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발언] 민경우씨의 ‘정권 퇴진론 비판’에 대해
허무적 냉소에 의존한 ‘주류 운동권 비판’은
역효과만 낼 것
<통일뉴스>의 민경우 전문기자가 또 한 번 실망을 안겨줬다. 지난달 27일자 <통일뉴스>에 실은 <민주노동당의 ‘이명박 정부 퇴진론’에 대해>라는 글에서 “정부 퇴진론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며 찬물을 끼얹고 나선 것이다. 진보와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부터 <통일뉴스>의 성장을 기원해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특히 민씨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동지로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됐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후 사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겠다.
지난 6월 20~21일 민주노동당은 부산에서 한국 정당 사상 최초의 ‘정책당대회’를 진행했다. 완벽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회 후 민주노동당은 ‘단결과 전진의 한마당으로 어우러진 제1회 정책당대회’라는 평가서를 내기도 했다. 이번 정책당대회는 지난해 3월에 발표한 ‘혁신-재창당’ 방안에 따른 것으로, 국민과 당원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켰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루하고 딱딱하기만 한 당대회’를 2천여 명이 참여한 교육과 축제의 장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민경우씨는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 전반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대회 선언문’에서 “앞으로 MB정권 퇴진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밝힌 부분에 집중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 현 시점에서 정권 퇴진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민주노동당이 주력할 일도 아니라는 게 민씨 주장의 요체이다.
의도된 오해인가, 성마른 실수인가
<통일뉴스>에 올린 글에서 민경우씨는 “진보진영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을 천명할 때는 주객관적 정세에 대한 엄밀한 판단이 전제돼야 한다”면서 ‘이명박 정부 퇴진론’의 가능성 여부를 타진한다.
이명박 정부를 퇴진시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는 없다. 하나는 대통령 탄핵을 통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전민항쟁을 통해 퇴진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후자는 어떠한가?
… 현 상태로 보면 장기불황에 접어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렇게 되면 대중의 거리 진출은 오히려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정권 퇴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민씨의 주장에서 치명적인 허점이 발견된다. ‘퇴진’을 ‘타도’로 오해한 데서 출발했다는 게 그 첫째다.
‘퇴진’과 ‘타도’는 ‘반정부’와 ‘반국가’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념이다. ‘반국가’가 국가체제 전체를 부정하고 ‘체제 전복’을 도모한다는 뜻이라면 ‘반정부’는 국가체제를 부정하기보다는 현 정부를 반대한다는 의미이며 ‘정부 교체’ 요구와 ‘국정기조 변경’의 요구를 모두 담을 수 있는 포괄적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정권 퇴진’은 현 정권에 대한 강한 거부 의사의 표현이지 ‘정권 타도’를 명시하는 것이 아니다. ‘장관 퇴진’ 요구로 정부 정책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대학 당국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총장 퇴진’을 외칠 수 있는 것처럼 정권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퇴진’ 구호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퇴진’과 ‘타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이걸 오도하면 안 된다. 그런데 민경우씨는 민주노동당의 ‘MB정권 퇴진론’을 ‘타도론’과 등치시킨 상태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러니 정권퇴진 운동 을 통한 국정기조 변경의 가능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정치적 주장으로서의 ‘퇴진’은 꼭 ‘정권 해체’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정부의 국정기조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퇴진론’에서 ‘정권 해체’만 떠올리는 것은 유치하고 단선적인 소견을 보여준다. 의도된 조작인가, 아니면 ‘비판’에 급급하다 나온 실수인가?
‘행동하는 양심’ 호소한 김대중
“제도권 원내정당으로서 그렇게 과격한 주장을 하면 되느냐”는 지적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원내정당이 ‘정권 퇴진’을 말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시국이 그만큼 절박하고 MB정권이 너무나 몰상식하다. 취임 1주년을 맞은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정권 교체’를 강하게 천명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상식 있는 모든 이들이 민생, 민주주의, 남북관계의 ‘3대 위기’를 말한다. 멀쩡한 생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 전직 대통령을 절망으로 내몬 결과로 벌어진 서거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사과 한 마디조차 아까워한다. 검찰과 보수언론은 물 만난 듯 설쳐대고 경찰은 시국사범 검거 실적을 노린 ‘100일 전투’에 나섰다. 정부는 ‘100만 해고설’ 입증을 위해 해고 자작극을 벌이는 한편으로 ‘4대강 정비사업’에 전력하고 있다. 국민의 70% 가까이가 이 정권을 반대하고, 노구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민씨는 “민주노동당이 ‘정권 퇴진’ 구호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가 말한 ‘주객관적 정세에 대한 엄밀한 판단’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횡설수설하는 고장난 스피커
민경우씨의 글을 읽다보면 소심한 방어 대책을 깔아두느라고 논리적 일관성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락가락하다가 갑자기 비약해서 떡 하니 무리한 결론을 내놓고 시침떼는 식이다.
