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용 詩集『하늘공장』해설】 그는 말했다, 이젠 심장을 머리에 담자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임성용의 시집원고를 받고 우연찮게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바쁜 일정을 보낸다. 발문이 미뤄지고 시집 발간이 늦어지고 있는 중이다. 생전 그래보질 않았으니 나로서도 부담이다. 시간을 내야지 하면서도 좀체 줄어들지 않는 일! 임시인과 발문을 부탁했던 점잖은 박일환 시인의 선한 눈이 떠올라 미안해 죽겠다. 그러던 중 간신히 시간을 내어 하룻밤을 꼴딱 샜다. 물론 시집 한 권 분량을 읽는데 하룻밤이 걸리지는 않는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을 빼고 읽으면 두세 시간이면 족하다. 그런데 이번 시집 원고는 그런 나의 일상적인 독법을 불허한다. 마치 읽는 내내 임성용 시인으로부터 ‘너는 무엇하고 사는가!’, ‘너는 그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너는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문초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밤새도록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고 새벽녘에야 읽기를 끝냈다. 출근을 위해 일어난 처는 같이 잠자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 그래서 잠시 사정을 이야기하고 원고의 시 한 편(「그림일기」)을 보여주었다. 아직 잠결이지만 도대체 어떤 시인지 궁금해하며 읽던 처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거 다 읽으면 운전 못할 것 같네.” 그랬다. 시집 원고를 읽는 내내 잠이 달아났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이게 세상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도대체 그 하기 좋은 말인 ‘시적 응전(應戰)’이라는 말이 뭘까 하는 생각도 하고, 좋은 세상을 위한 그 많은 관념어들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수없이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체험과 시적 경험을 넘어선 작품들이기에 내가 뭘 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나는 쓴다. 임성용 시인이 꼭 써 달라고 해서! 내가 만만한가 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시인이 나를 만만하게 보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1. 그는 말했다. 사상은 내 몸에 있다고 한때 번창하던, 이 세상을 크게 조망하며 ‘세상은 이렇게 변할 것이니 너희들은 준비할 지어다.’ 라고 말했던 희망사업이 왕창 망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들의 기획안이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했다고, 낡았다고, 입만 나불거렸다고, 너무 단순 무식했다고, 그러니 더 발빠르게 연구하자고, 번역하자고, 다른 틀을 갖자고. 하지만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람들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희망이란. 희망을 파는 장사꾼들이 더 많은 이윤을 챙기려고/ 우리에게 하루라도 손해를 참으며 살아가라고/ 달콤하게 던져주는 미끼에 불과하다.”(「살아가라, 희망 없이」에서). 물론 나도 그런 희망 파는 축의 하나였을 것이다. 요런 나에게 시인은 한 방 먹인다.
유리집 기사가 유리를 자른다 한쪽 팔목이 없지만 능숙한 솜씨로 재단칼을 놀린다 묻지마라, 그의 손놀림 앞에서 어찌하여 불구가 되었느냐고 잘린 유리보다 날카롭게 빛나는 똑바로 일직선을 바라보는 저, 숨이 멎는 집념과 집중 오로지 그 눈빛을 바라보아라 -「유리공」전문
