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노동운동의 현실과 전망
목 차
1.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초기 노동운동의 전개(민주노총 결성시까지)
2. 궤도노동자투쟁 시기 구분
3. 공세적 투쟁기
가. 서울지하철노조투쟁
나. 88.7.26철도파업
다. 전지협결성과 총파업
1) 전기협 결성과 그 활동
2) 서울, 부산지하철 노조민주화투쟁
3) 전지협결성(94.3.16)과 총파업
라. 공노대건설과 공공 5사 투쟁
4. 노조민주화와 구조조정 저지투쟁
가. 자본의 총공세와 노동운동 패배퇴각
나. 부산지하철 1인승무 저지투쟁
다. 서울지하철 99.4.19파업투쟁
5. 철도노조민주화와 사유화 구조조정저지투쟁
가. 철도구조조정, 민영화(사유화) 추진과정
나. 철도민영화저지, 노조민주화투쟁
1) <철도해고노동자회> 및 <철도노민추 결성>
2) 조합비 인상반대 범대위 투쟁
3) 공투본의 직선제 규약개정 투쟁
4) 민영화저지투쟁과 선거투쟁 승리
6. 궤도연대 공동투쟁
가. 궤도사업장 노조민주화와 궤도연대 조직구성
나. 03.2.18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다. 03년 6월 지하철 4사 공투
라. 04년 궤도공동투쟁
1) 투쟁경과
2) 궤도공투 배경
3) 궤도공투의 진행과정
4) 결과
5) 간단한 평가
7. 민주철도노조투쟁
가. 격변과 투쟁의 기간
나. 국가기간산업 해외매각저지 공투본 파업투쟁(02.2.25)
다. 03.4.20노정합의와 6.28파업
라. 04년 운수 연대투쟁
8. 궤도노동운동의 현실과 전망, 과제
가. 노동운동 지형 변화
나. 궤도노동운동의 침체
다. 궤도노동운동의 과제
9. 맺는말
1.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초기 노동운동의 전개(민주노총 결성시까지)
87년 봄 이후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한 민중의 투쟁이 고양되면서 노동현장에서의 노동자투쟁과 노조결성운동도 활발해졌다.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60년대 이후 전체 민중의 민주화투쟁의 일부를 이루면서 또한 70, 80년대 노동자 권익쟁취, 노조민주화투쟁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87년 봄 이후 고양되어 가는 민중의 항쟁에서 그 민중의 주요한 구성부분으로서 싸우면서, 또한 군부독재의 억압 착취구조에 맞서서 노동현장에서의 노동조건의 개선과 제 권리의 확보를 위해서도 활발하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6월항쟁의 성과로서 나온 노태우의 6.29선언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혁하고 민주적 제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내용을 결여하고 있었다.
6월항쟁으로 노동자들을 억누르던 억압장치가 약화되자 노동자계급대중의 에네르기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스스로의 권익을 쟁취키 위해서 노동자계급대중은 떨쳐 일어섰다. 6월항쟁에 이어서 터져 나온 7-9월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을 비약적으로 전진시켰고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사회적 세력관계를 바꾸어 내었다. 노동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금 역사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민중운동의 주력은 노동자계급이 차지하게 되었고 운동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군부독재구조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의 형태를 띄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투쟁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또한 남한사회의 계급관계 그 사회정치적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투쟁의 직접적이요 주요한 내용은 노동조건개선과 임금인상이라는 경제적 성격의 것이었고 그 조직적 성과는 노동조합의 결성 또는 민주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 투쟁은 경제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7-9월 대투쟁으로 일어선 노동자들은 지역과 전국으로 단결하여 지노협과 전노협을 결성하였다. 업종 노조들은 업종노조연맹회의로 단결하였다. 90년 12월 대공장노조들이 단결한 공동투쟁체인 ‘대공장노조연대회의’가 구성되었고 한편으로 재벌그룹 대공장노조들은 그룹노조연합, 협의회로 단결해 갔다. 대공장노조연대회의, 전노협, 업종회의가 함께 추진하던 91년 봄 공동임투가 권력의 탄압으로 깨진 후 91년 가을 노동자대회시 이들 노조들이 참여,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가 구성되었고, ILO공대위는 93년 6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로 발전하였다. 94년 11월 민주노총건설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된 일년후인 95년 11월 11일 마침내 전국 민주노조의 총단결 조직인 민주노총이 발족하게 된 것이다.
2. 궤도노동자투쟁 시기 구분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한국사회 궤도노동자투쟁도 부활하였다. 궤도노동자투쟁 역시 7-9월 대투쟁의 물결속에서 태어났고 이후 노동운동의 흐름속에서 그 일부로서 발전해왔다. 궤도노동자투쟁은 전체 노동운동과 함께, 전체 노동운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또 전체 노동운동에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 온 역사인 것이다. 궤도노동자투쟁의 전개과정은 권익쟁취투쟁과 함께 민주노조설립과 노조민주화투쟁이 함께 병행하여 발전해왔다. 궤도노동자투쟁은 처음부터 궤도노동자뿐만 아니라, 운수, 공공부문 노동자와 끊임없이 연대하고 지속적으로 연대투쟁과 조직을 발전시켜 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궤도노동자들의 투쟁은, 궤도산업의 중요성과 궤도노동자투쟁의 중요성 때문에 자본과 정권의 혹심한 탄압에 맞서서 진행되어 왔고, 그 탄압을 극복해내면서 발전해 왔다.
이상과 같은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궤도노동자투쟁과정을 검토해 보면, 궤도노동자투쟁의 전개, 발전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87년 8월 서울지하철노조결성으로부터 94년 6월 전지협총파업시기까지를 공세적 투쟁의 시기로 볼 수 있고, 전지협총파업 이후 2002년까지는 전지협총파업으로 타격을 받은 서울, 부산 지하철이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다양한 연대의 토대를 쌓고, 연대투쟁을 실행해 가는 다른 한편에서, 철도노조와 도시철도노조 등 노조민주화투쟁이 이루어진 시기이고, 2002년 이후는 궤도노동자 각 사업장 노조들 민주화가 완료되고, 본격적인 조직적 연대와 연대투쟁이 전개된 시기이다.
[각 사업장노조 투쟁에 대해서 철도의 송호준동지, 대구의 이원준동지, 부산의 이영호동지, 인천의 정현목동지, 도시철도 정운영동지, 서울지하철 오선근동지, 이분 들이 자료를 보내주시고 각 사업장노조 상황을 파악하는데 이분들의 의견을 들어서 도움을 받았다. 각 사업장노조 투쟁경과는 사실상 이분들이 보내주신 자료들을 요약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 중에 오류가 있으면 저의 책임임도 분명히 밝혀둔다]
# 표1: 궤도노동자 조직현황: 합계 45,430명
소속주소비고서울지하철
노동조합서울시 성동구 용답동 182번지 http://sslu.or.kr서울지하철 1-4호선위원장 : 정연수조합원 수 : 9200명부산지하철
노동조합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133 http://busansubway.or.kr부산지하철 1-3호선위원장 : 오영환조합원 수 : 2,750명서울도시철도노동조합서울시 강동구 하일동 275 고덕차량기지 내 http://www.smrtwu.or.kr서울지하철 5-8호선위원장 : 김남일조합원 수 : 5,400명인천지하철
노동조합인천시 계양구 귤현동 451번지 http://www.isunion.or.kr인천지하철위원장 : 이성희조합원 수 : 770명대구지하철
노동조합대구시 달서구 유천동 342번지 http://daegusu.or.kr대구지하철위원장 : 최종윤조합원 수 : 1,530명광주지하철
노동조합광주광역시 서구 마륵동 165-27 http://www.gmrtwu.or.kr광주지하철위원장 : 이정수조합원 수 : 430명
대전지하철위원장 : 하태원조합원수 : 250명대전지하철전국철도
노동조합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40번지 http://krwu.or.kr 전국철도(국철) 외 경인, 경천, 경원, 분당, 안산, 일산선 등 전철 구간위원장 : 김영훈조합원 수 : 25,000명 [2005. 3. 17-19 운수노동자학교 교재에서]
3. 공세적 투쟁의 시기(87-94년 투쟁)
-민주노조운동의 조직, 투쟁 중심으로-
가. 서울지하철노조 투쟁
서울지하철노조는 87년 8월 12일 결성되었다. 88년 2월에 부산지하철노조가 설립되었다. 초기 궤도노동자투쟁에서 서울지하철노조 역할이 단연 두드러졌다. 서울지하철노동자투쟁은 87년 7-9월 대투쟁 이후 초기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항상 중심에, 또 선두에 섰고 주요한 역할을 해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설립 이후 대내외적으로 과감하게 사업을 추진하였다. 초기 서울지하철노조투쟁의 내용 역시 노동자의 권익쟁취와 노동영역에서의 민주주의실현, 제도개선투쟁으로서 노동자투쟁에서 앞서고, 계급적 보편성을 지닌 것이었다. 지하철노동자들이 싸워 온 권위주의, 군사문화, 부패의 척결, 직장내 직급간의 차별을 철폐한 직제개편, 24시간 맞교대노동을 8시간노동으로 개편, 단축하고 노동시간 단축에 따르는 인원증원을 이룩한 근무형태변경 등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하철노동자들은 자본과 정권의 혹심한 탄압에 맞서서 이를 극복해내었다.
직제개편과 근무형태변경 등은 이후 부산지하철과 서울대병원, 포항제철 등 공기업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서울지하철의 투쟁은 철도노조 88.7.26파업과 88년 교정공무원의 권리쟁취서명, 집회투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서울지하철노동자들이 투쟁기간에 지하철 차량과 역사에 일제히 부착하는 대자보와 전면표어는 선전수단으로서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역사 등의 훌륭한 선전공간을 활용하여 현대중공업, 전교조, KBS노조와 수많은 노동계 공동이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대, 대국민 선전선동을 해내었다. 특히 지하철노조투쟁기간에 열차와 역사 전역을 통해서 운동가요를 방송함으로써 마치 서울 전역이 해방구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궤도노동자와 전체 노동자의 연대를 위한 조직건설과 연대투쟁에 앞장섰다. 87-88년 맥스테크 위장폐업철폐 등 서울지역의 노동자연대투쟁을 통해서 88년 초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건설하고, 이를 이끌었다. 전국적으로 지역 노동조합연합 또는 협의회가 결성되고, 각 업종에서는 연맹이 결성되었다. 88년 5월에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노동법개정투쟁 집회가 열리고 여의도까지 행진하였다. 이러한 지역과 업종의 민주노조들을 결집한 노동조합전국회의가 구성되고, 전노협이 건설되는데 서울지하철노조는 조직적 중심을 굳건히 지킨 것이다. 서울지하철노조는 90년에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조선, 포항제철, 한진중공업 등 16개 대공장노조와 함께 ‘연대를 위한 대공장노조회의’를 구성하였다. 연대회의는 91년 봄 전노협, 업종연맹회의와 더불어서 공동임투를 추진하고, 노태우정권의 탄압에 대항해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또한 치열한 내부투쟁을 통해서 노조를 민주화, 강화하고 조합내 노사협조주의와 부패를 척결해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초기 민주노조로 급속히 발전해 갔지만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수많은 노조들이 그렇듯이, 동시에 신생노조로서 취약성을 드러내었다. 서울지하철노조 역시 민주노조 건설과정에서 급속히 등장한 간부들 상당수가 노동자계급의식이 얕고, 민주노조운영방법에서 미숙하였다.
당시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들의 73%는 무주택자였으므로 자신의 주택을 가지려는 열망이 대단히 높았다. 지하철노조 1기 집행부는 이러한 조합원의 열망을 바탕으로 조합원의 주택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 즉 (노조)주택조합을 추진하였다. 거액의 돈을 만지는 주택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온갖 부패가 발생하였다. 한창 노조 투쟁중에 절반 가까운 노조 상근 간부들을 주택사업에 투입하고, 녹지로서 시유지인 주택조합 부지 불하와 토지 형질변경을 둘러싸고 노동조합 간부와 서울시와 시경 고위층과 뒷거래가 이루어지고, 조합간부들이 부패에 연루됨으로써, 결국 노조 내부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이 문제로 노조 집행간부들이 총사퇴하고 다시 총선을 실시, 집행부가 교체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나 이후 노조 내부에 깊은 분열의 상처와 끊임없이 다시 재발하는 부패의 독소를 심게 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의 직제개편은 지하철노조 설립 이후 최대 과제였다. 이것은 직장내 일반직, 기능직, 고용직이라는 차별적 직제를 하나로 통합해내고 그간의 차별을 시정하는 내용이었다. 노조 설립 첫해인 87년 11월 직제개편에 관한 원칙적인 내용에 대해서 합의하였지만, 워낙 중대한 과제로서 정부와 서울시는 이를 그대로 실현하기를 거부, 축소, 불이행하려 하였다. 당시 지하철노조는 서울시장과 교섭, 직제개편 완전 이행과 투쟁으로 인한 조합간부의 징계나 고소고발 금지 내용과 시장의 부대서명에 합의하였으나, 청와대의 거부와 노태우대통령 서울시 방문 및 시장에 대한 질책으로 조합간부 징계 및 고소고발 금지 약속이 취소됨으로써, 이후 지하철노조는 이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에 돌입하였다. 파업투쟁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노태우정권에 대한 투쟁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서울지하철노조는 89년 3.16파업으로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온갖 시위진압장비와 함께 군자기지 8500명을 비롯하여 1만 5천명의 경찰이 서울 전역 파업현장에 투입되어 2333명의 노동자를 연행 서울시내 여러 경찰서에 분산 수용하였다. 연행된 조합원들은 민주당사와 평민당사로 집결하여 이후 1주일간 파업을 계속하였다. 파업 초기 2, 3, 4호선은 거의 열차운행이 중지되었고 강력한 파업이 3-4일 계속되자 파업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던 관제언론들도, 수습도 못하면서 강경정책을 쓰고 있는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결국 파업대오는 무너지기 시작함으로써 파업 지도부는 파업 시작 일주일째에 자진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89.3.16총파업을 통해서 서울시는 직제개편을 이행하였고, 이와 함께 역시 지하철노조 핵심 과제였던 근무형태변경 역시 이 파업과 그 후속투쟁을 통해서 쟁취되었다. 근무형태변경은 당시 서울지하철의 주된 근무형태였던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4조3교대나 3조2교대근무로 변경함으로써 12시간노동을 8시간 노동으로 단축하고 이에 필요한 인원을 충원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지하철의 정원은 7천명가량이었는데 대략 3천명정도의 정원이 증대되었다.