(국민들 속에서) 헌정 질서에 대한 존중감이 상당 부분 안착화되어 있기 때문에 헌정 질서를 뛰어넘는 전민항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전민항쟁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경제상황이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하거나 전민항쟁 이외에 다른 여지가 없을 때는 거리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심각한 경제위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현 상태로 보면 장기불황에 접어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렇게 되면 대중의 거리 진출은 오히려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헌정 질서에 대한 존중감’을 내세워 “전민항쟁은 어렵다”고 했다가, “다른 여지가 없을 때는 거리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며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조건부로 인정했다가, 다시 “장기불황 때문에 대중의 진출은 오히려 축소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건 논박에 대비해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한 장치다. 차라리 “지금 시절에 웬 전민항쟁?!”하고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 게 더 낳을 뻔했다.
이 대목에서 묻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장기불황으로 가면 대중의 거리 진출은 오히려 축소된다’는 법칙(?)은 누가 내놓은 이론인가? 지난해 있었던 100만명 촛불시위와 올해 ‘서거 정국’에서 주목받은 500만 추모 인파는 호황기, 경제 성장기라서 가능했다는 얘기인가.
상황을 종합하면 민주노동당의 이명박 정부 퇴진론은 다분히 정치적․선언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제도권 정당이 이런 유의 선언적 천명을 반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의 선언을 상황의 엄중함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늘 있었던 또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민씨는 “국민들이 이벤트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주관적 예단을 근거로 “정권퇴진 선언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퇴진론’의 정치적․선언적 성격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 아님을 민씨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정권퇴진 선언에 대해 국민들이 시국에 대한 ‘엄중 경고’로 받아들일지, ‘또 하나의 이벤트’로 받아들일지는 객관적 통계조사가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일 뿐이다.
황당한 궤변은 계속된다.
‘이명박 퇴진’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는 하나마나 한 소리이다. 국민대중 대다수가 민주노동당이 이명박 퇴진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당연한 주장이다.
용산참사가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얘기를 다시 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진보신당이 진보적 입장을 갖고 있음을 국민 대다수가 안다고 해서 진보신당이 더 이상 ‘진보’를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민주노동당이 평소 ‘반이명박’ 기조를 분명히 해왔기 때문에 당대회를 계기로 ‘정권퇴진운동’을 선언해 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단정해 버리는 민씨의 ‘과감한 판단’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도시 지식인과 중간층이 가장 전투적”
민경우씨는 “각계각층의 동향”을 들어 “현 시기 조성된 역량 관계”를 분석해주는 친절함(?)을 보인다. 여기서 민씨 주장의 또 다른 허점이 드러난다.
현재 반이명박의 가장 전투적인 부대는 대도시 지식인과 중간층이다.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집단은 민주당 또는 친노그룹이거나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이다. 반면 조직화된 민중운동진영은 침체해 있고 중서민 대중은 정치적 행동보다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감정으로 분을 누르고 절박한 생계위협 앞에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운동의 정치적 성과는 대체로 민주당, 친노, 참여연대 등으로 수렴될 것이다. 진보진영 일부에서 제2의 6월항쟁 운운하며 상황을 평가했던 것은 한탕주의적 발상이거나 자신이 집중해야 할 정치적 지지기반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소부르주아적 급진성(1980년대 운동권 사투리)의 표현이다.
민씨는 여기서 “(‘정권 퇴진론’은) 현 시기 조성된 역량관계에 비춰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희한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뜬금 없이 ‘글로벌 대기업’(삼성전자와 현대차, 엘지 등을 의미한다 - 필자)의 장밋빛 미래를 늘어놓더니 “현재, 정권에 적극 저항하는 계층은 대도시 지식인과 중간층”이라고 ‘용감하게’ 규정한다. 그리곤 “조직화된 민중운동진영은 침체”돼 있고 “중서민 대중은 절박한 생계 위협 앞에 극도로 위축돼 있다”고 진단한다. 결국 민씨는, 진보진영은 침체돼 있고 서민대중은 먹고살기 바빠서 정권퇴진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
‘대도시 지식인과 중간층이 가장 전투적’이라는 기이한 해석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화염 속에서 경찰특공대와 사투를 벌인 용산 철거민들은 지식인이었나 아니면 중간층이었나? 사측이 고용한 일당 24만원의 용역들과 육박전을 벌인 쌍용차 노동자들은 ‘생계 위협 앞에 위축된 서민층’이 아니었던가? 민경우씨처럼 골방에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된다.