그는 말했다. 사상이란 것은 저기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몸, 네 노동의 육신에 아로새겨져 있으니 네 몸에서 찾아봐. 그러면 네가 왜 망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될 거야. 저 유리집 기사를 봐. 저이는 한쪽 팔목이 날아갔어. 왜 날아갔는지 이유를 묻고 분노하고 동정하고 칭송하고 그러지 말아. 너는 다만 저 한쪽 팔목에 관한 역사가 나머지 한쪽 손의 “능숙한 솜씨”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족해. “잘린 유리보다 날카롭게 빛나는/ 똑바로 일직선을 바라보는/ 저, 숨이 멎는 집념과 집중/ 오로지 그 눈빛”에 들어 있는 사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족해. 왜냐하면 말야, 사상이라는 것은 희망사항이 아니라 삶 그 자체거든. 저 눈빛이 되기 위해 그를 스쳐간 세월만이 저 눈의 사상이 되거든. 저 눈빛이 환호할 수 있는 사상 말야, 사상이란 건 저 몸이 보낸 세월의 정수리에 놓여 있거든. 그의 눈빛이 잘린 유리보다 날카롭게 되듯이, 사상이란 그 몸이 살아낸 삶이 그 눈빛처럼 되는 거야. 그러니 딴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아. 워낙 사상이라는 것은 머리 위에 올려놓으면 요물이 되는 거야. 그럼 인간은 뭐가 되겠니? 요괴가 되지. 사상이란 몸인 거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 사상이란 몸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군! 나도 옛날에 안경알을 깎느라고 유리칼질을 해봤다. 힘의 균형을 잃으면 금을 긋다가 깨지고, 힘 조절을 못하면 금이 그어지지 않고 미끄러진다. 금을 그은 데로 자르려고 할 때도 순간적인 힘 조절과 균형은 중요하다. 잘못하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온몸이 긴장하면서도 부드러워야 한다. 이를 말로 듣고 실행하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디얼하게 구상을 하더라도 안 된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사상이 아니다. 아니, 사상이란 불립문자다. 그것은 몸 속에서 더 큰 몸으로 거듭나는 무엇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뭐 새로운 것을 다시 만들자고 하지 않는다. 쓰여졌던 것, 그러나 외려 버려진 철근들을 모아 곧은 진실로 펴자고 말한다.
흙먼지 기름때 낀 눈물을 부어 피도 땀도 메마른 모레를 섞어 벽돌을 쌓는다 반평생 무너지고 무너진 벽돌집 물풀처럼 흔들리는 배신의 지반 위에 연약한 뼈대를 또 세운다 다만 십 수년의 경험과 어리석은 절망으로 어차피 뜯어낼 형틀에다 못질을 하고 싶지는 않다 희망이라는 또 다른 거짓 이름으로 억지로 옹벽을 만들 필요는 없다 버려진 철근들을 주워 모아 곧은 진실로 펴고 불에 달구어서 백년 동안 녹슬어도 좋을 기둥을 박아둬야지 참으로 어렵게 사람 노릇 끝내는 날 낡은 공구통이 내 관(棺)이 될 그날을 위해 -「착공」전문
“희망이라는 또 다른 거짓 이름으로/ 억지로 옹벽을 만들 필요는 없다.” 맞다. 희망장사꾼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한 명의 노동자가 노동계급이 되기 위해 그의 몸으로 받아낸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혜다. 그 지혜를 모으기란 무한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들은 단기간에 한탕 쳐야만 하는 약장사처럼, 혹은 명품으로 치장한 번듯한 사기꾼처럼 희망과 옹벽을 말한다. 하지만 알아라! 이제 우리가 살 집은 “십수 년의 경험과 어리석은 절망으로” 터득한 지혜로, 우리 스스로뿐이 지을 수 없는 집이다. 그 자재(資材)도 우리의 피눈물과 해체한 옹벽에 박혀 있던 철근들을 사용해야 한다. “버려진 철근들을 주워 모아/ 곧은 진실로 펴고 불에 달구어서/ 백년 동안 녹슬어도 좋을 기둥을” 박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폐허를 폐허로 남겨두고 옮겨가는 방식이 아니라 폐허의 자리를 삶의 터전으로 만드는 ‘파괴이자 건설’이다(그리고 다시 파괴하고 건설할 수 있는!). 비록 그것이 연약한 뼈대의 건물일지라도 문제는 우리들 몸에 스며든 지혜이다. 그 지혜일 때만 우리의 목숨을 담보할 수 있다. 하여 “참으로 어렵게 사람 노릇 끝내는 날/ 낡은 공구통이 내 관이 될 그날"의 진실됨으로 거듭나는 길을 가자. 이제 사상의 거처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 내 몸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건설의 재료이기도 하다. 동지들, 이제 버려진 철근들을 주워 모으고 곧은 진실로 펴고 달구어 두들기자!