부산지하철노조 역시 서울지하철노조를 따라서 직제개편과 근무형태변경이 이루어졌으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지 못함으로써 서울지하철에 미치지 못했다.
나. 88년 7.26철도파업
88년 7월 26일 새벽 1시경 철도 기관차 승무원들이 전면적인 총파업투쟁을 벌였다. 당시 파업의 주요원인은 서울-부산간 여객열차 직통화 추진이었다. 철도청의 경영합리화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부산간 열차 운행시간 단축이 단행되었으며 감원이 본격화되었다. 88년 당시 철도 노동자들 누구나 열악한 노동조건과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전국적인 의사소통망을 가지고 있어 상대적으로 뭉치기 쉬운 기관사들이 먼저 궐기했던 것이다. 당시 철도 기관차 승무원들은 월 250시간에서 30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 기계실내에 얼음이 얼고 한여름에는 40도까지 올라가는 열악한 근무환경, 졸음을 참느라 가루커피를 입에 털어넣는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또한 철도 노동자들은 근로 기준법의 22퍼센트 정도에 불과한 초과근무수당, 휴일수당, 야간수당을 받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형성되어 온 철도노동자들은 한국 산업경제의 발전과 민중의 생활과 문화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격변을 거쳐 온 한국 역사가 그렇듯이, 철도노동자들의 삶 역시 온갖 풍상을 겪어 왔다. 철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일제강점 시기와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열악한 상태로서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산업경제의 발달에 따라서 교통수요가 늘어나고 열차운행속도가 빨라짐에 따라서 근로조건은 더욱 열악해지고 노동강도는 더욱 강화되어 왔다. 아직 산업발달이 미약한 60년대초까지만 해도 철도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에서 근무하는 공적 노동자로서 자부심을 가졌지만 산업경제의 발달에 따라서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는 오히려 저하한 반면에 근로조건은 더욱 열악해짐으로써 철도노동자들의 불만은 높아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하였다. 철도 노동자들은 87년 민주화 투쟁을 경험하였으며 주위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의 영향은 철도 노동자들의 가슴에도 불을 질렀다. 특히 동종업체인 서울 지하철의 민주노조 설립과 투쟁은 “우리도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기관차 승무원들은 88년 7월 15일 용산 철도 노조회관에 모여 농성에 들어갔다. 어용 철도청과 철도노조간에 체결된, 노동조건 개악을 수용하는, 특별단체협약을 거부하고, 12일간 농성하면서 재교섭과 “근로기준법에 의한 제수당 지급, 서울-부산 직통열차 도중교대, 열차 운전직 수당 인상, 기관사 적성검사 폐지, 운전국 신설”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어용 철노와 철도청이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7월 26일 비상총회를 소집, 27일부터 전국적으로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노태우 정권은 파업투쟁 10시간만인 7월 27일 오후 2시경 전국의 파업 농성장에 경찰을 투입하여 1,653명의 노동자들을 연행하는 등 폭압적으로 탄압했다. 정부와 청의 강경 대응선언에 후퇴하여 농성 지도부가 사퇴하고 비상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자연발생적인 파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불의의 기습에 지도부를 모두 잃었다. 뿐만 아니라 파업에 적극적인 승무원일수록 늦게 석방하는 등 교란작전에 휘말려 파업대열이 급속히 와해되고 마침내 7월 28일 열차운행이 완전히 정상화되는 참패를 맛보았다. 승무원들의 투쟁의지가 매우 높았지만 급조한 지도부는 지도력과 경험이 매우 부족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 현장의 지도부도 일거에 연행되어 미리 석방되는 대오를 수습할 길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파업은 88올림픽 개최 50여일을 앞두고 축제분위기 조성에 여념이 없던 노태우 정권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이 과정에서 알려진 철도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조건과 근무환경은 파업으로 놀란 국민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파업은 해방 뒤 현장 철도 노동자들에 의한 최초의 대중투쟁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당시 어용 철도노조 집행부는 파업 뒤에도 노동자들이 경찰에 대거 연행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불법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매도하였다. 철도 노동자들은 이 파업과정에서 민주노조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투쟁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운동에 투신하였다. 철도 노조 민주화투쟁의 주력대오가 이때 형성되었다. 가족들은 열흘간의 농성기간과 파업기간 동안 폭발적인 호응을 보여 가족 투쟁위원회를 스스로 만들어 냈으며, 농성장의 식사조달은 물론 주저하는 기관차 승무원들을 독려하는 등 투쟁의 주력으로 가담하였다.
그러나 88년 파업투쟁은 철도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불만을 조직하지 못하고 기관차 승무원들의 투쟁만으로 귀결되는 한계를 보였다. 지도부도, 승무원들도 전체 철도 노동자들을 단결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하였다. 특히 농성기간중 기관차 승무원들의 요구를 전체 직종의 요구로 통일시키려는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부족하여 파업이 임박하여 농성에 합류하는 구내원, 검수원, 열차승무원들을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덤빈다’며 오히려 막는 한계를 보였다.
다. 전지협 결성과 총파업
1) 전기협 결성과 그 활동
88.7.26철도기관사 투쟁은 당시 19명의 기관차 분회장중 2명만이 참여한 평조합원 중심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으로 11명이 구속되었는데, 철도노동자들은 8월 8일 신속히 ‘구속자 가족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후원회에는 전국의 기관차 승무원중 90퍼센트 이상이 참여하였다.
89년 상반기 실시된 총선거에서 파업 투쟁시 등을 돌린 분회장들은 대부분 낙선하였고, 대신 열심히 투쟁한 평 조합원이나 후원회 대표들이 대거 분회장으로 당선되었다. 89년 5월 15일, 전국기관차 분회장협의회(약칭 전기협)가 설립되었다. 전기협은 설립초기 기관차 분회장들의 회의체로 구성되었지만 91년에는 기관차 승무원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대중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어용 철노 집행부를 대신하여 기관차 조합원 대중들이 스스로 자주적인 조직을 결성한 것이었다.
전기협은 철도노동자들의 권익투쟁, 철도청 부당인사 저지 등 투쟁들을 통해 기관차 승무원들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하면서 기관차사무소 조합원 대중들에게 지도력을 강화해 나갔다. 전기협은 산하 지부 간부들의 교육, 선전, 조사, 토론 등의 활동을 통해 조직력을 강화하였다. 92년부터는 직선제규약개정을 주장하며 대의원 대회때마다 철도노조 집행부측 대의원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전기협은 기관차 승무원 위주로 활동이 전개되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94년부터 기관차 (기관차지부 소속)검수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다. 기관차 지부외의 민주노조 운동도 꾸준히 발전했다. 92년 노조 총선거에서는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한 공동선거대책협의회(공선협)’를 구성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이때 함께했던 수도권 지부들이 뭉쳐 ‘서울 민주지부 협의회(약칭, 서민협)를 구성하였다. 서울 지역은 92년 유광배 서울 전동차 지부장을 민주후보로 출마시켜 과반수에서 4표 차이로 낙선하였으나, 서민협은 이후에도 치열하게 활동을 벌여서 93년에는 서민협이 주축이 되어 서울 지방본부 위원장을 불신임하였으며 보궐선거에서 유광배 민주후보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2) 서울, 부산지하철노조 민주화투쟁
89년 3.16파업 이후 지하철노조는 1년반 이상을 정권의 탄압에 맞서서 굳건히 싸웠다. 이 시기 지하철노조투쟁은 민주노조로서 원칙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정권은 지하철노조 파업기간에는 청와대 담당 수석과, 관계 장관, 서울시장, 검찰, 경찰, 안기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구성, 탄압책을 세웠다. 파업 이후에도 민주노조의 구심에 선 서울지하철노조를 파괴하기 위해서 당시 노동부장관 최병렬이 앞장서고, 안기부 조정관을 공사에 상주시키며 노조활동을 탄압하고 공작하였다. 3.16파업과 이후 정권의 탄압에 대한 지난한 투쟁과정에서 수많은 활동가와 간부들이 양성되었다. 그러나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조합원들은 차츰 지치게 되어, 91년 봄 제 4대 집행부 선거에서 기관의 조정과 공사의 지원을 받은 노사협조주의집행부가 등장하였다. 제4대 강진도집행부는 임기 첫해부터 조합원의 불신을 받아서 91년 임금협약안은 부결되었다. 위원장은 공사간부와 함께 공사 광고입찰부정에 개입하였고, 다시 불투명한 방식으로 주택조합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92년 임단협안 역시 부결되었음에도 집행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현장 조합원과 활동가들은 집행부 퇴진투쟁을 벌였고, 결국 집행부는 조합원 97%의 압도적 불신임으로 퇴진하고 김연환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은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고양된 분위기 속에 이듬해인 88년 2월 16일 설립됐다. 당시 노조 설립 주축 세력은, 공채가 아니고 철도청출신으로서 서울지하철노조와 같은 역동성을 보이지 못하고 수동적이었고, 심지어는 어용화의 길을 걸었다. 87년 말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부산교통공단법을 제정해 부산지하철은 88년 7월 1일부로 부산시 산하에서 건설교통부 산하 로 넘겨졌다.
92년 4월 제3대 김정삼집행부가 한국노총 산하에 구성된 전국철도연맹 가입을 기도함으로써, ‘부산지하철민주노조실천협의회(약칭, 지민협)를 중심으로 가입 저지투쟁이 전개되었다. 지민협을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92년 11월 17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철도연맹 가입이 유보되었다. 그러나 집행부는 상당수 대의원들을 포섭, 93년 1월 19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또 다시 철도연맹 가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 이후 같은 해 10월 집행부가 조기 퇴진함에 따라 철도연맹 가입은 사실상 저지되었다.
철도연맹 가입 반대투쟁을 계기로 지민협은 노민추로 자연스럽게 위상을 세워갔다. 93년 3월에 있은 대의원선거에서는 13명의 회원 중 10명이 출마하여 9명이 당선됐다. 조합원들은 어용노조집행부에 대한 반감과 김창갑 공단이사장의 억압적인 경영, 그리고 김영삼정권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으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김정삼집행부가 조기 퇴진하고 10월 13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선거 결과는 완전 물갈이였다. 위원장선거에서는 4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후보인 강한규후보가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됐고, 7개지부 중에서 전 집행부 출신은 차량지부장이 유일했다.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3) 전지협결성과 총파업
94년 3월 16일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지하철노조를 가맹노조로 하고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을 참관단체로 하는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가 발족하였다. 전지협은 출범시 ‘연맹’으로 호칭하지 않고 ‘협의회’로 호칭하는 데서 시사를 얻듯이, 참가단위 사이에서 강력한 행동통일을 이룬 단일조직의 역할을 해낼 것으로 상정되지 않았다. 조직결성 초기 상호교류와 이해, 연대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고, 철도 전기협이 합법노조가 아닌 관계로 가입 아닌 참관으로 참여하였고, 강력한 투쟁을 해내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전지협이 결성되고 공동사업과 공동투쟁을 논의해 가는 과정에서 전지협은 강력한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
전지협공동파업을 강력히 밀어올린 것은 전기협이었다. 전기협은 전지협의 정식 성원이 아니고 참관형식으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합법적인 노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지 실질적으로 노조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88.7.26파업 이후, 탄압을 뚫고서 전기협은 철도기관사가 전국적으로 참여하는 조직으로 발전해 있었다. 88년 기관사만의 파업에 그친 것을 극복하려고 노력, 차량과 전기, 역무 등 타 부서의 참여도 일정 정도 이끌어내고 있었다. 88년 기관사만의 요구에 머물렀으나 이제는 철도노동자 전체의 보편적 요구인 24시간 맞교대를 3조2교대로 근무형태변경하고 하루 12시간 노동을 즉 8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할 것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여 근로조건을 개선할 것을 주된 요구사항으로 내걸게 되었다.
서울지하철과 부산지하철은 노동조합 결성 이후에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고, 직제개편을 이룩하고, 근로조건개선과 임금인상이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철도노동자들은 노조가 없었으므로 아직도 이러한 근로조건개선과 열악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철도노동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파업투쟁에의 의지를 드높였다.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전지협’이라는 조직적 존재가 철도노동자들의 사기를 더욱 높였다. 서울, 부산지하철과 전기협노동자들은 교섭, 결의대회, 대내외선전선동, 준법투쟁, 쟁의절차 등의 공동투쟁 단계를 밟아 가면서 차츰 공동파업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공동투쟁은 철도, 지하철노동자들에게 승리의 전망을 주고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공동투쟁의 핵심 요구는 , 전기협의 변형근로제 철폐 및 8시간 노동제 쟁취와 서울지하철과 부산지하철의 3% 정부 임금가이드라인 철폐로서 이 투쟁은 자연히 대정부 공동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노경총합의의 외양을 띈 노동계 일반에 대한 정권의 임금 억압책이 노동자 대중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직접적으로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정책이 강요된 공기업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서울지하철은 전지협 이외에 서투노협을 활용하고, 서울대병원, 기아차, 한국항공 등과 서울지역 4사노조 대표자회의로 연대전선을 구축하였다.