‘한탕주의적 발상’, ‘소부르주아적 급진성’이라는 표현에 민씨 주장의 핵심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용어사용도 부적절하고 논리도 빈약해 과거 그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주류 자민통 비판’의 최신 변형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소설가로 거듭나려 하나
민경우씨 주장의 백미는 ‘반이명박 전선 분열론’에 있다.
보수진영이, 첫째 이명박 대통령에 집중된 뇌관을 제거하고 탈이명박 정서를 갖는 의외의 인물을 선발하고, 둘째 소통의 부재․민주주의 등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셋째 초글로벌 기업으로 선전할 수 있다면 반이명박 전선은 여러 갈래로 분열될 것이다.
소통 부재, 전임 대통령의 충격적인 죽음, 지역차별과 같이 느슨하게 묶여 있던 집단은 분화될 것이고 대도시 중간층은 보다 전투적인 부분만 남아 적극적인 행동전에 나서며, 경기침체에 고통받는 중서민 대중은 다시금 보수세력에 기대를 걸 것이다.
앞뒤가 안 맞는 비문이 섞여 있어서 혼란을 주긴 하는데, 요약해보면 이렇다. “보수진영이 이명박을 대신할 다른 인물을 내세워 반이명박 전선의 빌미를 제거하고 ‘서민 회유책’을 내놓으면 ‘느슨하게 묶여 있던’ 반이명박 전선은 당장에 분열되고 말 것이다.”
촛불 정국과 노무현 서거 등을 거치면서, 야당 구실 못하던 민주당이 ‘반이명박’ 기조를 강화하고 야 4당과 시민사회세력을 포괄하는 ‘반MB연대’가 중심기조로 자리잡히고 있는 상황에서, “전선의 분열”을 ‘신념’에 찬 어조로 강변하는 민경우씨는 이제 정세평론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방향으로 ‘이직’을 도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 글을 통해 보수세력에게 정국 해법의 힌트를 제공하려 했던 것인지, 진보진영에게 겁을 주고 싶었던 건지 필자로서는 그 의도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다만 민씨 자신이 사회지배층에 대한 공포와 패배감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껴진다. “어쨌든 나라 전체의 파이를 키우고 있는 것은 글로벌 대자본”이라거나 “거대한 철벽”을 운운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흐려지는 좋은 기억들
결국 민씨는 “정권 퇴진론은 효과를 볼 수도 없을뿐더러 잘 되더라도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것이니 그만두자”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이런 얘기는 부모님들이 운동권 자녀들을 말릴 때 늘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잘 돼도 너만 다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
“중서민층 포섭이라는 지루하고 고된 작업을 무시한다”, “다수파의 선명성을 과시하는 행동에 집착한다”며 민주노동당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민경우씨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민주노동당이 중간층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게 옳다는 것인가. 이명박 퇴진을 주장하는 게 과연 서민대중의 요구에 반하는 일인가. 노동자․서민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으로서 시국의 요구에 따라 반이명박 전선 강화에 복무하는 게 왜 그리도 못마땅한가. 더 솔직히 말하면, 민주노동당 다수파, 이른바 ‘주류 자민통’에 대한 민씨의 거의 맹목적인 반감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민경우씨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갖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990년대 중․후반, 그 시절의 민씨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의 선배’였다. 숱한 논쟁의 와중에도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북-해외 3자 연대’의 원칙을 고수한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이었고 정권의 압박과 회유를 끝까지 거부한 ‘청년 양심수’였으며 대학생 활동가들에게 ‘참된 삶과 운동’을 조근조근 들려주는 ‘강사 형님’이었다. 1999년 말, 재야 원로들의 천막농성이 진행되고 있던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7살 난 아들과 뛰어 놀며 뒤늦은 아빠 노릇에 행복해하던 그의 해맑은 웃음을 기억한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와 글을 통해 다시 만난 민경우의 이름에는 여러 가지 ‘꼬리’가 달려 있었다. <통일뉴스> 전문기자, <새세상연구소> 비상임연구원, <소통과 혁신 연구소> 연구위원….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에게 그처럼 많은 ‘꼬리표’들이 꼭 필요한 것인지 필자는 모르겠다. 연구원과 기자… 한 우물만 파도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쉽지 않은, 성격을 달리하는 직함들을 여러 개씩 달고 사는 그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정부 부처와 재벌그룹 경제연구소 사이트를 넘나들며 구체적인 통계와 실증자료를 찾아내고 서민들의 생생한 실태에 눈을 돌린 과거의 운동 선배가 신선해 보였다. 기존의 이론과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천착해 시야를 넓히며 나름대로 창의적인 생각들을 꺼내놓는 모습은 여러 모로 자극이 되었다. 계파 관념에서 벗어나 ‘운동권 주류’의 치부를 들추는 내부 비판자로 나설 때도 그 과감한 문제제기와 애정 어린 충고가 반가울 따름이었다.