2. 그는 말했다, 내 몸은 자본의 인간 파괴 기록문서라고 남들은 말한다. 노동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남들은 말한다. 민족은 해방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의 시는 말한다. 자본의 세상에서 긁히고 상처 나고 잘리고 죽임 당하고 주눅들고 뭉그러지고 오그라든 인간은 해방되어야 한다고. 그런 관계의 변화를 위해 노동도 민족도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증거물로, 내 몸이 자본의 인간 파괴 문서라고 말한다. 자, 내 발을 봐라!
그는 장화를 벗으려고 했다. 비명소리 보다 먼저 복숭아뼈가 신음을 토하고 으드득, 무릎뼈가 튀어 올랐다 부러진 홍두깨처럼 아무런 감각도 없는 발을 어떻게든 장화에서 꺼내려고 그는 안간힘을 썼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발은 꿈쩍도 않고 대못처럼 박혀버렸다 숨을 아주 깊이 들이마시고 핏발 선 눈을 천천히 감고 털썩, 엎드려 가늘게 떨다가 그는 비로소 죽은 듯이 투항했다 그러자 너덜너덜 허벅지만 남기고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발 끝까지 그의 장화를 신고 가는 발! -「발」전문
‘안전사고가 났다’고 할 때의 그 안전사고다. 그러나 인분(人糞)과 똥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가 다르듯이, ‘안전사고’와 "너덜너덜 허벅지만 남기고/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발"의 사고는 다르다. 그리고 롤러에 발이 빨려 들어갈 때 "그는 장화를 벗으려고 했다./ 비명소리 보다 먼저 복숭아뼈가 신음을 토하고/ 으드득, 무릎뼈가 튀어 올랐다"가 더해지면",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고함을 질렀다"가 더해지면, "핏발 선 눈을 천천히 감고/ 털썩, 엎드려 가늘게 떨다가/ 그는 비로소 죽은 듯이 투항했다"가 더해지면 '안전사고'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고는 완전히 다른 사상을 낳는다. 전자는 사고의 숫자와 숙련된 노동력 손실에 따른 이윤율 저하에 예민하다. 물론 그것들도 애도를 하고 짜게 보상한다. 하지만 후자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접근한다. 그 일이 없앨 수 없는 노동이라면, 그 일을 위해 최적의 노동 조건과 대우를 생각한다. 비록 그런 노동을 위해 노력과 돈이 더 들어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 일은 후진국에 줘버리자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임으로. 이렇게 노동의 몸에는 자본으로 대표되는 물질의 가치가 파괴한 인간의 가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음 앞에서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고함"을 쳐 막고자 했던 비극과 희망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사상이란 것이 저기에 있을 리 없다. 사상은 그의 육신에 적혀 있다. 아니, 그의 육신이 곧 사상의 형상(形象) 언어다. 자본으로 대표되는 물질의 가치는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발/ 끝까지 그의 장화를 신고 가는 발!"을 물질로 해결하려 들고 안 되면 살고 파는 다른 노동력에게 미루려고만 한다. 인분과 똥, 노동력과 노동자, 물질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 중이고, 노동자의 몸은 그 기록 문서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이들은 “와-, 70년대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그 비참함이 이젠 꿈인 것처럼 말하는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오해하지 마라. 물질적 가치의 팽배는 늘 이런 비극을 어느 역사 시대에도 가혹하게도 배태한다. 아무리 세월이 좋아져도 물질적 가치가 전 사회 영역을 지배하는 마당에 그 예외는 없다. 그것을 감추는 수단이 고도화되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서 이와 같은 장면을 과하다 싶게 도드라지게 표현(「발코니」,「웃는 뼈」「복사꽃 그늘」등)한 것은 그저 노동의 상태를 고발하기 위함이 아니다. ‘너희들이 얼마만큼 현실을 미화하기 좋은 거리에 위치하는 지’를 깨우치기 위한 클로즈업이다. 그는 말한다. 너희들은 너무 멀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인간파괴의 기록문서인 노동의 몸을 보지 못한다. 고로 나도 너희들의 언어를 볼 수 없다. 오히려 내게는 더 가까운 생의 경전이 있다. 보라!