전지협공동투쟁은 요구내용은 달랐지만, 파업을 건 공동교섭과 공동투쟁으로 진행되었다. 김영삼정권은 경쟁력 강화를 내세워 ‘무쟁의 원년’을 발표하고 있었다. 94년 4월 21일 서울, 부산 지하철이 첫 교섭에 착수한 것을 시작으로 6월 1일 쟁의발생결의와 8일 쟁의발생신고를 동시에 했다. 교섭과 투쟁이 진행되면서 조합원의 투쟁의지도 높아갔다. 전지협공동투쟁의 열기도 높아갔다. 6월 2일 서울 종묘에서 서울지하철과 서울, 대전 등 중부권 이북의 전기협 조합원 5천명, 6월 4일 부산역에서 부산지하철과 부산 대구지역 전기협 1천5백명 노동자들이 모여서 공동투쟁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6월 15-16일 같은 날 각기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하고 6월 16일 전기협 용산전동차지부 교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7일 새벽04시부로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서울, 부산지하철노조와 전기협의 공동투쟁 전체를 무시하고 요구를 외면하던 정부는 투쟁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서, 서울, 부산 지하철은 (3%임금 가이드라인을 깨지 않는 조건으로) 수당인상 등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전기협은 치는 분리대응 정책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전기협은 합법노조가 아니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교섭마저 거부하였다. 철도노동자들의 주된 요구인 근무형태변경, 노동시간단축, 8시간노동은 막대한 인원충원과 비용증대가 초래되는 것으로써 정부는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분리 타격전술을 서울, 부산 지하철노조가 수용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정부는 철도청 공사전환시 5318명의 감원을 계획하는 한편, 철도청이 제시한 6.18 철도처우개선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기협이 27일 파업을 강행할 경우 파업주동자를 해고하여 감원효과도 보겠다는 강경일변도의 진압책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 부산 지하철의 요구를 상당폭 수용하면, 서울, 부산 지하철노조지도부는 파업을 강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6월 21일 김영삼대통령은 청와대 행정비서관들과의 면담에서 불법, 폭력시위에 대한 과감한 대처를 지시했고, 정부는 전기협에 대한 사전 침탈을 기도, 23일 새벽 03시 40분 용산정비창을 비롯하여 전국의 철도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철도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해 가기 시작하였다. 공권력의 침탈로 철도는 자동적으로 파업에 돌입하였다. 전국의 열차가 일시에 멈추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23일 저녁 조합원 비상총회를 개최, 24일 04시부로 파업에 돌입하였다. 부산지하철노조는 25일 파업에 돌입하였다.
서울지하철은 건국대, 영등포산선, 명동 등에 일부 대오가 들어가고, 경희대에 들어간 대오가 경찰의 침탈을 받아서, 고려대로 이동하며 경찰병력과 투쟁하였고, 지도부는 마포에 있는 민주당사에서 전체 상황을 통제하였으나, 파업 수일이 지나서 모두 명동성당으로 집결하였다. 전기협은 서울 기독교회관에 들어가 거점농성을 벌였으며 그 외 조합원들은 경찰의 연행을 피해 산개투쟁에 돌입했다. 부산 지하철은 산개하였다가 동아대학교에 집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부산대학교에 집결하였다.
전지협 3사 노조의 투쟁은 6월 26일까지 완강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언론, 경찰 등 정권과 자본의 총체적인 탄압에 투쟁대열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6월 26일 기독교 회관에 경찰이 투입되어 전기협농성자 전원을 연행하며 파업 가담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연행과 직위해제가 들어오자 파업이 점차 무너져 갔다. 6월 27일 명동성당 진입투쟁에 실패한 전기협은 조계사를 2차 집결장소로 정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였다. 전국의 투쟁전선은 급격히 허물어지고 이를 바로잡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6월 28일 사실상 전기협 파업대오가 무너지고, 6월 30일이 되어서 서울지하철 역시 파업대오가 급속히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6월 30일 밤 조합원 총회에서 서울지하철 전 조합원은 7월 1일 04시부로 현장에 복귀하도록 결정하였다. 전기협 역시 7월 1일부 복귀명령을 내렸다. 부산 지하철은 7월 2일 복귀하였다.
전지협공동파업은 무엇보다도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정책과 전기협 파괴기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정부의 전기협과 서울, 부산 지하철 분리대응 전술에 넘어가지 않고, 전기협침탈과 함께 동맹파업에 돌입함으로써 궤도노동자, 나아가서 노동자계급의 연대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전지협결성 3개월만에 공동파업을 조직해낸 것은, 전기협에 참여하고 있는 서울과 부산 지하철, 전기협이 민주화되고 지도부와 조직력에서 탄탄함을 보여주고, 특히 전기협이 합법조직이 아님에도 철도 기관사와 일부 차량 노동자의 대표체로서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궤도노동자들의 동질성의 토대가 대단히 강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파업투쟁으로 서울지하철은 구속수배 18명, 해고된 집행간부 25명을 비롯하여 직위해제 87명, 직권면직 30명으로 한 때 해고상태인 조합원이 110명을 넘어섰고,전기협은 7.5일 직위해제자가 440명이었다. 부산지하철은 10명 구속, 13명 해고였다.
라. 공노대건설과 공공 5사투쟁
93년 집권 첫해에 김영삼정권은 신경제정책을 발표하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본격화한다. 대외개방, 탈규제, 유연화가 그 기본적 방침이 되었다. 노동정책에서는 민간부문에서는 ‘노경총합의’라는 자율성의 외양을 띄고, 공공부문에서는 ‘임금가이드라인’을 설정, 정부가 직접적으로 통제하였다. 구조조정에서는 정부와 공공기관(공사)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노조를 골라서 약한 고리를 치는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94년 6월 전지협파업에서 철도노동자의 근무형태변경-8시간으로 노동시간단축과 더불어서 ‘3% 정부 임금가이드라인 철폐’문제가 핵심으로 등장하였고, 04-05년 한국통신투쟁에서 중심이슈가 된 것이 통신산업민영화-사유화, 해외매각, 구조조정반대였고, 96년 이후 조폐공사 전임자수축소와 구조조정저지투쟁이 그것이었다. 김영삼정권은 95년말 WTO에 가입하고, 96년 말에는 OECD에 가입하면서 신자유주의 개방과 구조조정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진영은 민주노조 총단결전선 구축을 본격화하였다. 91년 봄, 여름 ‘대기업노조연대회의’탄압규탄투쟁과 연이은 박창수열사 공작살인규탄 공동투쟁과정을 거쳐서 91년 가을에 구성된 ILO공대위가 93년 5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로 발전하였고, 전지협파업투쟁 이후인 94년 11월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마침내 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을 결성하게 되었다.
94년 민주노총 소속의 서울지하철과 공익노련, 중간노조들인 정부투자기관노동조합연맹(정투노련)이 중심이 되어서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를 구성한 것도 이러한 정부의 공기업 임금통제와 구조조정에 공동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노대는 94년 전지협파업이 끝난 이후 10월에 조직되었다. 민주노총 소속 서울지하철과 사회보험노조, 조폐공사노조, 공익노련과 중간노조인 정투노련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한국통신 노조가 처음에는 참관으로, 곧 정식 구성원으로 참가하였다. 정투노련에는 도로, 주택, 수자원, 토지, 광업진흥, 관광공사와 한전기공 등 다수의 정부 투자기관노조가 소속되어 있었다. 공노대 소속 노동자는 13만, 참관이 2만정도였다.
5만명 조합원을 가진 한국 최대 규모 노조인 한국통신노조는 수년간의 노조민주화투쟁 끝에 94년 6월 중앙 임원, 지방본부 임원, 500여개 지부장 등을 런닝메이트로 한 동시 선거를 통해서 투표자의 2/3를 득표 민주집행부가 세워졌다. 한국통신노조는 95년 한국통신 민영화, 해외매각 저지를 내걸고 역동적인 투쟁을 벌임으로써 95년 노동자투쟁의 중심을 이루었다. 4월 2일 보라매공원에 4만여명의 조합원이 모여 전진대회를 개최하는 등 파업을 불사하는 역동적인 투쟁으로 김영삼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김영삼정권은 한국통신노조를 ‘국가전복세력’이라 부르며 집행간부들은 고소고발하는 등 집중 탄압하였다. 한국통신노조 집행간부 13명은 5월 하순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농성에 들어가고 명동성당에 상황실을 설치하였다. 공개적인 대정부투쟁본부를 설치한 것이었다. 투쟁은 집회, 시위를 통해서 뿐만아니라 매스컴을 통해서 치르는 여론전의 형태로 정부와 한국통신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의 전면전으로 상승하였다.
김영삼정권은 6월 6일 명동성당과 조계사 농성중인 지도부 13명을 강제 연행함으로써 명동성당, 조계사측과 카톨릭과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각계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만명의 신부, 수녀, 교인이 집회를 개최, 인권탄압, 민주주의 억압, 성소침탈, 종교탄압을 규탄하며 일어섰고 각계각층의 치열한 비판이 쏟아졌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국통신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하는 대신에 긴박한 김영삼정권과의 대치전선을 해제하고, 오히려 쟁의발생신고 등 통신공사 사용자와의 임단협을 위한 합법적인 쟁의행위로 전환한 이후, 한국통신노조 투쟁은 급격히 약화되고 정부와 공사는 임단협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한국통신노조는 7월 30일 부산역집회에서 쟁의행위를 해제, 위원장은 자진 출두하게 되었다.
96년투쟁은 공노대 공공 5사 공동투쟁과 기타 공노대 참여 노조들이 연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총파업을 포함한 연대투쟁에 참여한 노동조합은 서울, 부산지하철을 비롯하여 한국통신, 사회보험, 조폐공사 등이었다. 투쟁이슈는 해고동지원직복직, 실질임금쟁취, 전임자축소저지, 민영화 및 구조조정저지와 고용안정 등이었다. 서울, 부산지하철은 94년 전지협총파업을 통해서 한국통신은 95년 통신민영화를 추진하는 정부와 대결을 통해서 커다란 역량손실을 겪음으로써 공공 5사의 투쟁력은 탄탄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공동투쟁을 통해서 각자가 지닌 취약점을 보완하고 전체적 투쟁력을 강화해내었다. 공공 5사는 각 사업장별로 임투준비과정을 통해서 조합원의 동력을 모아내면서 공동투쟁의 프로그램을 실천해 갔다. 1월 11일 위 5사와 KBS노조를 포함한 공공 6사 간부수련회, 3월 23일 공공부문 노동자 임투결의대회, 5월 18일 공동투쟁승리를 위한 공노대 간부결의대회를 개최하면서 투쟁분위기를 높여내었다. 6월부터는 본격적인 공동투쟁절차를 진행하였다. 6.2공노대조합원총회, 6.4공공 5사 공동쟁의발생신고, 6.11-13공동 쟁의행위찬반투표, 6.13공동 기자회견, 6.15공공부문투쟁승리를 위한 결의대회를 거쳐서 6월 20일에 공공 5사는 요구조건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6월 21일 새벽 공동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포하였다.
공공부문 공동투쟁은 침체해 있던 96년 전체 노동계 임투분위기를 고양시키는 기폭제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공공부문의 결의에 찬 파업투쟁이 앞장서 진행되면서 자동차연맹과 금속연맹이 시기집중투쟁에 합류하였다. 특히 자동차연맹은 공공5사 파업투쟁 돌입시기 다음날 파업투쟁을 배치함으로써 위력적인 두 투쟁이 합류할 것을 우려한 정부가 공공 5사노조의 요구내용을 상당폭 수용함으로써 해결토록 하는데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공공 5사 투쟁에는 해고동지들이 선도투쟁을 해냄으로써 해고노동자문제를 사회적 이슈화하였다. 공공노동자투쟁은 해고자복직을 완강하게 반대하던 정부방침을 변경하여 상당폭 수용케하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공공5사투쟁은 또한 김영삼정권과 민주노총이 노개위 교섭국면을 진행중인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민주노총 권영길위원장이 명동 공공 5사농성장에 합류, 농성에 들어갔고, 정부와의 접촉을 맡았다.
공공 5사투쟁은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해고자문제를 사회문제화시켰고, 정부정책을 바꾸어서 민영화와 전임자축소, 구조조정 기도를 저지하거나 유보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상당한 수준의 공동투쟁을 실현한 것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궤도노동자들은 택시, 버스 노조 민주화투쟁과 밀접한 연대를 해 왔고, 화물운송노동조합연맹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다. 95년이 되어서 궤도노동자들과 화물연맹, 민주택시연맹(준), 민주버스노조(준)대표들이 운수노조대표자 협의회를 구성하여 연대활동을 강화하고, 운수산별노조건설의 전망을 모색하였다. 운수노조대표자 협의회는 95년 가을 서울과 부산에서 운수노동자학교를 개최하여, 간부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고 연대를 강화하였다.
4. 노조민주화와 구조조정저지투쟁
가. 자본의 총공세와 노동운동의 패배와 퇴각
민주노조 총단결 조직, 50만 민주노총의 건설로 노동자계급 대중은 비로소 권력과 자본-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탄생과 함께 민주노총은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두 가지 주요 과제를 설정하게 되었다. 노동법개정 또한 노동자계급 대중의 권익 확대, 조직력 강화를 위해서나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도 주요한 과제였다. 96년말-97년초의 역사적인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이 가능하게 된 것도 민주노총이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파업은 오만하고 위선적인 김영삼 독재정권의 가면을 벗겨내고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보수야당과 재벌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어진 한보 김현철 대선자금 사건과 함께) 정경유착의 구조를 폭로하였고, 지역감정에 의존하는 부패한 보수적 붕당구조 자체에 타격을 가하였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을 높임으로써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이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96년 12월 26일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저항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진영의 강력한 총파업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법개정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96년 초 이후 1년여에 걸친 노개투는 97년 3월 10일 여야 합의에 의한 전면적 노동법 재개악으로 일단락되었다.
95년 민주노총 결성으로 비로소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전선이 구축된 시기에 민주노총은 공세적 노동법개정 투쟁을 전개하지 않고, 오히려 조직의 안정화라는 구호로, 민주노총 합법화에 매달리면서 대단히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김영삼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기만공세에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정권의 하위 동반자의 위치에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참여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출발 시점부터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노동운동의 패배와 퇴각은 실은 역설적이게도 민주노총의 결성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과제인 민주노총의 탄생과 함께 제일차적인 핵심 과제였던 노동법개정투쟁의 실패로 민주노총은 처음부터 기세가 꺾이고 전진이 장해를 받게 되었다.
세계적인 자본의 신보수주의적 공세, 자본의 전지구화, 신보수주의적 재편과정에서 하위적 편입 재편을 강요당하는 남한 독점자본의 부담은 노동자계급대중에게로 전가된다. 자본의 합리화 효율화 민영화 경영혁신은 자본의 세계화 경제위기 이데올로기로, 신경영전략을 통한 노동자의 임금억제 노동강도강화 고용불안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한 통제와 노동조합의 약화기도로 나타나게 된다. 기만적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앞세운 전면적 노동법개악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현장의 노동운동을 화석화하고 노동조합 상층을 개량화 관료화함으로써 노동조합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노동운동은 그 투쟁성, 변혁성, 계급적 정체성을 잃고 활력을 상실해 갔다.