‘주류 물어뜯기’에 지쳐 가는 함량 미달의 논객
그런 민경우씨였지만, 갈수록 실망과 안타까움이 더해 가는 것을 감출 길이 없다. ‘전문기자’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도 기본적인 맞춤법이나 논리적 정합성조차 무시하고 비문과 오타를 남발하는 ‘기초체력의 한계’를 구구히 거론하지는 않기로 한다. 진짜 문제는 ‘참신한 문제제기’에 대한 집착에 빠져 현실 왜곡, 비논리의 궤변이 조금도 걸러지지 않은 채 구린내를 풍기고 ‘건설적인 대안과 모범’ 대신 ‘주류 자민통’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애용하는 ‘도발적 언사에 기댄 논쟁적 말 걸기’ 방식은 초기 활동에서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역효과만 낳고 있다. 낡은 관념과 관성에 사로잡혀 혁신하지 못하는, 점차 대중과 괴리되어 고립의 길로 치닫는 ‘운동권 주류’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현실을 보라”고 설득하던 애정과 선도적 모범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한국진보연대>의 국회 앞 농성투쟁을 놓고 벌어진 ‘민경우-정대연 논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주류 자민통의 한계’가 아니라 ‘민경우의 한계’였다. 당시 <진보연대> 정책위원장이었던 정대연씨는 이렇게 지적했다. “진보진영의 치명적 약점을 지적해서 까발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칫 진보진영 활동가들에게 패배감, 허무주의를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민 동지가 심각하게 돌아봤으면 좋겠다. … 너무나 ‘당연한 문제’를 자신만 아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초기의 ‘충격요법’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민경우씨의 비판처럼 ‘주류 자민통’이 현실의 변화발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관성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씨의 ‘비판적 관점’이야말로 낡은 것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장의 대중 속에서 온몸을 던져 소리 없이 변화를 일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변화를 보지 못하는 주류’를 성토하던 민씨 자신이 변화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역설이 허탈감과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민씨 특유의 독창적 시각과 언변에 성실성과 건설적 모범이 덧붙여졌다면, 진보운동이 벌어지는 각처에서 가랑비에 옷 젖듯 전면적 혁신이 일어나는 데에 크게 일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목소리만 키우는 ‘고장난 스피커’로 전락되기보다는 진보운동을 떠받치는 거인의 모습이 되어 나타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민경우씨는 진보진영의 혁신․강화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역효과만 내고 있는 글쓰기를 진지하게 재고해보기 바란다. 자중과 성찰이 필요한 때가 왔다는 것이다.
미래의 좋은 기억을 위한 당부
과거의 훌륭했던 한 운동가가 변질, 퇴색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씁쓸한 일도 흔치 않다. 한 운동가의 조락은 당자에게도 불명예이지만 진보운동에게도 손실이기 때문이다.
민경우씨가 먼 훗날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만족적 우월감과 냉소, 손에 잡히는 결과만 바라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기자’ 직함을 유지하고 싶다면, 충분한 실증과 사색을 전제로 글을 쓰기 바란다. ‘연구자’로 살겠다면, 주관적 추정이나 감정적 대응과 결별하고 더 많은 공부와 실천에 목말라하기 바란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양심과 책임감, 헌신적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민경우씨나 우리 모두가 믿고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의사표현의 자유는 있다. 하지만 그만한 책임도 따른다. 자신의 말과 글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운동가라면, 시대를 선도하고 싶다면,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주류 물어뜯기’에 매달림으로써 ‘주류’가 되려고 하는 이에게는 ‘아류’의 오명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책임질 줄 모르고 투정만 부리는 것은 철부지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공식직함’과 허황된 ‘명성’이 아니라, 치열한 자기비판과 각고의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진실성’과 ‘내공’을 믿어야 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쓰기로 작정했다면 ‘자민통의 미네르바’가 되어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창조와 생산을 위한 비평, 혁신과 전진을 위한 대안을 쏟아내는 민경우씨를 보고 싶다. 얼마 전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람들의 아낌없는 추앙을 받은 것은 그가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