공동전력구 맨홀 뚜껑을 열고 지하 25미터 사다리를 탄다 환기팬이 고장 난 구멍 속에서 용접을 하고 산소절단을 하며 오늘 내 목숨에게 주어진 위험수당은 얼마? 앙카볼트를 박고 한 계단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갈수록 까무룩히 숨이 막힐 즈음 썩은 하수 흐르는 벽을 타고, 천천히 시궁쥐 한 마리 지나간다 작업등에 반사된 쥐의 눈빛이 반짝, 내 눈과 마주쳤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쥐는 내 불안한 숨통을 밟은 것이다 너무 염려 말라고. -「감사(感謝)」전문
멀리서 보면 절대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할 장면이다. 그 밑으로 내려갔다가 질식해 죽은 사건이 아직도 심심찮게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로, 보일 만큼 와서, 느껴질 만큼 와서 생각하라. 노동자의 영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더욱 큰 사람으로 변해갈 것인가를. 생에 대한 그렇게 많은 해석들이 깝치는 이 세상 판에 시궁쥐 한 마리와 나누는 생명의 연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저마다의 해석으로 무리진 패거리들이 삶을 농단하는 이 세계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쥐는 내 불안한 숨통을 밟은 것이다/ 너무 염려 말라고” 시궁쥐가 던지는 눈빛에 감사하는 이 마음을 너희들은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가. 노동의 서정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이길 원한다. 현란한 어떤 말보다도 생명을 지켜주는 생명의 연대를 바라고 감사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일그러진 인간 생명의 해방이고 그 관계의 회복이다. 인간적 가치를 다시 새우는 것이다. 그를 위해 연대할 세력이 없다면 어떠랴, 시궁쥐와라도 연대하리라 하는 그런 마음이 읽힌다. 솔직히 이런 서정의 세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나는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이제 시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전율케 한다. 이제 내가 시를 읽기 위해 가지고 있던 지식들이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긴장이고, ‘감사’인가. 그래서 객소리를 하나 한다. 이 시가 발표되었을 때 어떤 분이 이 시를 ‘경향성의 문학’이라고 했다. 이유는, 이 정도는 노동자들의 삶 속에 비일비재한 슬픈 이야기고, 이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의식으로 고양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그 정치적 의식의 표현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시의 서정을 그렇게 감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가치개념의 언어들이 이 서정의 부분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최악의 맨홀 속 작업에서 마주하게 되었던 쥐의 눈빛에 대해 보인 화자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그 눈빛을 ‘나도 살아 있으니 너도 살 것’이라는 의미로 읽으며 ‘감사’라고 했다. 그가 끝까지 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생명’이다. 거기에는 유일무이하게 ‘생명’에 대한 긴장만 있다. 다른 해석의 언어가 자리하지 않고 ‘감사’가 자리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생명세계의 주인으로써의 충분한 덕을 가진 존재 그 자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빠진 모든 정치논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사상감정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라는 말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작용의 힘(자극되어 흥분하는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외적 조건을 구부려 내면의 힘으로 만드는, 인간해방의 사상으로 만드는 성형력(plastic force)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빠진 혹은 머리로 대체한 유토피아적 셈법이나 정치적 구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예전의 노동시는 노동조건을 폭로하려고 했다.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도적 힘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 그 인도적 힘들은 무엇이 되었는가? 희망장사꾼들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그리고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변한 것 중에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너희들이 노동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이라고. 물질의 가치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인간의 인간다움은 오직 물질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로 바꿀 때나 가능하다고. 나는 그것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다고.
3. 그는 말했다, 물질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로 바꿔라! 실은 이틀 전, 방금 전에 읽었던 시 「감사(感謝)」와 비슷한 조건에 일하러 들어갔다가 질식사를 당한 사건을 라디오 뉴스를 통해 들었다. 친척 생신에 가던 중이어서 함께 타고 있던 처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저런 노동의 형태가 사라질 수 있을까?” - “누가 하더라도 계속되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저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돈도 많이 받아야 하지 않나?” -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렵지…” 물론 우리의 이야기는 낭만적이다. 하지만 가치 문제에서 원칙적으로 맞고 인간의 세상은 그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지 않으면 인간 세계에 피비린내가 멈추지 않을 것임으로.