97년 11월 IMF구제금융사태가 닥쳐오고, 한국경제는 IMF관리하의 공황상황이 전개되었다. 자본은 공황상태에 빠진 재생산구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급격한 구조개편을 진행하였다. 막대한 과잉자본이 폐기되었다. 자본의 위기는 노동에 전가되고, 노동력의 값 역시 급격히 떨어뜨리고 노동조건을 악화시켰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관계법 개악과 정부의 통제강화, 구조조정강요, 임단협의 개악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공격해 왔다. 이러한 자본의 거센 공격에 대해서 노동운동은 자신의 전략적 계획 아래 전 계급적인 대항전선을 치지 못하고, 자본의 공세에 끊임없이 수세적 투쟁에 내몰리고, 각개 격파당해서 패배, 퇴각하고 무력화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은 개량화를 강요당하고 일부 노동자와 간부는 관료화, 특권화해 갔다.
97년 3월의 정리해고법제화를 비롯한 노동법의 전면적 개악 이후, 98년 2월 민주노총은 다시 김대중당선자가 주도한 노사정위원회 가입을 결정하면서 정리해고제 개악 및 즉각 실시와 근로자파견제 입법화에 동의하였다. 이 방침은 이의 승인을 위해서 개최된 민주노총 임시대대회에서 부결되고, 임원 총사퇴 이후에 총파업을 결정,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총파업집행을 위임하였으나, 비대위는 총파업을 수행치 못하고 주저앉았다.
IMF공황하에서 금융산업과 공기업 구조조정법을 통과시키고 수많은 금융기관과 공기업이 구조조정되고,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자행되었다. 민간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부실기업의 통폐합과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먼저 몰아닥친 5개 은행 폐업을 비롯한 금융산업 구조조정이 실행되고, 이에 대항한, 금융노동자 정리해고 반대투쟁에서 패배한 것을 비롯하여, 기아, 현대, 만도, 대우 등 자동차산업노조와 한국중공업, 부산지하철, 한국통신, 조폐공사, 서울지하철, 한국전력 등 공기업도 차례차례 깨어져 갔다. 연구소도, 써비스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대기업노조들이 급속히 피폐화하고, 개량화, 화석화되어 갔다. 자본의 현장 지배력은 크게 높아졌다.
자본의 공세는 법, 제도의 개악, 임단협 개악, 대량해고, 대량실업, 임금삭감, 근로조건 악화, 노동강도 강화, 변형근로제와 정리해고, 비정규직화에 의한 노동유연화, 이데올로기 공세 등등 총체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규직을 무한대로 비정규직화하면서 노동자대중에 대한 착취도를 높이고, 노동자대중의 분열과 차별화를 강화하고,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는 것이 자본의 전술 핵심으로 이용되어 오고 있다. 판매, 써비스직뿐만 아니라 제조업 대공장, 공기업과 교사, 공무원마저도 광범위하게 비정규직화가 진행되고 있다. 청년 취업은 격감하고, 대기업의 고용인구는 크게 축소되고, 이동성이 심하고 열악한 비정규직 형태의 중소, 영세규모 노동자가 급증하였다. 이제는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과 비정규직의 노조결성금지 등으로 인해서 사실상 파업능력조차도 무력화되고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서울지하철은 96년 12월 28-9일 노개투총파업에 참여하고, 다시 1월 15-6일 총파업에 참여하였고, 부산지하철은 96년 12월 29일 파업에만 참여하였다.
나. 부산지하철 1인승무 저지투쟁
공단은 94년 하반기부터 부산지하철 2호선 개통(98년 상반기)을 대비해 직제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96년 임투와 연계해서 ‘직제개편시 노조와 합의 후 시행’을 요구하며 직제개악 저지투쟁에 본격 나서, ‘노사직제개편추진협의회’ 구성을 합의하였다. 이후 2차례의 ‘직제개편추진협의회’가 열렸으나, 공단은 직제개편에 대한 최종안을 제시하고 사실상 일방 추진을 기도하였다. 공단이 제시한 직제개편의 핵심은 경영합리화를 핑계로 한 1인승무제 실시, 외주용역 등 인원감축에 의한 인건비 절감이었다. 노조는 총력투쟁을 결의하고 조합원 조직을 위해 96년 10월 30일부터 임원진 단식과 천막농성 투쟁에 돌입, 노개투총파업 시기를 이용 29일 파업에 들어갔으나, 다른 지부의 반발로 승무지부 중심으로 하루로 끝남으로써,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안삼렬 집행부는 곧 바로 총사퇴했다.
97년 초 6대 범민주연합후보 집행부가 선거를 통해 들어섰다. 새로 이사장이 된 곽만섭 공단 이사장도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여서, 97년 9월 말 직제개편 추진과 관련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시행키로 노사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3월말까지 노사가 합의 선정한 부산대 부설 경영경제연구소(소장 황한식)의 연구용역이 실시됐다. 그러나 연구용역 결과가 공단의 의도와 다르게 나올 조짐이 보이자, 공단은 부산대 연구용역을 무시하고 1인승무를 추진했다. 이에 노조는 98년 3월 12일 파업의 배수진을 치고 공단과 최종 담판에 나섰다. 노조·공단·시민중재단의 합의형식을 갖춘 합의 내용은 “1호선 1인승무 문제는 부산대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고, 2호선은 별도의 연구기관에 맡겨 그 결과에 따른다”였다.
우여곡절 끝에 맺은 3.12합의는 5월 경 건설교통부의 직제 승인 불가로 사실상 파기 상태에 이른다. 그동안 DJ-JP연합정부 건교부장관이 강경한 JP계로 바뀌고, 따라서 공단 이사장도 곽만섭에서 JP계인 김창원으로 바뀌었고, 새 이사장은 7월 1일 2호선 개통에 맞추어서 1인승무를 포함한 직제개편을 일방적으로 강행하였다. 노조는 7월 3일 동래역 선로를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곧 이어 투입된 경찰에 의해 선로점거농성 조합원 600여명 중 500여명이 연행돼, 이중 14명이 구속되고 나머지는 이틀만에 풀려났다. 풀려난 조합원들은 승무 조합원을 중심으로 노조 비대위가 마련한 카톨릭센터로 속속 모였다. 승무조합원은 야간을 이용하여 극비리에 열차편으로 상경하여, 이튿날 새벽 서울지하철노조로 들어가서, 12일 동안의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이 때 승무지부 파업을 주동한 것은 1호선 3단계 개통을 위해 93년부터 지하철에 들어온 공단 공채 4기, 5기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서울농성 조합원들은 부산으로부터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농성장을 빠져나와 부산으로 복귀하는 조합원 수가 늘어갔다. 결국 서울 농성대오는 14일 조건없이 복귀했다. 구속 14명, 해고 32명(최종 23명)의 상처를 남기고 7.3파업은 끝났다.
부산지하철 직제개편 저지투쟁의 한계는 부산지하철 4개 지부 전체의 요구를 이슈화한 투쟁으로 계획 추진하지 못하고, 승무지부 단독 이슈투쟁화함으로써 타 지부와의 공동투쟁이 실질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필연적인 파업투쟁을 예상하고 철저하고 계획적으로 이에 대비하지 못한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94년에 이루어졌던 전지협공동파업이나, 96년의 공공 5사 공투같은 공동투쟁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다. 서울지하철 99년 4.19파업투쟁
99년 4월 19일 서울지하철노조 파업은 수세적인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IMF관리하의 공황상황에서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제는 98년의 최악 상황을 벗어나서 99년부터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재벌, 공공, 노동, 기업 4개부문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진행되고 있는 김대중정권의 구조조정 정책은 더욱 강경한 공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시철도는 개통시부터 1인승무와 차량중정비 하청화 등 구조조정이 된 형태로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으므로 별개로 하더라도, 98년 여름 1인승무 등 부산지하철 구조조정을 강행한 자본은 99년 서울지하철을 공격해 들어왔다. 연초부터 3천명 인원을 감원한다는 등 공사의 구조조정계획이 공공연하게 되었다.
2월 12일 단체교섭에서 공사는 서울시의 구조조정계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공사는 서울시 구조조정 지침 51개항을 포함시킨 99단체협약안을 노조측에 교섭안건으로 다룰 것을 거침없이 요구하였다. 명예퇴직 강제시행, 사규 개악, 정년단축 기정사실화, 학자금 지급중단과 융자제도로 변경, 기 합의된 체력단련비 지급 불이행등을 요구하고 이미 이들 조치들을 실행하기 위해서 사규를 일방적으로 개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체교섭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는 없었다. 3월 12일 제2차 단체교섭에서 공사는 똑 같은 태도를 취함으로써 단체교섭은 더 이상 열리지 않고 4월 18일 파업 전야까지 실무교섭만 13차례 열렸으나 해결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3.13 통합 공공연맹 창립 대대회가 열렸다. 공공연맹과 민철노련, 공익노련을 통합 10만 공공연맹이 탄생하였다. 4월 18일 서울시에서 노사정 실무교섭을 개최하고, 신계륜 정무부시장과 마지막 교섭을 하였으나, 타결을 보지 못하고 4월 19일 파업에 돌입하였다. 파업대오는 명동성당과 서울대에서 4월 26일까지 9일동안 강고하게 유지되었으나 4월 26일 사회보험노조와 함께 파업에 들어가기로 한 한국통신노조 파업이 철회됨으로써 급격히 무너져 내려, 4월 27일 저녁 파업을 철회하고 복귀를 선언하였다.
99년 4월 19일-27일 파업투쟁은 승리를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3300명 인원감축(나중에 1621명으로 수정)등 지하철의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저지해 내었다. 동시에, 공공연맹 민주노총 구조조정 저지전선의 주력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일정한 정도 저지, 지연시켰다. 그럼으로써 많은 사업장 노조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저지투쟁 및 임단협투쟁의 승리를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10월 하순 배일도씨가 지하철노조 제9대위원장으로 당선되자 상황은 일변하였다. 그것은 바로 정부와 서울시(서울지하철공사)의 구조조정의 전면 수용으로 나타났다. 1999년 12월 30일 가 조인된 임단협에서 1621명의 인원 감축, 근무형태 개악, 변형근로제 도입, 직원자녀 대학학자금 지급폐지, 정년 1년 단축 등 서울시와 공사측의 구조조정 방안을 수용하였다. 근무형태 개악 내용은 역무 4조3교대 근무를 3조 2교대 근무로 개악하는 것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월 1개의 휴일이 감소되고, 근무시간이 연장되고 휴식, 휴게시간이 축소됨으로써 노동강도가 강화되는 것이었다. 변형근로제의 도입으로 근무가 한층 더 불규칙해지고, 야간 휴일근무에 대한 수당이 감소되었다.
대신에 임금은 서울시 도시철도공사 수준으로 인상하고, 그동안 적체되었던 승진소요연수 3배수 경과자 2200여명을 승진시키는데 합의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상당액수의 보수 상승효과를 보았으나 그것은 인원감축으로 인해서 1년간 발생하는 총비용으로 상쇄되는 수준이었다.
5. 철도노조민주화, 민영화 구조조정저지투쟁
가. 철도구조조정과 민영화추진과정
89.12월에, 정부는 93.1월까지 공사화하는 철도공사화법을 제정하였으나, 이를 96.1월까지로 연기하였다가, 공사화에 따르는 재정부담과중 등을 이유로 95.12.6일 <국유철도운영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여 공사화를 백지화한다.
김대중정권시절인 98.2월부터 철도 기반시설(건설부문)과 운영부문을 분리 민영화하는 방침을 결정 추진하여 99.3월 국무회의에서 <철도정책 및 투자결정>은 건교부에서 맡고, 철도청의 건설부문과 고속철도건설공단을 통합하여 <철도건설공단>으로 전환하고, <운영부문>은 민영화하여, <선로유지 보수>는 철도건설공단 또는 운영회사에서 맡는 방안을 의결하였다. 98.8월 건교부 주관으로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철도청, 고속철도건설공단 등 관련 부처 담당자와 민간전문가 등으로 <철도구조개혁실무작업단>을 구성하고 구조개혁 실행방안은 연구용역에 맡겼다.
철도청내 경영기획관실에서 민영화에 대비한 조직 및 운영시스템을 개편하기 위해서 98.8.17일 <민영화추진계획>을 작성하였다. 그 계획에 의하면 02.11월까지 한국철도주식회사와 철도건설공단이 발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95년부터 01년 5월까지는 국유철도특례법에 의한 경영합리화 시기인데, 이 시기에 철도 지방청을 폐지하고 사업본부를 도입하였고, 승무직종을 제외한 그 외 분야 외주하청을 실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철도청 영업 분야 3156명, 시설 1953명, 차량 1336명 등 총 7739명이 감원되었다.
철도현장에서는 구조조정, 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과 더불어서 96년 5월 조합비인상반대 투쟁과 00년 범대위투쟁을 통해서 노조민주화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나. 철도민영화저지 노조민주화투쟁
1) <철도해고노동자회> 및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결성
94년 9월 철도 해고노동자회(이하 철해노)가 결성되었다. 철해노는 현장탄압 분쇄와 철도 민주노조 운동을 목적의식적으로 수행할 활동가 조직의 건설을 당면사업으로 정하였다. 95년 2월 마침내 철도노민추가 결성되었다. 철도노민추는 해고자와 전출자, 현장 활동가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95년 노조 총선거승리를 당면사업과제로 결의했다.
95년 서울지방본부 선거에서 민주세력은 과반수에 가까운 대의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위기에 몰린 철노는 직선제로 선거를 치렀던 서울객화차사무소지부를 사고지부로 판정함으로써, 이 여파로 민주세력은 서울지방본부 선거에서 실패했다. 민주세력은 전열을 정비하여 전국 기관차지부장회의를 구성했다. 전국 기관차지부장회의는 해고자후원 사업을 펼쳤으며 6.23일 파업투쟁 기념식을 여는 등 민주노조 운동의 정당성을 적극 옹호하는 등 붕괴된 조직력을 복구하기에 노력하였으나, 결국 이 조직은 96년 조합비 인상반대투쟁에 패배하여 또다시 붕괴되었다.
