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은 독점재벌인가
지난해 11월 10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이에 앞서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금융위기의 감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라고 보도했다. 상당수 외국 언론들도 이와 유사한 평가들을 했다. IMF구조조정 때도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는데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 역시 한국의 피해가 가장 크다. 이것은 확실히 한국 경제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 재벌에 국한시켜 이 문제를 헤쳐보고자 한다.
1.예속의 올가미
거의 모든 한국 재벌들의 성공신화에 빠지지 않는 메뉴는 ‘자수성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투시해 보면 미국에 기대지 않고 절로 재벌이 된 예는 별로 없다는 게 정평이다.
우선 ‘적산’ 불하 과정부터 보자.
강점기, 일본은 직접적 지배와 공공연한 약탈로 조선인의 명백한 과녁이 됐지만, 미국의 방법은 사뭇 달랐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재산(물론 조선 민중이 창조했지만)을 석권하면서도 거기에 그럴싸하게 ‘적산’(敵産 Enemy Property)의 상표를 달았다. 우리 민중의 적이자 미국의 적이라니 그야말로 감동 만점이었다.
미국은 ‘적산’ 불하를 통해 한국 자본가들을 예속시키고 미국을 위해 복무하도록 꾀했다.
미국의 원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산된 가치가 국경을 넘을 때는 반드시 국가적으로 노리는 잇속이 있다.
미국은 원조의 명목으로 투입되는 물자를 고정환율(固定換率 Fixed Exchange Rate)로 특정인들에게 배당했다. 그것을 넘겨받은 자본가들은 몇 배나 높은 시장의 환율(변동환율 變動換率 Floating Exchange Rate), 시세에 맞춰 판매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이처럼 과잉상품, 과잉자본의 특혜 배당과 특혜 융자를 통해 미국은 한국 자본가들에게 자본축적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을 자국 독점자본과 한국 시장 간의 충실한 매판(買辦 Maipan, Comprador) 중계자로 등장시켰다. 미국은 이 과정에 한국 경제가 자체의 힘으로 설 수 있는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한국에서 기업들이 재벌(財閥)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6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예속자본이 5~6년 사이 급속히 팽창하게 되었는데 바로 크게 비대해진 기업을 재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경제학적 범주의 독점(獨占 Monopol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덩지가 크고 영향력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통용된 것이었다.
이같이 하등의 본원적인 자본축적(資本蓄積 Accumulation of Capital)도 없이, 이렇다 할 근대적 산업 발전의 바탕도 없이 부당한 특혜 배당과 다량의 원조에 의해 재벌로 된 것이 한국 재벌의 독특한 형성 과정이었다.
선진국에서는 흔히 상업자본(商業資本 Commercial Capital)과 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 Usurious Capital)으로 본원적인 자본축적을 일정하게 한 연후에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자본(産業資本 Industrial Capital)이 확립되고 산업의 발전이 전반적으로 상당한 정도에 달했을 때 독점자본이 형성됐다. 미국에서도 주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 자본의 집중을 통해 독점이 형성되고 그의 발전 과정에서 은행자본과 결합되어 대독점체(大獨占體 Great Monopoly, Trust)가 형성됐다. 일본 역시 큰 규모로 본원적 축적을 이룩한 후에 정부의 강력한 산업 육성 정책으로 전반적인 산업 발전이 일정한 정도에 도달했을 때 독점자본으로 발전된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준 차관 역시 재벌 육성의 한 방편이었다.
미국 차관은 주로 관영기업에 투입된 재정차관과 재벌에 투입된 상업차관으로 나뉘었다. 미국은 1959~1980년 사이에 한국에 114억 달러의 상업차관을 주었는데 그 중 97%를 재벌기업에 집중했다. 미국은 차관을 주는 한편, 재벌기업들의 투자 방향과 제품의 가공조립 구조, 시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간섭했다.
미국은 1970년대 이후부터 직접투자(直接投資 Direct Investment)에 의해 한국 재벌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1980년부터 그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미국은 합작회사들의 통제주를 장악하거나 여러 가지 조건을 일방적으로 첨가하는 방법으로 합작투자를 실현했고, 단독투자에서는 핵심기술 분야를 독점하고 그것을 기회로 한국 재벌을 틀어쥐었다.
미국은 한국 재벌에 대한 지배를 다양한 미사여구로 포장했다. ‘적산’ 불하는 ‘민족경제의 창설 과정’으로, 원조를 통한 지배는 ‘경제 부흥’으로, 차관에 의한 지배는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직접투자에 의한 지배는 ‘신흥공업국가로의 이행 협조’로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하지만 비단으로 만들었어도 올가미는 올가미였다. 한국 재벌은 옴짝 못할 예속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이것은 우리 재벌이 독점체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근원적으로 봉쇄당했으며 미국 독점자본에 명줄을 걸게 됐다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