내 손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라인더는 힘차게 대신한다 스위치만 켜면 철판을 갈아내고 파이프를 자르고 용접 부위를 말끔히 다듬는다 죽어도 내가 할 수 없는 일 손가락이 잘려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눈도 코도 없는 그라인더는 무슨 무기처럼 날만 들이대면 맹렬하게 해치운다 그러나, 나는 간혹 그라인더를 멸시한다 언제든지 나의 손이 되어준 임무를 배반할 수 있기에 그라인더와 나의 친교는 핏방울로 변한다 그라인더의 날이 철판에 박힐 때 이미 내 손은 그라인더의 근육이다 모터의 전류가 내 몸의 어딘가 단선을 접합해 드디어 나를 작동시킨다 방전된 정신을 급속히 충전시킨다 -「그라인더는 나의 손」전문
그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간혹 그라인더를 멸시한다/ 언제든지 나의 손이 되어준 임무를 배반할 수 있기에/ 그라인더와 나의 친교는 핏방울로 변한다”고. 이 간단한 이치는 여러 가지로 변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돈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언제든지 나를 노예로 만들 수 있다. 물질의 가치는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편안함을 주지만 언제든지 그 노예로 만들 수 있다. 그러기에 물질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가 만난 때(“그라인더의 날이 철판에 박힐 때/ 이미 내 손은 그라인더의 근육이다/ 모터의 전류가 내 몸의 어딘가 단선을 접합해/ 드디어 나를 작동시킨다”)는 바싹 긴장(“방전된 정신을 급속히 충전”)을 해야한다. 결국 인간적 가치가 물질적 가치를 지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배반은 오고 “그라인더와 나의 친교는 핏방울로 변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 반대다.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먹고살기 위해 자본으로 대표되는 물질의 가치에 자진해서 머리를 들이민다. 시인의 말처럼 ‘간혹 멸시’를 해야 할 것을 오히려 숭배한다. 자본이 신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돌진한다. 그 결과 사회 각 영역에서 인간적 가치는 급격히 파괴되고, 알량한 인간마저도 점점 이윤을 내는 존재로만 취급된다(아-, 욕하고 싶다. 언놈이 말했다. 똑똑한 한 놈이 몇 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뭔가 단단히 잘못된 구조다. 그 잘못된 구조로 하여 우리가 어떻게 파괴되어 가고 있는지를,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자- 이렇게 보여주랴!
그녀는 아메리카 백인 미녀들처럼 금발과 푸른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폐계를 닮은 닭털 같은 머리에다 멍한 회색빛 눈동자를 지녔다 더구나 이미 늙어버린 그녀는 마흔 중반도 훌쩍 넘어 뵈는 얼굴이다 염색공장이 밀집한 능안공단 아랫말 빈 축사를 개조한 집으로 세를 들어온 그녀는 큰 가방 두 개를 끌고 나타날 때부터 실업자였다 봄, 여름이 다 가도록 일 나갈 생각은 않고 축사 앞 평상에서 소주를 마셨다 동네 남자들만 보면 그녀는 술을 사달랬다 술만 사주면 언제든지 다리를 벌린다고 했다 그녀의 먼 고향은 푸르고 넓은 평원이었을까 크림반도 눈 내리는 마을 얼음의 산맥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녹슨 핵탄두가 뇌관을 숨긴 은밀한 기지 부근의 철조망이었을까 그 어떤 낭만도 쓰라린 기억도 그녀를 통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회색빛 동공만큼이나 막막했던 사람 술에 취한 율리아, 아는 것이라곤 그녀의 이름 뿐 축사 앞 은행나무 단풍이 지던 땐가 만삭의 배를 안고 그녀는 축사에서 쫓겨났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여자」전문
그 여자를 생각하면 갑자기 내가 수치스럽다. 우리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일까. 돈 벌려고 온 그녀에게 우리가 한 짓이 무엇일까. “만삭의 배를 안고” 겨울 한데로 쫓겨난 그녀의 눈에 우리들은 인간이었을까? 우크라이나에서 온 그 여자의 파괴를 통해 보게 된 이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자. 구역질이 난다. 요즘 들어 부쩍 선동적으로 울려 퍼지는 ‘세계 일류’, ‘세계 최고’, ‘세계 최초’라는 말들과 함께 소제국주의적(小帝國主義的) 꿈으로 부풀어 오른 우리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소름이 끼친다. 그들의 착취를 통해 얻은 부로 우리는 행복할까. 그래서 시인은 이런 거짓된 희망과의 단절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영혼에게/ 간절히, 속삭인다. 살아가라, 희망 없이.....”(「살아가라, 희망 없이」에서), 차라리 희망 없이 사는 게 더 좋다고. 왜? - 그게 희망이 되는 순간 곧 허위의식이 되기 때문에. 그 허위의식에 똬리를 튼 이기심이 피비린내를 좇아 움직일 것이므로.