2) 조합비 인상반대 범대위 투쟁
96년 5월 23일 수안보온천 상록수관광호텔 연차대회에서 철도노조는 조합비를 일방적으로 인상했다. 상여금 지급달에는 2퍼센트를 차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회장소가 충북 수안보의 호텔이었다는 점, 지방본부 위원장들에게 승용차를 지급하기로 한 일이 조합원들의 반철노 정서에 불을 질렀다. 노민추는 곧바로 이 사실을 폭로하고 전국 기관차지부장회의 등 민주세력에게 투쟁을 제안, 전국 기관차지부장회의, 서울객화차, 구로열차. 분당선 역연합지부 등 민주파 지부들은 ‘일방적 조합비 인상 반대와 조합원 찬반투표쟁취를 위한 범지부대책위원회(범대위)’를 결성하였다. 범대위는 6월 13일 ‘조합비 인상반대와 조합원 찬반투표’를 요구하는 조합원서명운동을 펼쳐 과반수에 육박하는 서명을 이끌어내었다. 또 철도노조 앞 항의집회와 용산역 옥외집회 등을 통해 파업투쟁 뒤 처음으로 대중집회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조합원들은 ‘조합비 인상철회’라는 깃달기를 통해 투쟁에 동참하였다. 범대위는 완강히 버티는 철도노조에 맞서 조합 탈퇴운동을 벌이며 조합비 원천징수 거부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범대위는 강경, 온건의 내부분열, 어용철노의 범대위 간부 제명, 철도청의 탄압으로 무너졌다.
범대위투쟁은 94년 파업투쟁의 패배를 딛고 재조직한데 큰 의미가 있는 투쟁이다. 또한 간선제의 폐해를 대중적으로 폭로한 투쟁이었으며 본격적인 노조민주화 투쟁의 서막이 열린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범대위가 법원에 제기한 ‘3중 간선제에 의한 대의원 선출은 무효’라는 요지의 소송은 2000년 직선제 규약개정 투쟁의 단서를 만들었다.
98년 노조 총선거에서 민주세력은 서울지역과 부산지역에 지방본부위원장후보를 내었다. 서울지역은 위원장에 당선되었으나 민주세력은 집행부 구성을 놓고 또다시 분열했고, 위원장은 갈수록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다. 부산지방본부 보궐선거에서 민주파가 당선되었을 때 철도노조는 선거무효를 선언했다. 부산지역의 활동가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즉각 부산지방본부 항의농성에 들어갔으나 고립된 부산지방본부 민주화투쟁은 끝내 활동가들과 간부들이 제명당하며 실패로 끝났다. 99년 서울동차지부에서 축상발열을 둘러싼 현장투쟁이 발발하였다. 이 투쟁에서 서울동차지부 검수쪽은 깃달기, 총회, 서명운동, 단식투쟁 등으로 맞서며 철도청을 압박하였으나 세 명의 간부가 해고당하며 패배를 당하였다. 그 뒤 서울차량지부에서 검수 승무원을 차장으로 배치전환하는데 반대투쟁을 벌였다. 한편 99년 7월 3조직이 통합하여 <철도민주노조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며 민주세력은 착실히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99년 민주세력은 조합원의 생존권과 철도의 공공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민영화 반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철도노동자들의 단결투쟁을 막는 어용집행부를 몰아내고 3중 간선제를 직선제 규약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철도현장은 96년 민영화 방침이 결정된 이래 7,307명의 인원 감축계획을 실시함에 따라 노동강도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었다. 또한 민영화 때 겪어야 할 고용불안심리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3) 공투본의 직선제규약개정 투쟁
00년 1월 14일 대법원은 ‘3중 간선제는 무효’라는 판례를 민주세력에게 선물했다. 96년 범대위가 걸었던 재판이 비로소 끝을 본 것이다. 민주세력은 곧바로 직선제 규약개정 투쟁에 돌입했다. 기관차 승무지부를 중심으로 ‘철도노조정상화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차량과 수도권 운수지부를 중심으로 ‘위원장직선제 및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두 조직은 각각 직선제 규약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결의하였다. 1월 26일 민주세력과 차량지부를 중심으로 진행한 통합작업이 성과를 보여 마침내 두 조직이 통합했다.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가 결성된 것이다. 00년 상반기 내내 철도현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공투본의 직선제 규약개정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공투본은 규약개정 없이 대의원선거를 강행하려는 철노에 맞서 용산 철도노조 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 농성은 무려 66일에 걸쳐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노총에서 동원한 조직깡패나 지역에서 동원한 상집위원들을 농성장으로 들여보낸 철노 집행부에 맞서 세 번이나 농성장 사수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농성 조합원들을 구타하며 빼앗긴 거점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조합원들의 강렬한 투쟁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산지역 또한 지방본부를 접수하여 강력한 투쟁을 조직하였으며 영주, 대전, 순천 등 각 현장에서 어용 철도노조의 총회 소집권자 지명서명을 거부하는 등 전체 투쟁전선이 강화되었다.
공투본은 00년 1월 28일 조합원의 과반수를 넘는(13,339명-52%) 서명을 조직하였으며 몇 차례나 전국 현장을 훑으며 조합원들을 재조직했다. 또한 철도노조의 대의원선거 때는 수백명의 저지단을 파견하여 실력으로 선거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60퍼센트를 넘는 조합원들이 철도노조의 일방적인 대의원선거를 보이콧하며 절차를 무시한 불법적이고 부정한 선거를 규탄했다. 그러나 철노는 찬성란만 있는 투표용지를 사용하여 선거를 강행, 전체 84개의 선거구중 54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내었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3월 7일 경북 울진군 백암면의 관광호텔에서 철도노조 대의원대회가 소집되었다. 이날 공투본은 300여명의 저지단을 파견하여 실력으로 대회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철노는 일방적으로 대회성립을 선포했다. 철노는 공투본 지도부 및 간부 44명을 제명처분하며 김기영 위원장당선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철도노조는 이미 전체 조합원의 요구가 된 전면적 직선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전면적 직선제를 수용, 위원장임기는 보장하고 01년 총선거부터 시행키로 하는 한편, 공투본 간부 30명을 제명하고, 민영화저지투쟁을 하는 명분으로 공투본의 투쟁을 잠재우고자 하였다.
이후 공투본은 서울지방본부와 부산지방본부, 서울정비창, 부산정비창, 대전정비창 대의원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서울 정비창과 대전 정비창을 뺀 나머지 지방본부에서 그들은 대회개최를 회피하며 조직을 넘겨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조직징계와 직무대행 임명을 통해 부산 지방본부, 부산정비창 등을 빼앗았으며 서울지방본부를 사실상 사고 지방본부로 만들었다.
이제 명분과 실력에서 철노 어용세력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철도청의 개입과 탄압으로 철노는 기사회생했다. 4월 20일부터 철도청은 징계를 시작, 12명의 공투본 지도부를 파면처분하였으며 80여명의 조합원을 징계하고 그중 수십명을 전출시키는 등 어용 집행부를 비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였다. 공투본은 이에 맞서 40일에 걸친 용산역 고공 철탑농성, 두 달여에 걸친 부산정비창의 작업거부 및 집회, 농성투쟁, 기습시위 및 서울역 광고탑 농성, 청장의 비리를 알리는 스티커 열차 내 부착투쟁 등 방어투쟁을 펴며 새로 구성될 현장 지도부를 엄호했다. 이 과정에서 정종환 철도청장의 MBC ‘성공시대’방영을 저지하기 위한 기습시위 및 방송국 앞 집회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해고된 공투본 지도부는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에서 열흘간의 쇠사슬 단식농성 끝에 투쟁을 정리하고 조직강화와 민주노조건설의 임무를 현장 지도부에게 넘겨주었다. 2기 공투본이었다.
4) 민영화저지투쟁과 선거투쟁 승리
그러나 3월말부터 공투본은 점차 어용 철노와 협상창구를 트고 철도민영화저지를 위한 투쟁으로 점차 방향을 전환한다. 투쟁전술을 장기전으로 잡고, 투쟁방향을 부당징계철회, 민주철노 건설, 민영화저지의 세가지 슬로건을 내건다. 7월 1일 공투본 전국회의에서 ‘민주철노 건설 및 철도민영화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직형태는 차량, 운전, 창, 운수 등의 각 직종 대표와 서울, 부산, 대전, 영주, 순천 등 각 지역대표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당시 철노는 민영화저지를 위한 각 지역집회를 개최, 10월 30일 대전집회를 시작으로 12월 5일 서울역광장의 운전집회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공투본은 철노가 집회를 개최하면 투쟁대오를 이끌고 참여하지만 조직적 공동전선은 단호히 거부, 독자적으로 현장조합원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서 투쟁하는 방침을 가졌다.
어용철노는 조합원의 투쟁분위기가 고조되자 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00년 12월 10일 철도구조조정계획과 관련하여 노사정위 “공공부문 구조조정 특별위원회”합의문에 서명하고 파업을 철회하였다. 그 합의문은 인력감축과 민영화를 정부의 계획대로 합의하고 다만 구내기관사, 여승무원, 화물열차 1인승무만 유보시키는 내용으로써 철도노동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01년 선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전선이 있었다. 첫째 전선은 지부장 등 상층을 중심으로 선거조직을 만드는 전선이다. 상층전선은 2기 공투본에서 형성된 각 직종대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이 조직은 투쟁조직이기 보다는 회의조직이었고, 12월 10일 철노의 파업철회 이후에도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나, 결국 선거를 앞둔 01년 2월 18일 전국의 32개 지부 1개 지본 7개 비대위로 구성된 ‘생존권 사수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철도노동자 투쟁본부’를 만듦으로써 선거조직으로 구성되게 된다. 이 조직은 3월부터 진행되는 지부선거와 4월과 5월로 이어지는 지방본부와 본조 위원장 선거의 중앙 사령탑이 된다.
두 번째 전선은 조합원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바닥전선을 두텁게 하는 것으로 공투본 해고자들과 전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00년 8월부터 공투본 해고자들은 소식지 ‘바꿔야 산다’를 차에 싣고 지방순회를 시작한다. 순회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전출자들을 만나면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못다 한 절반의 임무인 민주철노 건설의 초석이 되고자 결의를 높였다. 전출자들은 자기 거점을 중심으로 꾸준히 현장순회를 하고 공투본의 이념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공투본 조직은 내용적인 전국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용철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조합원들과 현장간부들과 공투본 간부들이 공투본 시절의 물리적 충돌과정과 철노의 민영화저지집회장 그리고 현장 작업장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선전물 배포에 민주노총 조합원과 공해투 등 해고자들이 광범위하게 결합하였다. ‘공정선거감시단’의 활동은, 조합원의 두려움을 걷어내고 선거의 공정성을 지켜내어 투개표에서 표를 지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감단에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광범위한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3월에 치러진 지부장 선거는 많은 약진이 있었지만, 당선자는 어용 철노와 1 : 1 정도였다. 지방본부위원장선거에서 어용 철노는 부산차량과 부산정비창 선거에서 이김으로써 부산지방본부에서 승기를 잡았다. 공투본 투쟁의 양 날개이었던 서울-부산 중 한쪽 날개가 꺾여 버린 것이다. 민주진영은 이 선거구의 패배를 영지본의 제천차량과 영주차량의 승리로 상쇄시켰다. 영주지방본부의 기반이 흔들리자 철노 위원장의 지위는 더욱 약해지고, 그들은 위원장후보 인선을 두고 끝까지 내분을 벌이게 된다. 대전지방본부와 서울지방본부 위원장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조합원들의 반란이었다.
철도노조 최초의 직선제 위원장선거는 01년 5월 24일 민주파의 압승으로 귀결되었다. 24,865명의 선거인 중 97%의 투표율에 김재길후보가 14,885표(62%), 오금묵후보가 8,792표(34%)를 득표했다.
6. 궤도연대 공동투쟁
가. 궤도사업장 노조민주화와 궤도연대 조직구성
서울시도시철도공사는 94년 3월 15일 창립되었다. 95년 11월 15일 5호선이 개통되었고, 01년 3월 9일 6호선이 마지막으로 완전 개통되었다. 도시철도 창립 이후 곧 어용노조가 들어섰다. 주동자는 서울지하철 노무과장출신이었다. 96년경부터 현장조직이 형성되어 노조민주화투쟁이 시작되어, 99년 초부터 공개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최초 간선제이던 규약이 조합원의 요구가 높아감에 따라서 98년에 2년 임기 직선제로 변경되었다. 02년 당시 위원장은 조합원의 뜻에 반하여 01년 단협과 02년 임금안을 대대회 승인없이 독단적으로 결정, 교섭하고 직권조인함으로서 2/3이상 조합원의 불신임을 받고 물러나고, 02년 10월 선거에서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미 02년 4월과 5월 인천과 대구 지하철에서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 있었다. 이들 노조의 민주화 역시 각 사업장 활동가와 조합원들의 끈질긴 노조민주화투쟁의 결과였다.
02년 11월 6일 철도노조가 민주노총 공공연맹에 가입함으로써 그동안 연대체를 구성하고 있던 지하철 사업장 노조와 함께 궤도연대를 발족하였다. 여기에는 노사협조주의 집행부인 서울지하철노조도 포함되었다. 궤도사업장노조들은 02년 말경 궤도노동조합연대회의(궤도연대)를 구성하였다.
나. 03.2.18대구지하철화재참사와 03년 6월 지하철 공동투쟁
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을 운행하던 전동차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맞은편에서 진입하고 있던 열차와 함께 열차 2개 편성을 불태우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는 192명이고 148명이 부상하였다. 7천억원에 이르는 직간접 재산피해가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참사는 지하철시설과 운영이 안전 무방비임을 폭로하였다. 가연성물질로 차 있는 차내 시설, 차내와 역구내 방화시설 미비, 긴급 피난 시설의 부실, 차내와 사령실과 역간의 지휘통제연락 부실, 역과 사령실의 인력부족, 특히 화재 등 긴급사태발생시 응급조치를 불가능케 하는 1인승무제도, 지하철 직원의 안전교육과 응급대처훈련의 부족, 긴급 지휘통제 시스템의 부실 등이 드러났다. 불완전한 시설과 시스템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자동화된 ATO시스템 역시 화재 등 사고시에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종합사령실과 열차(기관사)간, 역간의 통신체계도 문제였다. 즉 종합사령실에서는 열차내부와 열차가 운행되는 역사와 선로 등 현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지시를 내리고,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승무원)는, 오직 종합사령실에 보고하고 그 지시를 받아서 행동하고,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열차를 운행할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은, 피동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지하철을 운영하는 공사, 시당국의 안전에 대한 무감각과 사고방식이 보다 큰 문제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정부와 시의 부실공사와 구조조정을 통한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가 깔려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에서 본, 부패와 비리로 조형하여 세워진 허황된 성장의 신기루의 붕괴 그것 아닌가? 이것은 바로 이윤에 눈이 어두워서, 시민의 생명을 파리목숨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탐욕스런 자본의 본성이 저지른 죄악이 아닌가? 수많은 민중의 생명을 짓밟고서 특권과 영화를 향유하려는 지배계급의 오만 때문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노동자의 고통과 인권이 아무런 것도 아닌 것처럼, 시민의 편익과 안전 또한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의 행태인 구조조정은 역대 보수정권의 대를 이어서 강화되어 왔다. 이는 김영삼정권에서 본격화되어서 김대중정권에서 IMF관리하의 공황상황에서 무자비하게 집행되었다.
