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은 계급과 대립되는 개념인가
인간은 반드시 집단 속에서 인간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이같은 인간집단, 사회적 집단은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민족별 구분과 계급적 구분이다. 그래서 인간은 계급성과 민족성을 함께 갖는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기존의 이론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집단 가운데서 재산과 직업,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나뉘어지는 자본가, 노동자, 농민과 같은 인간집단인 계급을 중시해 왔었다.
계급은 지구상에 인류가 발생해서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노동 도구의 발전 등에 의해서 인간사회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생기게 됨으로써 발생했다. 이때부터 인간사회는 가진 자들의 집단인 지배계급(혹은 유산자계급)과 못 가진 자들의 집단인 피지배계급(혹은 무산자계급)으로 나뉘어지게 되고 양자의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압박과 피압박의 관계, 다시 말해서 서로 융합될 수 없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 적대적 모순은 인간이 신분이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로 나뉘었던 봉건사회가 멸망해서 자본주의에로 넘어가서부터 더 첨예화되게 되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같은 자본주의 사회를 뒤집어엎고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를 만들 것을 지향했는데 그 방도로서 계급투쟁을 택했다. 때문에 그는 인간관계를 모두 이 원리에 기초해서 봤으며 그의 뜻을 이은 고전가들도 또 하나의 인간집단인 민족의 이익을 어디까지나 계급투쟁, 그 선두에 서는 무산자계급의 대표자격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복종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이 민족주의에 대해서 그 진보성보다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서 이용되었던 측면만을 보거나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 외세와 맞서 싸운 저항민족주의를 계급투쟁의 일시적 동반자로만 대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20년 전에 당시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고인)이 방북했을 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정 명예회장과 이 계급을 가장 미워하고 반대하는 사회주의 북한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한 사실을 보고, 특히 정 회장을 자기들을 착취하는 장본인으로만 알았던 한국의 노동자들은 모두 의아해했었다. 또한 계급적 구분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같은 무렵 문익환 목사(고인)가 방북했을 때도 문 목사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는 사회주의 북한의 수반과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다. 결국 이같은 혼란은 인간이 계급성과 함께 갖는 민족성을 보지 못함으로 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적 집단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계급과 민족의 관계에서 계급이 진짜로 민족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민족의 이익은 꼭 계급의 이익에 복종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 발생보다 훨씬 이전에, 혹은 계급이 발생하기 이전에 형성되었던 민족이라고 해도 그 안에 계급이 발생한 이후부터는 자기 이익을 오직 그 계급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기이한 상호관계에 저절로 구속되게 된다는 결론에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아마 우리 역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 지난 임진왜란 때 지배계급에 속하는 왕족이나 그 측근들은 도망치기에 바빴으나 조선의 백성들은 그들을 따라서 함께 도주하지 않고 오직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왜군과 끝까지 맞서 싸웠던 사실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또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우리 민족내의 모든 계급들에게 예외 없이 식민지 망국노의 운명이 주어졌던 사실은 또한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겠는가? 선행 이론에 교조적으로 매달리다가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결국 어떤 계급이나 계층도 민족이라고 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운명공동체 내의 일부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들은 민족의 이익을 떠나서 자기 이익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란 어떤 계급의 일원이기 전에, 또한 무슨 주의자이기 전에 민족의 일원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필자가 이 글에서 제기한 ‘민족과 계급은 대립되는 개념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도출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의 운명속에 계급의 운명 나아가 개인의 운명이 있고 민족의 전도를 열어나가는 속에서 계급의 운명,개인의 운명도 가꾸어 갈수 있다는 것이다.
정 명예회장이나 문 목사는 자신의 계급적 입장이나 종교신앙을 버리고 북한의 사상, 체제에 동조해서 방북했겠는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계급이나 이념을 초월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적 이익을 위하는 일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몽양 여운형선생이 강조한 말 가운데 ‘혈농어수(血膿於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피는 곧 민족이며 물은 곧 이념이라고 한다. 결국 여운형은 민족은 이념에 앞선다는 것과 함께 핏줄을 같이 하는 동족간의 친화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시각에서 민족주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자.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그 이익을 지키려 하고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지향하는 것은 단지 정 명예회장이나 문 목사에만 한한 이야기가 아니라 민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이자 지향인데 민족주의는 결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이를 반영한 이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최대의 애국이자 애족이지 결코 반역은 아닐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