4. 그는 말했다, 있는 그대로를 확립하고 거기부터 시작하자 이젠 희망장사꾼도 탓하지 말자.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허위의식을 척결하자. ‘천만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쳐도 고작 몇 만 명도 단결되지 않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허위의식, 그 내 안의 적을 몰아내자. 냉정하게 나를 보자. 사상의 거처인 내 노동의 몸과 정신을 깨끗이 하자. 시작도 완료도 모두 노동의 몸과 정신이다. 인간해방이란 다름 아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자본의 허위의식을 몰아내고 노동의 생명으로 채우는 과정 그 자체다. 그러니 나를 있는 그대로 확립하고 거기부터 출발하자.
밤송이 가시에 햇살이 떨어질 때 모가지 속으로 한기가 또아리를 틀 때 늙은 인부들과 일을 마치고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갔다 공사장 부근을 지나 개울을 건너 밤나무숲이 있는 손두부집에서 보리밥을 먹었다 보리밥을 맛있게 먹고 내려오다, 돌다리쯤에서 까맣게 말라 죽은 곤충 한 마리를 주웠다 두 개의 뿔이 달린 장수하늘소였다 그걸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와 안방 벽에다 무슨 장식처럼 붙여놓았다 아침 저녁으로 나는 그 하늘소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힘이 불끈 생겨났다 하늘소가 근사한 뿔을 흔들며 기어 다녔고 이빨을 벌리며 금방이라도 날아갈듯 생기가 넘쳤다 오늘도 하늘소가 잘 있나 없나 살펴보았더니 세상에, 뿔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힘없이 머리를 수그리고 앞다리가 잘려있었다 잃어버린 뿔과 다리를 찾다가 혹시 하늘소의 모습이 처음부터 이런 몰골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나는 기세당당한 하늘소를 상상하고 힘을 얻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진짜였는지 의심스러웠다 늙은 인부들이 일당도 못 받고 돌아간 저녁 나는 멍하니 혼자 남아 있다, 배가 고파서 다시 개울을 건너갔다 밤나무숲을 지나자 머리에 돋아난 한쪽 뿔이 떨어졌고 갑충처럼 다리가 또 꺾이는 걸 이빨 악물고 참아야 했다. -「장수하늘소를 위하여」전문
이제 우리를 소란하게 했던 거창한 이야기들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근엄한 시간에 우습게도 먼저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부터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걸 해결하면서 생각해 보자. “혹시 하늘소의 모습이 처음부터 이런 몰골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나는 기세당당한 하늘소를 상상하고 힘을 얻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진짜였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늘 자기에 직면하기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을 견딜 때 비로소 나는 노동의 육신, 자본의 그 인간파괴 기록문서로 돌아와 정신을 차릴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머리에 돋아난 한쪽 뿔이 떨어졌고/ 갑충처럼 다리가 또 꺾이는 걸 이빨 악물고” 참는 진짜 내 모습을 보며, 살아 있는 그 육신의 희망과 사상을 가질 수 있다. 내 육신이 변하기 전에는 절대 변할 수 없는 인간해방의 사상을! 이젠 각오할 것이다. 내 안에 들어와 있던 내 것 아닌 생각들을 몰아내고 내 생의 유혹으로서 자라나는 생명을 채우자. 그것을 위해 가장 생명적이고 과감하며 사랑 넘치는 육신의 사상, 인간해방의 사상을 만들자. 진정한 장수하늘소가 되자. “그 하늘소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힘이 불끈 생겨났다/ 하늘소가 근사한 뿔을 흔들며 기어 다녔고/ 이빨을 벌리며 금방이라도 날아갈듯 생기가 넘쳤다”의 상상이 아니라 내 근육, 내 사상이게 하자. 이것을 할 수 있는 자, 바로 우리들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분명 왜 너희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며 질문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내 대신 말한다.