95년 36,816명이던 철도노동자가 01년에까지 7,739명이 줄어서 2만9천여명 정도로 되었다. 도시 통근열차와 교외선 및 분당선을 2인에서 1인승무로 바꾸었다. 차량정비와 시설은 하청 또는 민간위탁을 줌으로써 인원감축, 비용감축을 동시에 꾀하고 있다. 철도는 무리한 인원감축과 열악한 환경속의 가중된 노동으로 02년 한 해 29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 산재사고로 죽었고, 얼마전 전라선에서 또 7명이 희생되었다. 서울지하철은 99.4.19파업의 패배 이후, 00-02년간 11,492명의 정원을 9,871명으로 줄였다. 도시철도공사는 비숫한 시기에 7,944명의 정원을 6,288명으로 줄였다. 부산교통공단은 98년 1인 승무를 반대한 기관사 파업의 패배 이후, 차장을 포함, 5백여명의 인원을 감축하여 3,219명에서 2,662명으로 줄였다. 부산교통공단은 01-2년간 1,2,3호선 역 전부의 매표업무를 무인화하고 있다. 도시철도공사, 인천지하철, 대구지하철은 처음부터 1인승무로 운행하였다. 이 비슷한 기간에 모든 지하철과 철도에서 인원감축과 더불어서 하청, 민영화, 용역, 민간위탁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정년단축, 퇴직금누진제 폐지, 성과급제, 근무형태 개악, 노동시간 유연화, 노동강도강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철도, 지하철운영은 공익개념에서 영업개념으로, 본부장제와 팀제로 바뀌었다. 민간기업과 마찬가지로 저비용과 고이윤이 지하철, 철도운영의 기본적인 지표가 되었다. 대구지하철화재 시설복구비만 1천5백억원, 직간접손실액은 7천억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대구지하철에서 1인승무 등 인원감축과 절약으로 줄이는 비용을 수십년간 쌓아도 이르지 못할 규모이다. 저비용과 고이윤을 위한 자본의 탐욕은 결코 비용조차 줄이지 못하는 것이다. 공익과 시민(인민)의 생명에 대한 존중을 외면하는 지하철, 철도의 건설과 운영, 노동자의 피를 말리는 구조조정으로 시민의 안전과 편익을 외면해온 정권과 자본의 기도를 분쇄함으로써 진정으로 시민 생명의 존중과 공익을 위한, 철도, 지하철을 만드는 것만이 다시는 이러한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사고가 나자 보수수구언론과 검경 등 수사기관은 직접 운전한 승무원과 관련 시설에 근무하는 노동자에게 비난을 퍼붓고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지하철노동자들은 화마에 휩싸인 승객을 구하려다 검수원 2명 등 4명이 죽었고, 12명이 부상, 8명이 구속되었다. 청소용역을 맡은 일용직 노동자들도 여러 명이 죽었다. 지하철참사의 진정한 원인을 밝혀냄으로써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대구지하철노조와 궤도연대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희생자 지원, 선전홍보, 희생자와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항한 투쟁과 더불어서 근본적으로 시민에게안전하고 편리한 지하철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것은 03년 지하철공동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궤도연대는 03년 투쟁을 지하철, 철도안전확보를 중심적 이슈로 투쟁방향을 정하고 공동투쟁을 준비해 갔다. 공동투쟁에는 지하철사업장 중심으로 진행되고, 그 중에서도 서울지하철노조는 참가하지 않고 도시철도, 부산, 대구, 인천지하철노조가 참여하였다. 그 요구사항에는 지하철안전과 함께 지하철을 운행하는 지하철노동자들의 안전문제가 우선적 문제로 되었다. 궤도연대는 3월 19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대구지하철화재참사희생자를 위한 ‘전국 궤도노동자 추모제’를 개최하고, 공동투쟁에 나선 4개 노조는 4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지하철 안전확보를 위한 공동요구안을 발표하고, 공동투쟁을 선언했다. 2인승무제 환원, 용역 및 민간위탁 철회, 전동차내장제 불연재로 전면교체 등 정부가 경영혁신을 핑계로 추진한 구조조정 철회 및 안전대책 예산 확보가 주요 요구였다. 각 단위노조의 상황에 따라 임금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에 대한 요구를 추가하였다. 5월 22일에는 동시에 쟁의발생결의를 하고, 5월 24일 서울역에서 전국 궤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6월 24일 공동파업 돌입을 위해서 6월 2-4일간 총파업찬반투표를 동시에 실시하였다. 이 투표는 도철, 대구, 인천지하철노조의 민주노총, 공공연맹 가입안건과 함께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 투표에서 민주노총, 공공연맹 가입건은 모두 가결되었으나, 도철에서 파업이 부결되어 공동파업대오에서 탈락하였다. 도철노조 집행부는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6월 24일 04시 대구, 인천, 부산지하철 3사가 동시에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부산지하철은 승무지부가 이탈함으로써 파업대오는 시작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부산지하철은 오후 6시 복귀를 선언하였다. 부산지하철노조 집행부 역시 파업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인천지하철은 강고한 파업대오를 유지, 파업 5일만인 6월 28일, 전동차의 내장재 05년 말까지 불연재로 교체와, 노사와 시민단체 추천 전문가로 이루어지는 ‘지하철안전자문위원회’ 구성과 부족인원 59명 충원 등에 합의, 파업을 해제하였다.
대구는 24일 노사간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수시간 파업이 진행된 후였으나 사실상 이미 합의기조였다. 대구지하철은 파업투쟁의 승리로 2.18 중앙로역 화재참사로 인해 주눅들고 침체되어있던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시민안전, 노동자 안전을 자신의 손으로 쟁취해냈다는 자신감은 현장으로 이어졌고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현장분위기를 창출하였다.
6.24 총파업투쟁은 모두들 알고 있다시피 2.18 중앙로역 화재참사가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2.18 중앙로역 화재참사는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공기업인 지하철에 어떤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형 참사였다. 그러나 대구시나 공사, 정부는 참사 직후부터 참사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현장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일관하였으며, 참사의 수습과정에서도 현장에 대한 은폐조작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6.24 총파업 투쟁을 가열차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최우선적 배경은 참사의 본질적 원인을 밝혀내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시민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근본적인 시민안전 대책이 마련되어야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도 확보될 수 있다는 점은 2.18중앙로역 화재참사가 노동자들에게 준 큰 교훈이었다.
노조는 총파업이후 조직적 신뢰가 더욱 강화되고, 총파업투쟁으로 인해 공사와의 힘 관계에 있어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04년 212일에 이르는 장기투쟁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IMF 이후 궤도사업장내 침투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을 타격하고 무력화시키는 것을 투쟁의 주요한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가 되었다. 외주용역화나 역무민간위탁을 철회하고 안전인력의 확보, 2인승무제 실시 등은 단위노조의 한계를 넘어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정치적 변화를 수반해야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다. 04년 궤도공동투쟁
1) 투쟁경과
7월 20일 전국 5개시 지노위를 매개로 한 지하철 5사 노사간의 협의는 전혀 접근점을 찾지 못하였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도시철도와 서울지하철 노사 양쪽에 21일까지 조정기간 연장을 요청하였는데 양 공사측은 이에 동의하였고, 양 노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서울지노위는 20시경 최종조정안을 노사 양측에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용자측의 최종 제시안 그대로였다. 임금은 정부 가이드라인대로 3% 인상, 주 5일제 실시에 필요한 근무형태와 인원증원은 노사합의로 용역에 맡기는 것이었다. 양 공사는 지노위의 이 최종 조정안을 수용하였고 양 노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23시경 지노위는 서울지하철과 노시철도 노사 분쟁사항을 직권중재에 회부하였다. 인천지하철 역시 직권중재에 회부되었고, 부산과 대구는 직권중재에 회부되지 않았다. 이로써 정부는 부산과 대구에는 노조의 합법파업의 길을 열어주고, 수도권 지하철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7월 21일 새벽 04시 전국의 지하철 5개사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부산지하철노동자 1,500명이 부산대학에 집결하였다. 대구지하철 800명은 월배기지에 집결하였다. 서울지하철과 도시철도공사, 인천지하철노동자들은 서울지하철 지축차량기지로 집결하였다. 서울지하철노동자 5,500명, 도시철도노동자 2,500명, 인천지하철노동자 300여명과 학생 등 지원역량을 합쳐서 8,500여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지하철공사 지축기지는 투쟁의 열기로 가득찼다. 열차를 정비하는 주공장은 저녁부터 밤까지 모여든 파업노동자들로 왁자지껄하였다.
서울 수도권에 소재한 서울지하철, 도시철도공사, 인천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지하철 지축기지 주공장에 함께 집결한 것이었다. 1만명에 육박하는 3개 지하철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파업투쟁을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지축기지 차량정비 주공장은 안정되고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어서 7월 하순의 폭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흥분되고 활기찼다. 서울지하철노동자들은 수차례의 파업경험이 있어서인지 비교적 태평스럽고 익숙하면서도 무질서했다. 도시철도 노동자들은 아직 젊고 별로 파업경험이 없었다. 다소 불안해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하였다.
그러나 파업 이틀째인 22일이 되자 파업대오의 일부에서 갑자기 술렁거리게 되었다. 대오의 일부에서 이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서울지하철노조 역무지부와 기술지부 조합원들은 20일 파업전야 집결시부터 상당수의 조합원들이 파업에 참여치 않았지만, 파업 이틀째인 22일 하루종일 파업대오에 참여했던 다수의 조합원들도 이탈해갔다. 역무와 기술에서 23일 오후까지 파업대오에 남은 조합원은 전체의20-30%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에는 4개 지부 산하 조직으로서 평균 조합원 200여명이 소속된 43개의 지회가 있다. 조합원을 일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지회장은 소속 조합원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런데 서울지하철노조 43명의 지회장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21명이 공사의 직접 조종을 받고 있다. 파업 직전에도 공사는 이들을 소집하여 파업반대, 인원동원 거부, 파업돌입 후 조기에 이탈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파업 이틀째가 되자 이들 지회장들은 본격적으로 이탈을 준비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파업현장에 퍼뜨렸다.
문제는 2천여명씩의 조합원을 거느린 4개 지부장 역시 동요하거나 패배주의에 젖어 있거나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파업돌입 이틀째인 22일 10시와 18시 두 차례 서울지하철노조 파업지도부인 중투본이 열렸다. 그런데 한창 파업투쟁에 기세를 올려야 할 이 시기에 중투본에서는 파업철회 여부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고 한다. 4개 지부장들은 파업철회를 적극 주장하거나 이에 동조하거나, 일부 지부장은 지부 내부의 파업대오가 무너져 내림에도 더욱 강경한 선도투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파업대오를 강력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투본의 이러한 기류는 한편으로 파업현장 조합원들의 파업분위기를 동요시키는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현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2일 저녁 7시 지축기지 운동장에서 열린 공투본 공동집회는 파업의 기세를 올리며 힘있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22일밤을 거치면서 파업을 계속하는 것으로 분위기는 수습되었다. 이튿날 23일 10시 차량지부 조합원총회를 통해서 파업투쟁의 기세를 올렸고, 승무지부는 23일 10시 현장간부 연석회의를 긴급히 개최한 이후에 각 지회별 조합원총회나 임원회의 등을 개최하여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22일밤 궤도공투본의 결정으로, 23일 인천지하철노동자들은 지노위의 조정안을 수용, 현장복귀하였고 공단측에서 일정 수준의 인원증원안을 내놓은 부산지하철과 대구지하철도 노사가 내용상 접근이 이루어지면 선 타결토록 지침이 전달되었다.
23일 오전 차량지부 3명 지회장이 <파업철회 현장복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파엽현장을 이탈하여 복귀하였다. 차량 3개 지회의 남은 조합원들은 즉각 지회장 직무대행을 선출하여 나머지 조합원들로 파업대오를 유지하였다. 기술지부 5명의 지회장 역시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23일 17시 지축기지 대운동장에서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총회가 개최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 4개 지부장이 투쟁결의를 밝히고 도시철도노조 4개지부장과 위원장이 연대사를 하면서 투쟁결의를 드높인 직후에 마지막으로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 대회사를 하였다. 그런데 위원장의 대회사에서 갑자기 <파업투쟁철회 현장투쟁>선언이 나옴으로써 집회장은 혼란에 빠졌다.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파업철회현장복귀선언>에 조합원들은 일제히 강력히 항의하였다. 위원장은 <파업투쟁철회 현장투쟁>을 선언한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사퇴하였다. 대의원대회에서 선출한 직무대행 역시 투본회의(60여명의 집행간부 참여)를 개최하여 다시 <파업철회 현장복귀>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장에서 조합원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였으나 결국 파업대오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도시철도노조의 파업대오 역시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7월 24일 아침 5시경 도시철도노조는 총회를 마친 후 도시철도 장암기지로 돌아가서 개최한 집회에서 현장복귀를 결정하고 집행간부들만 농성에 돌입하였다. 부산지노위는 23일 부산지하철노사분쟁을 직권중재에 회부하여 24일 이후 파업을 불법화하였다. 부산지하철은 24일 오후 교섭을 타결하였다. 주5일제 내용은 상당 수준으로 타결되었으나, 가을에 개통되는 3호선 대책은 부재한 채 공단에 맡겨졌고, 이후 공단의 전면적 구조조정공세의 빌미가 되었다. 대구지하철은 87일간의 기록적인 파업투쟁을 포함해서 212일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3호선 개통에 따르는 인원충원문제 등 주요 문제에 대한 사항을 ‘시민중재위원회’에 위임하는 것으로 하고 투쟁을 승리로 끝냈다.
