대회 때 직가입조차 불가능하게 규약을 바꾸려 한다. “<br /><br />다함께는 기아지부가 반동적 우파관료가 아니라 상대적 좌파라 말하면서 지부통합의 부결에대해 우파들의 감사하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합부결의 책임이 비지회와 기아지부를 비판하는 세력들에 있음을 암시하려 한다. 물론 우파들은 통합부결에 대해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비지회는 기아지부에 무조건 통합했어야 한다고 비약하는 것은 노무현을 비판하지만 딴나라가 미운 놈이니까 노무현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은 후진적 의식에의 영합을 거부한다. 무조건 기아지부에 들어가서 활동을 통해 기아노조를 변화시키면 되니 않느냐고 다함께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미 원칙을 거부하고 신뢰를 상실한 기아지부에 굴복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다함께가 말하는 ‘상대적 좌파’라는 자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태도를 볼 때, 그 속에서 민주노조 원칙을 살릴 수 있겠는가? 그 굴복은 더 많은 비지회 투사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상실하는 것이 될 것이며, 기아비지회의 투쟁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돌려지게 될 것이다. 다함께가 진정으로 기아지부의 통합을 원한다면, 다함께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비지회를 초좌익 세력으로 몰고 가는것이 아니라 기아지부와 금속노조를 비판하고 운동의 원칙을 회복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칙 있게 투쟁한 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덪씌우려는 태도는 다함께의 대중추수주의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최악의 사건이 될 것이다. <br /><br /><br />“이것은 기아비지회의 투사들이 마땅히 움켜줘야 할 황금 같은 기회였다. 조합원이 3만 명이라는 한국 최대의 민주노조 중 하나에 들어가서 조직할 기회를 마다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혁명가일 것이다.” <br /><br />다함께의 전지윤의 위 말은 지금 우리가 다함께에 하고 싶은 다음과 같은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br /><br />“이번 사태는 민주노조 원칙을 저버리고 개량주의와 관료주의로 추락하고 있는 기아노조와 금속노조를 민주노조로 추동하는 황금 같은 기회이다. 과거 민주노조의 원칙을 대체로 유지했다고 다함께가 평가하는 3만의 기아 조합원들을 민주노조운동으로 이끄느냐 아니면 반동적 조직으로 추락하도록 하느냐하는 기로점에 서 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혁명가라 자처하는 자들이 대중에 아부하고 미화하며 이를 방치한다면, 그들은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 추락의 길로 같이 추락하게 될 것이다.”<br /><br /><br />이번 기아비정규직 사태에서 다함께가 보여주고 있는 노골적인 ‘대중에의 아부와 굴종’은 단순히 다함께를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지금 진행중인 기아차 조직통합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전히 조직통합이 안 되는 책임이 기아비정규직지회의 초전투성에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반면, 반대로 그들은 이번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점거파업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일련의 문제에 직접적이고 거의 전적인 책임이 있는 기아지부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정도의 표현으로 한정하고 있다. 다수 대중이 있는 기아지부에 대한 면피성 비판,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고 열악한 기아 비정규직지회의 원칙적 투쟁에 대해서는 초전투적이고 초좌파적 투쟁이라 몰아붙이며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으려는 다함께의 후진대중추수주의는 변혁의 도구가 아니라 변혁의 장애물로 역할 할 수 있음을 감히 충고한다. <br /></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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