나는, 내 빈궁이 또한 남의 빈궁이려니 생각했다 남의 일을 내 일로 여겨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만큼은 곱씹으며 살았으니 이렇게 없는 살림을 못가진 자의 넋두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알지 못하는 뼈다귀들이다 -「빈궁貧窮」부분
내가 그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빈궁이 또한 남의 빈궁이려니 생각”할 줄 아는 본성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소유적 욕망으로만 내달려 가는 사회관계를 존재 깊이에서 나눔과 베풂의 관계로 변형시켜야만 생생한 삶으로 느낄 줄 아는 노동의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의 육화(肉化)가 다름 아닌 ‘물질적 가치’를 ‘인간의 가치’에 의해 통제하려는 인간해방의 길이다.
분에 넘치는 발문 쓰기도 이제 끝나간다. 내가 임성용시인을 언제 만났을까 생각해 보니 참 아득하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20대 후반인 것 같다.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강연 같은 게 있었고, 그가 제출한 시를 처음 봤다. 후로도 내가 노동자문학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빙빙 돌았으니 띄엄띄엄 그를 봤고, 전태일문학상을 받을 때도 봤다. 그리고 이 원고를 봤다. 노동자문학이 꾀 오래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후 꼭 20년이 지나 ‘아 옛날이여-’ 하는 사라진 노동자문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해방으로 사유의 깊이와 서정의 강고함을 얻은 시의 탄생을 본다. 감회도 새롭고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그 사이에 그이는 손가락도 잘렸다 붙였고, 공장도 수없이 전전했고, 큰맘 먹고 시작했던 협동농장일도 접은 것 같다. 그래도 스스로의 삶을 고래심줄처럼 물고 늘어졌다. 이 시들과 더불어 고맙다. 그리고 그의 처에게도 감사한다. 예전에 한번 뵙기는 했는데, 머리칼이 노릿노릿했다는 것 밖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아내가 운다」를 읽으니 고생바가진가 보다. 그래도 이처럼 의미 깊은 시를 쓰게 해준 그 인고의 삶이 눈물나게 내겐 고맙다. 시인의 아들놈은 김희영 장가갈 때 한번 봤고 딸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그렇게 네 식군가? 그래, 넷이면 지 몸 부서지도록 일하는데 굶기야 하겠는가. 하늘을 나는 저 새도 먹고사는데 아등바등하는 처와 서방 있는데 못 살기야 하겠는가. 다들 잘 살라. 그 입 벌릴 때마다 인간해방의 형상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임성용 시를 읽으니 그와 늘 함께였던 구로노동자 문학회분들 얼굴이 떠오른다. 징하게 아름다운 얼굴들! 마지막으로 이번 시집의 표제 시를 임성용을 위해 철수가 읽는다. 하늘공장이 땅으로 내려올 그 날까지 동지로서 함께 할 것을 약속하며.
저 맑은 하늘에 공장 하나 세워야겠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 그곳에서 연기나는 굴뚝도 없애고 철탑도 없애고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 먹이고 고공농성의 눈물마저 새의 날개짓에 실어 보내야겠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삶은 고통일지라, 죽어도 추억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늘공장의 예배당에서는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잘린 모가지를 껴안고 천천히 해찰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공장으로 출근을 해야겠다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하늘공장에 가서, 저 푸르른 하늘공장에 가서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해야겠다 땀내나는 향기를 칠하고 하늘공장에서 퇴근하는 길 지상에 놓인 집 한 채가 어찌 멀다고 이르랴 -「하늘공장」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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