2) 궤도공투 배경
02년 말경 도시철도와 대구, 인천지하철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게 됨으로써 이 노조들과 기존의 서울지하철노조와 철도노조를 묶어서 궤도연대가 발족하였다. 궤도연대는 02년 2월 대구지하철화재 참사 이후 지하철, 철도 안전을 실현키 위해서 공동투쟁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조직적 통일성을 이룩하기 위해서 철도, 도시철도, 대구 및 인천 지하철노조 공공연맹-민주노총 가입을 추진하였다. 03년 1월 철도노조가 공공연맹에 가입하였다. 6월 파업찬반투표와 함께 실시된 도시철도와 대구, 인천 지하철의 공공연맹, 민주노총 가입 찬반투표도 가결됨으로써 전국 궤도노동조합 6사는 모두 공공연맹, 민주노총 소속으로 되었다.
03년은 철도와 서울지하철을 제외한 지하철 4사 공동투쟁이 추진되었다. 부산지하철과 도시철도, 대구, 인천 지하철 공동투쟁이다. 철도는 별도의 임단협투쟁을 진행하였고 서울지하철은 대표적인 어용노조로서 이 공동투쟁에서 빠졌다. 그러나 이 공동투쟁은 03년 6월 도시철도노조의 파업찬반투표가 부결됨으로써 상당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부산, 대구, 인천 지하철은 6월 공동파업에 돌입하였다. 실제로는 부산지하철노조가 조합원 참여가 부진하여 사실상 파업이 실패하였고 대구지하철은 파업 몇 시간만에 당일 새벽 타결이 되었고, 인천지하철만 5일간 (불법)파업 이후 노사합의로 타결이 되었다. 어쨌든 이 지하철 4사의 공동투쟁 시도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04년 철도노조와 서울지하철노조가 포함된 궤도연대 전체(6사) 공동투쟁을 추진되었다. 궤도연대 공투를 기초로 해서 공공부문 내의 항공노조들과 연맹이 다른 화물, 택시, 버스 등과 최소한 시기집중 연대투쟁을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궤도연대 공동투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04년 상반기의 철도노조와 서울지하철노조 집행부 총선에서 민주집행부를 세우는 것이 전제되었다. 03년 6월 투쟁의 패배로 철도노조의 상황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철도노조 위원장 임기는 5월까지였으나 공동투쟁을 실행하기 위해서 3월초로 앞당겨 선거를 실시하였다. 3월초 철도노조 위원장선거와 3월 중순 서울지하철 노조 집행부 총선에서 민주집행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공투는 기본적으로 요구, 교섭, (파업)투쟁, 타결을 공동으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낮은 수위로는 시기집중 공동(연대)투쟁을 할 수도 있었다. 04년 투쟁에서 철도노조의 요구는, 공사전환과 동시에 기도되는 외주용역 등 구조조정을 분쇄함과 동시에, (공무원)연금을 퇴직금으로 보전하는 문제, 3조2교대 실시와 주5일제실시에 따른 인원채용 적정규모 확보와 정규직 채용, 100명에 이르는 해고동지 복직과 손배소해제 등이 중요하였다. 5개 지하철의 핵심적 요구는 구조조정 저지와 주5일제 쟁취였다. 주5일제 실시를 오히려 인원감축과 외주용역, 역사 민간위탁 등 구조조정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공사(공단)와 지자체(시)의 공세를 분쇄하고 적정한 인원을 증원하고 근무형태를 개선하는 제대로 된 주5일제를 쟁취해내는 것이었다. 철도지하철안전 확보와 공공성강화 역시 주요한 투쟁요구였다.
철도 지하철에 공통되는 핵심적인 요구의 내용은 구조조정저지와 주5일제쟁취로 요약할 수 있었다. 주5일제쟁취 공투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철도와 지하철 6개 사업장 노조의 투쟁시기를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철도노조는 05년 1월부터 공사화가 실시되고 주5일제 역시 이때부터 실행될 것이므로 집행부에서는 10-11월을 투쟁 고조기로 설정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5개 지하철은 03년 국회를 통과한 주5일제실시 법안에 따라서 지방공기업으로써 04년 7월 1일부터 주5일제가 실행되므로 그 이전에 교섭을 완료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공사(공단)가 일방적으로 주5일제를 7월 1일부터 (전체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실행하려고 할 때 이를 노조가 저지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데에 우려가 있었으므로 04년 6월말까지 주5일제실시 노사합의를 하든지 아니더라도 최대한 앞당기기를 원하고 있었다.
공투를 실현하려면 철도노조가 투쟁집중(파업예정)시기를 앞당기고 5개 지하철이 투쟁집중시기를 늦추어서 통일할 것이 필요하였다. 9-10월이 궤도연대 전체 사업장이 투쟁집중시기로 선택할 적절한 시기로 떠올랐다. 지하철 5개 사업장은 법률상주5일제 실시 시기가 04년 7월 1l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공사가 일방실시를 강행할 우려가 있었지만 공동투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이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철도 역시 공사전환과 3조2교대 근무, 주5일제 실시 등이 한꺼번에 닥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하고 많은 과제가 있었지만, 단순화하면 핵심문제는 역시 구조조정저지와 주5일제 3조2교대 근무 실시로서 쟁점은 인원충원 규모와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하는 데 모아졌다. 9-10월이면 서울지하철도 조직을 정비하여 투쟁을 준비할 시간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궤도단일노조 건설에 대한 방향도 가닥을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궤도연대는 이 투쟁시기 조정에 실패하였다. 철도노조가 3월초 위원장선거를 조기에 실시하였으나 상당기간 집행부를 제대로 꾸리지 못하였고, 지부장, 대의원, 지방본부 선거가 5월 중순까지 연이어 실시되었다. 철도노조는 투쟁집중시기를 앞당기기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지하철 5사가 명실상부한 공투를 추진하고 철도노조는 공투본에 참여하되 실질적으로는 지하철 5사 공투를 지원하는 체계로 나가게 되었다. 지하철 5사 투쟁집중(파업)시기는 7월 중순으로 결정되었다. 서울지하철은 전 집행부로부터 3월 말 업무를 인수받음으로써 전체적인 투쟁일정에 맞추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임에도 지하철 5사 공투를 위해서 서두르게 되었다.
3) 궤도공투의 진행과정
전반적으로 궤도공투의 투쟁일정은 상당히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4월 중순경 지하철 5사의 실무자들이 모여서 주5일제 실시를 위한 근무형태와 기준시간 등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이후 공동투쟁의 방침을 결정하고 공동요구안 마련과 투쟁결정, 집행기구를 구성하고, 공동교섭과 투쟁계획을 세워나갔다. 한편으로 각 노조 집행간부와 현장간부 수준까지 공동수련회와 결의대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연대의식을 함양하였다.
5월말까지(실제는 6월 3일) 각 노조의 요구안이 확정되고 6월 11일 궤도연대공투본이 출범하고 6월 17일 서울역에서 궤도공투본 전진대회를 개최하였다. 22일 5개 노조가 동시에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쟁의발생결의를 하고 23일 공동으로 중노위에 신고하고, 7월 5-7일 5개 사업장 전 조합원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동시에 실시하고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동총파업을 선언하였다.
7월은 대정부 교섭과 공동교섭 추진 및 전면 투쟁기간으로 설정하였다. 교섭방식으로는 개별 노조와 사용자(지방공사, 정부공단)간 교섭, 대정부교섭 추진, 해당 지자체와 교섭, 5개 지하철 노조 및 사용자와의 집단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정부 교섭은 노동부장관 면담으로 그치고 관련부서인 건교부, 행자부, 기획예산처장관과는 면담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담당 실국장과 건교부차관 면담 실현에 그쳤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부산, 대구, 인천 시장은 노사교섭 책임은 해당 공사(공단)사장에게 있다는 핑계로 면담조차 회피하였다. 시 담당 국장을 면담하는 수준이었다. 5개 지하철노사간 집단(공동)교섭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교섭에서 더욱 어려운 조건은 정부와 지자체장의 소속 정당이 다르고 서로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서울시장은 노무현정부와 대결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서 서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정도였다. 서울시장은 노사간의 협상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노동조합 대표와의 면담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의 흑자경영에 집착하여 인원증원 없는 주 5일제 실시와 이를 위한 근무형태 개악방침에서 좀체 물러서지 않았다. 서울시는 산하 양대 지하철의 노사교섭은 각 공사의 자율적인 권한사항이라고 하면서도 교섭에서 후퇴를 허용치 않고 강경한 대결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정부 역시 주 5일제실시를 위한 예산과 제도적 조치에 대한 준비가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 공사의 경영효율화를 위한 정부의 행정지침과 예산지침은 시와 공사를 억압하고 감사원의 감사 역시 공사를 조이고 있었다. 정부와 서울시 및 공사는 서로 책임을 미루며 핑퐁을 치는 격이었다.
6월 23일 궤도연대에서 중노위에 5개 지하철노조 공동으로 쟁의발생신고를 접수시키자 중노위는 각 지하철 사업장 소재 지방노동위원회에 이를 이첩하였다. 당시 중노위원장은 합법파업 가능한 것으로 언명하였고 이는 이후 궤도연대 지도부에서 합법파업이 전반적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오판을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궤도연대 공동파업 일정이 가까워지면서 사회적 긴장도 높아져가자 정부는 강경방침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대구, 부산은 합법 파업 허용, 서울과 인천은 직권중재 회부를 통해서 불법화시켰던 것이다.
정부 사이드에서는 전국 5개시 지하철노조의 합법파업이 미칠 사회정치적 영향 력을 고려하여, 시민의 불편을 빙자하여 불법파업을 방치한다는 야당과 수구언론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서 수도권 지하철노조 분쟁을 직권중재에 회부함으로써 불법화시켰고, 더구나 부산, 대구 지하철 파업은 직권중재에 회부치 않아 합법파업을 허용함으로써 지하철 5개 노조를 분열시키게 되었다. 또 부산 지하철은 파업시작 3일 후인 24일부터 다시 직권중재에 회부하고 대구지하철은 그대로 합법파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합법과 불법 파업 여부는 지노위, 중노위-결국 정부의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무기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4) 결과
서울지하철과 도시철도공사 임금은 지노위 중재로 넘어갔고, 주5일제 역시 지노위 중재안이 나왔다. 노사가 합의, 용역에 맡기고 그 결과를 가지고 노사가 합의로 결정하되, 합의 안 될 시에는 지노위가 결정하는 것이다. 서울지하철은 집행간부 사퇴 후 직무대행체제로 유지하다가 다시 선거, 새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주 5일제는 노사교섭으로 용역에 맡기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도시철도노조 역시 임금은 지노위 안대로 정리하였고, 주5일제는 용역에 맡겨졌다.
부산지하철은 04년 7월 21일 파업초기에 직권중재에 회부하지 않고 있다가 23일 직권중재 회부 24일부터의 파업을 불법화하였다. 집행부는 서둘러 타결하였고, 합의안에는 신설구간인 3호선 인원충원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 파업해제 이후 공단은 전면적 구조조정 공세를 해 왔고, 노조는 이에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1호선 중정비 외주화, 기술 대폭 외주화, 역사 자동발매기 설치 후 무인매표화, 입환기관차 외주 발주 등 구조조정을 전면화하는 데도 집행부는 거의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현장의 불만이 팽배해지고, 결국 4월에 인사관련 노사협약사항과 함께 위원장 신임을 물어서 과반수 획득 못하고 퇴진, 다시 선거를 실시하였다.
대구지하철은 합법파업이긴 해도 04년 7월 21일부터 05년 2월 17일까지 파업 87일을 포함해서 212일간의 끈질긴 투쟁을 해왔다. 87일 파업은 공익사업장인 발전산업 37일파업과 합법파업인 사회보험노조 84일 파업을 넘어서는 기록이다. 가열찬 투쟁의 결과 대구지하철은 3호선 개통에 따른 인원충원은 시민중재위원회의 중재에 따르기로 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기존 운영부분 인원충원 역시 상당한 규모에 이르는 등의 성과를 얻었다.
5) 간단한 평가
지하철 5사 노조 2만 노동자가 공동 총파업투쟁을 실행한 것 자체가 노조운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03년과는 달리 5개 지하철노조 전체가 공동파업에 돌입하였고, 3일째까지 공동파업대오를 유지하였다는 것 자체가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동파업투쟁을 추진함으로써 지하철 2만 조합원의 투쟁의지와 자신감을 크게 높였다. 특히 도시철도노조를 포함해서 모든 노조가 파업투쟁결의를 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조합원 집회 참여율을 크게 높였다. 특히 부산지하철노조는 그동안 총파업집회참여율이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번 공투기간에는 최소한 1,300-1,500여명이 집회에 참여하였고, 파업시기에는 2,600여 조합원중에서 1,920명이라는 기록적인 인원을 집회에 참여시켰다. 도시철도노조 역시 조합원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파업농성대오에 참여하여 파업이 계속되는 사흘동안 이 대오를 견결히 유지하였다.
원래 주5일제를 인원증원 없이 실시할 뿐더러 오히려 인원을 감소시키고 근무형태를 개악하려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 각 시와 공사(공단)의 계획이었으나, 일련의 궤도공투의 과정은 공사(공단)와 지자체의 구조조정 기도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부산지하철과 대구지하철 신설노선 구간에 처음부터 구조조정 개념을 도입하여 공사 직할과 정규직을 최소화하고 차량정비, 기술, 역무의 주요 부문을 외주용역화하고 비정규직화하려는 기도에 일정한 정도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궤도공투는 전체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 투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남한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온 서울지하철노조가 취약성과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어용노조 4년반동안 지하철노조는 심각하게 무너져내렸고, 간부들의 계급의식, 연대의식, 정치의식의 천박함과 투지가 결여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궤도공투본과 지하철노조 공식회의단위의 결정을 거치지 않은 파업철회선언과 이 과정에서 드러난 연대의식 결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파업 참여 노동자의 절반이 이틀 만에 붕괴되는 모습도 이미 파업돌입 전에 예상되었던 것이다. 특히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임원과 지부장 등 상층 간부선에서의 상황에 대한 판단착오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동투쟁의 문제점은 서울지하철노조 취약성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4월 중순에서 7월까지 짧은 기간에 공동투쟁을 추진하다 보니 전체 투쟁일정이 무리하였다. 여기에는 03년 제정된 주5일제 법에 따라서, 공투본 참여 노조들이 7일 1일 공사 일방시행을 우려, 이를 저지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7월 말부터 휴가기간이므로 4월부터 지속되어온 투쟁을 늦추어서 8월중에 투쟁집중시기를 잡을 수도 없었고, 7월 중순까지 투쟁 분위기를 한창 고조시켜 놓고 8월 휴가기간을 쉬었다가 다시 9월에 투쟁을 재개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해가 되는 면도 있었다. 철도노조까지 참여한 공투를 짜지 못하다보니 자체 투쟁력에 대한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었다.
