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은 독점재벌인가
지난해 11월 10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이에 앞서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금융위기의 감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라고 보도했다. 상당수 외국 언론들도 이와 유사한 평가들을 했다. IMF구조조정 때도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는데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 역시 한국의 피해가 가장 크다. 이것은 확실히 한국 경제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 재벌에 국한시켜 이 문제를 헤쳐보고자 한다.
4 누가 누구를 지배하나
독점체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정치를 지배하는 데 있다. 독점체들은 정권에 자기들의 대표(혹은 대리)를 투입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펴도록 한다.
미국에서는 민주당이 기본상 할리우드와 지식산업을 기반으로 하고, 공화당이 군산복합체와 석유 독점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94년 중간선거에서 대참패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민주당의 재집권을 클린턴 전 대통령은 새로운 모리스 소프트웨어를 갖고 이뤄냈다.
공화당 부시 행정부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3년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단행했다. 결과 4대 군수업체인 록히드 마틴·보잉·레이시온·티아르더블유를 위시한 군산복합체들은 ‘황금 바다에서 목욕’하는 특전을 누렸다. 중동의 석유 시장은 엑슨 모빌, 쉐브론-헥사코 등 미국의 대규모 석유회사들이 독점하는 국면이 조성됐다.
부시 전 대통령이 텍사스 석유 독점체의 대변자, 캘리포니아 군수 독점체들의 대표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전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책위원회 위원 30명 중 9명이 국방과 안보 관련 회사에서 자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우리 재벌은 선진국의 독점체들처럼 정권을 지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다. 정권을 움직이기는커녕 밉보이면 혼쭐나는 게 한국 재벌이다. 정경유착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진령 기자가 쓴 바 있지만 YS정권 시기 현대그룹처럼 왕따 당한 재벌은 없었을 것이다. 틈나면 들이닥치는 각종 조사로 현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1992년 대선 시기 정주영 전 회장의 원색적인 공격에 대해 울분을 삭이지 못했던 YS가 두고두고 정치 보복을 가했기 때문이다.
YS정권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이건희 전 회장이 삼성그룹 중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대의 형태를 강한 톤으로 비판하며 이제 그런 때는 끝났다는 투의 발언을 해 파문이 일었다. 그 근저에는 이제 YS정권에서는 삼성이 날아오를 차례라는 암시가 있었다. 아닐세라 YS정권 내내 삼성그룹은 특혜를 받으며 선두를 달렸다.
YS정권에서 잘 나가던 한보는 김현철씨 비자금 사건으로 공중분해가 됐다. 정치와 너무 가까우면 데고 너무 멀면 시리니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공리를 한보가 잘 지키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우그룹은 YS시절 일약 재계 스타, 거대 재벌 기업으로 떠올랐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 전 회장의 지론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계화 전략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던 대우였건만 DJ정권에서는 맥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대우 자체의 부실 경영이 문제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그룹처럼 봐 주었다면 해체되지 않았을 거라는 김 전 회장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김 전 회장이 99년 그룹 퇴출을 막기 위해 당시 수백억대의 정관계 로비를 시도했던 사실이 검찰에 의해 밝혀졌다.
YS 집권 시기 끝없이 몰리던 현대가 DJ정권에서는 보란 듯이 솟구쳐 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편승해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의 단초를 여는 등 남북 관계 활성화에 공헌한 덕이었다.
그런 현대도 노무현 정권에 와서는 또 처지가 바꿨다. 노 전 대통령이 남북 경협에 차단기를 내리라는 미국과 보수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해 특검을 실시했고,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독점체가 정권을 지배하는 선진국과 달리 정권이 재벌을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한국 재벌이 온전한 독점재벌이 아님을 단적으로 실증하고 있다. 이는 한국 재벌이 힘이 약하다는 것과 함께 한국 정권 자체의 기형성과도 관련돼 있다. 한국 정권은 미국의 조종을 받으며 미국의 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 정권의 힘은 배경을 이루고 있는 미국의 힘이고, 결국 한국 재벌은 그 미국의 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끝내면서
월가에서 미풍이 불면 여의도는 태풍이 불고, 미국 경제가 기침을 하면 한국 경제는 독감으로 몸져눕는다.
여태껏 그랬듯이 무턱대고 미국을 좇다가는 오늘의 한국 경제나 한국 재벌처럼 미국발 위기의 가장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예속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 비록 독점체의 외양을 갖췄다 해도 명실상부한 독점재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경제가 살고 우리 국민이 살 길은 오직 오늘과 같은 예속에서 벗어나 홀로 설수 있어야 한다.
무엇부터 할 것인가. 경제를 좌우하는 정치가 줏대를 가지고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이 선차다.
한국 재벌은 시종일관 미국과 경제적 주종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를 말 그대로 ‘수평적 관계’로 만드는 데 정치권과 재계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다.
한국 재벌은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경제 윤리를 지켜야 한다.
재벌이 이윤 획득의 경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경제 논리에 앞서는 것은 경제 윤리다. 재벌은 응당 우리나라의 이익, 우리 국민의 이익, 우리 민족의 이익을 위하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 국민의 주권과 민족의 이익을 외면한 재벌이 비록 오늘 부당한 수법으로 치부를 한다 해도 역사는 그 이름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역적의 반열에 올릴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한국 기업’, ‘민족 기업인’으로 불리는 건강한 기업과 당당한 기업인이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