일정이 촉박하여, 이번 궤도공투는 노정교섭과 5개지하철노사 집단(공동)교섭 추진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집단교섭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쟁의발생신고를 하고, 심지어는 쟁의행위찬반투표와 공동파업선언을 해버린 것이었다. 5사 공동의 파업찬반투표가 끝나 공동파업 선언 기자회견을 한 이후인 7월 11일경에 집단교섭 일정을 잡는 등 무리한 일정잡기로 보인다. 공동교섭이 성사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되는 것이었다.
요구안의 핵심인 인원 증원 30%수준은 처음부터 과대하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주5일제 관련한 인원증원, 근무형태, 임금인상, 외주용역문제 등 주요한 요구안에 대해서 파업돌입시점까지 궤도연대 차원에서 수정안을 내놓지 않는 방침을 고수하였다. 각 단위 노조별로도 수정을 허용치 않았다. 물론 사용자(공사, 공단)측도 역시 완강하였고, 사용자측에서 근무형태개악과 인원감축을 통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철회하고 실질적으로 인원을 증원할 안을 내 놓으면 노조측도 수정안을 내놓겠다는 내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사용자의 다소간의 양보에 대해서도 수정안 내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였고, 스스로 능동적으로 앞서 수정안을 내면서 노사간에 교착국면을 풀려는 계획이나 시도도 없었다. 외주용역은 원칙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고, 근무형태 역시 민감한 문제로서 생체리듬을 깨지 않고, 노동강도가 강화되지 않고, 개악이 아니라 개선되는 전제위에서 수정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수준은 이번 투쟁에서 주요 쟁점에서 벗어나 있었고, 인원증원 역시 감소되지 않고 증원된다는 원칙하에서 30%충원이라는 수치를 줄인 수정안을 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전술적으로도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20일 서울지노위의 조정기간 하루 연장제안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태도로는 당연히 교섭타결은 불가능하고 파업돌입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된다. 이러한 전술을 선택할 경우 파업돌입 이후에도 교섭은 사실상 이루어지기 어렵다. 오직 힘으로 굴복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업동력이 견고하여 실질적으로 교통운행에 큰 장애가 생겨서 어쩔 수없이 서울시나 공사가 교섭에 나오고 양보안을 내놓기 전에 실질적인 교섭이 어렵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 생각했듯이 파업 돌입 이후에야 교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안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궤도연대 공투본에 참여하고 있는 각 노조의 내부적 조건이나 처한 상황이 서로 상당이 달랐다. 그러나 궤도공투본은 이를 감안 지도부에서 적절히 공동투쟁을 지도해낼 수가 없었다. 궤도공투본 자체가 스스로를 콘트롤하며 탄력적으로 투쟁을 추진해나가지를 못하였다.
7. 민주철도노조투쟁
가. 격변과 투쟁의 기간
철도에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은 미군정의 파괴공작으로 철도노조가 붕괴되고 어용노조가 들어선 이후 54년만이다. 민주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4년 가까운 기간에 철도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정부, 철도청과 노조 사이에 수많은 교섭과 투쟁이 일어났다. 철도노조는 05년까지 두 번의 파업을 하고 세 번의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02.2.27, 03.4.20, 04.12.3합의가 그것이다. 물론 그 이외에 무수한 노사, 노정교섭, 협의가 있었다. 파업 이후에는 위원장과 다수 간부가 구속, 해고되고, 수십억원의 손배소와 조합비 가압류 조치가 이루어지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되어 2기 임기에 3개의 집행부가 들어섰다.
먼저 정부의 철도민영화계획을 저지하여야 하였다. 01년 6월 철도노조 민주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시급한 과제가 철도 구조조정과 민영화저지였다. 어용 철노는 00년 12월 10일 노사정위원회 합의형태로 김대중정권의 철도민영화와 인력감축에 합의해주었던 것이다. 철도는 건교부 산하 철도청에서 철도공사로 되었다. 고속철도가 개통되고 철도와 고속철도가 통합되어 다시 건설(시설)부문과 운영부문 두 개로 나누어졌다. 건설(시설)부문은 건교부 산하 공단으로 되고 운영부문은 철도공사로 되었다. 정부정책은 철도와 고속철도를 통합, 건설부문과 운영부문 분리하고 <철도정책 및 투자결정>은 건교부에서 맡고, 철도청의 건설부문과 고속철도건설공단 통합하여 <철도건설공단>으로 전환하고, <운영부문>은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선로유지 보수>는 철도건설공단에서 맡을 것인지, 또는 운영회사에서 맡을 것인지 그 방침이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건설부문에서 맡는 것으로 기울고 있었으나, 정부의 민영화방침을 저지하고, 공사화를 수용하느냐를 둘러싼 철도노조 투쟁의 결과로서, 철도 이용시민과 노동자의 안전과 시설의 양호한 보수를 위해서 <선로유지보수>를 건설공단에서 분리하여 철도공사에서 운영토록 하였다(03.4.20합의).
청이 공사로 바뀜에 따라서 철도노동자들도 공무원신분에서 공사 직원신분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임금체계와 직급체계도 바뀌었다. 바뀌는 과정에서 복잡한 직급체계가 단순화되고 차별성이 완화되었다. 근무형태는 두 가지 변화를 한꺼번에 겪었다. 철도청시절의 주된 근무형태인 하루 평균 12시간근무인 1주야교대근무제가 하루 평균 8시간근무인 3조2교대제로 바뀜과 동시에 주 5일 40시간근무제로 단축되었다. 공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공무원 연금손실을 보전하는 문제 역시 주요한 쟁점이었다. 8시간근무 3조2교대와 주5일40시간노동제가 한꺼번에 실시됨으로써 근로시간 단축 이전의 임금을 보전하는 문제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였다.
근무형태가 바뀌고 주5일제를 실시함에 따라서 소요되는 추가 인력을 충원하는 문제가 큰 쟁점이 되었다. 정부는 오히려 구조조정, 인력감축을 추진해오고 있었고, 공사화전환과 주5일제실시에 소요되는 추가 인력은 구조조정을 통해서 절감된 인력으로 충원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정규직을 최소화하고 대다수 인원을 비정규직화하려고 하였다. 이 지점에서 노조와 정부, 철도청은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이 문제에서 노조는 힘의 한계를 느껴, 04교섭에서 8938명을 정규직으로 충원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2623명을 정규직으로 충원하는 데 그쳤고, 청이 주장하는 8천명에 가까운 소요인원의 나머지는 사실상 비정규직으로 채용케 된 것이다.
철도에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기 이전에 철도청의 민영화, 구조조정저지투쟁이나 노조민주화투쟁과정에서 해고된 동지들이나, 민주집행부 수립 이후 두 차례 파업으로 해고된 동지들의 복직과 75억원에 이르는 손배소를 취하하고 가압류를 해제하는 문제 역시 주요한 쟁점이었다. 그 이외에도 철도청의 관료화와 부패를 청산하는 문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권익침해와 산재, 불평등, 차별 등을 시정하는 문제 역시 중요하였다. 철도청과 정부가 노사, 노정간 기 합의사항을 이행치 않음으로써 끊임없이 투쟁을 촉발시키고, 진행중인 투쟁을 격화시키거나 타결을 어렵게 하였다. 기 합의사항 이행 역시 투쟁의 쟁점이 되었던 것이다.
나.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해외매각저지 공투본 투쟁(2002.2.25총파업)
김대중정권은 IMF관리하의 공황상황 이후 재벌, 금융, 공공, 노동 4개 부문의 구조조정사업을 소위 4개부문 개혁이라는 말로 추진하고 있었다. 01년 정권말기에는 특히 공공부문 구조조정, 사유화, 해외매각을 밀어붙였다. 담배인삼공사 등이 매각되었고, 한국통신과 포항제철은 이미 주식공개와 외국인 소유한도철폐의 형태로 거의 사유화(민영화)가 완료되어 있었고, 가스산업과 전력산업, 철도산업의 분할 사유화(민영화)가 강행되고 있었다.
공기업은 대개 국가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산업이거나 국민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갖는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은행, 외환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등 은행산업과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담배인삼공사, 한국통신, 한국전력, 가스공사, 철도, 지역난방공사 등을 포함하여 이 부문은 오랫동안 독점적 국가기간산업으로 유지되어 왔다. DJ정부는 외환위기상황에서 미국, 일본 등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은행 2개를 외국소유로 넘기고 국책은행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사유화함과 동시에 독점기간산업 역시 전면적으로 사유화하기로 협약을 맺었던 것이다.
사유화(민영화)는 대개 기업구조개혁과 선진기술 및 운영방안 도입, 효율성 향상과 IMF 구제금융지출로 바닥이 난 정부 공적 기금의 확보라는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공기업의 소유와 운영을 사적 자본에게 넘김으로써 그 사적 자본에게 독점적 초과이윤을 제공하는데 있었고, 반면에 일반 민중(국민)에게 과중한 부담과 위험, 불안을 초래하고 노동자에게 해고와 비정규직화 등 고용불안을 가져다주었다.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는 해외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도 참여가 무제한으로 열려 있음으로 인해서, 기술과 자본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해외 독점자본이 직접 인수하거나 국내 재벌기업과 컨소시엄형태로 공동 인수하거나, 해외 독점자본의 지배를 받는 국내 재벌기업이 인수하거나 하는 형태로 귀결되고 있었다.
철도노조에 민주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사유화위기에 놓인 국가기간산업노조가 함께 연대하여 ‘국가기간산업사유화해외매각저지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였다. 철도를 비롯하여, 가스공사, 발전산업, 한국전력, 한국전력기술, 지역난방공사, 한전기공 등이 참여하고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공공연맹과 한국노총 공공노련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한국노총 등이 ‘공공부문사유화저지지원대책위원회’를 구성, 이를 지원하였다. 철도노조는 민주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형식상 소속은 한국노총이고 사업은 민주노총 공공연맹과 밀접히 하는 등 중간적 위상에 있던 시기였다.
공투본은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와 해외매각 저지를 위해서 공동으로 내부의 조직, 투쟁력을 높이고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으로 대외 선전홍보, 토론회 개최, 기자회견, 정부 관계기관과 정당대표, 관계자 면담 등을 추진하였다. 대국민 사업과 대외 사업은 지원대책위원회가 적극 지원하였다. 공투본 투쟁은 철도, 발전, 가스를 중심으로 공동파업을 계획한 공동투쟁으로 추진되었다. 공투본은 몇 차례의 간부결의대회와 조합원 집회를 거쳐서, 02년 1월 청량리역에서 철도, 발전, 가스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1만2천여명이 모여서 결의대회를 개최하였고, 2월 25일 발전, 철도, 가스 공동파업에 돌입하였다. 가스는 서울대에 1천5백여명이 집결하고 발전산업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4천대오가 집결하였고, 철도는 건국대 5천명을 비롯하여 부산, 대전, 영주, 순천에 1만2천여명이 집결하였다.
한국가스공사노조는 26일 ‘가스산업의 구조개편의 방법과 시기를 노조와 협의’하는 것으로 사실상 민영화를 수용하고 위원장이 직권조인하자, 파업대오 내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나서 위원장은 사퇴하고, 직무대행이 들어섰다. 철도노조는 27일 노사정합의를 체결, 파업을 해제 현장에 복귀하였다. 그 합의내용에는 ‘철도가 주요 공공 교통수단’이고 ‘철도산업의 공공적 발전’에 대해서 공동 노력하기로 하는 등 철도민영화는 사실상 저지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등 합의내용만으로는 실패가 아니었으나, 발전과 함께 공동파업대오를 좀 더 유지하였더라면, 정부를 압박, 발전산업과 함께 비슷한 수준의 내용적 합의를 함께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공투본과 발전과 최종 합의없이 일방적 타결로 결정지은 것 등으로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공투본 공동투쟁의 전열상의 균열은 이미 앞서서 진행되고 있었다. 2.2.25파업투쟁을 앞둔 막바지에, 한국노총이 공투본과 지원대책위의 총리와 각 당 대표 면담계획을 무시하고 독자면담을 추진, 생색내기를 하고 있었고, 가스와 철도의 교섭을 한국노총, 발전산업의 교섭을 민주노총(공공연맹)에 분리 위임함으로써 각 교섭결과를 공투본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조정한다는 합의내용이 실행되는데 난관을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전산업노조는 이후 산개투쟁 등 창의적인 파업투쟁을 끈질기게 지속하여 국가 기간산업이라는 조건에서도 37일간이라는 기록적인 파업을 하게 되나, 최종 교섭을 위임받은 민주노총이 4월 2일 최악의 내용으로 노정합의를 이루고, 예정되었던 총파업을 철회함으로써 발전산업노조도 파업을 해제하게 되었다. 이후 이 투쟁의 실패를 책임지고 감옥에 있는 단병호위원장을 제외한 민주노총 임원 총사퇴가 이루어졌다. 발전산업노조는 이후 남동발전소 매각을 저지하고, 가스산업노조는 신규집행부가 02년 3월 19일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 공공연맹에 가입하고, 현재까지 가스공사 사유화를 저지해내고 있다. 철도노조의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 변경은 02.5.30대대회에서 차기 집행부로 이월되어, 02.11.6일 조합원투표로 가결되었다.
다. 03.4.20노정합의와 6.28파업
03년 철도노조투쟁은 철도노조 단독 투쟁이었다. 노무현정권이 서고 초기 철도노동자들 사이에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일정정도 존재하였다. 노무현정권 역시 다소 유화적인 노동정책을 쓰고, 평화적으로 문제해결토록 노력하였는데, 사실은 노무현의 미국방문 중 그 참모진에 의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노무현정권은 선거기간 개혁적 공약을 내걸고, 광범위한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고,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문제에 있어서도 사유화에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기도 하고, 애매한 태도를 취해서 적어도 사유화를 무모하게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정권 초기 다소 개혁적인 인물들이 청와대 등 정부기관 일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사유화된 전력, 철도 등이 실패하고 있는 해외 사례도 크게 드러나고 있었다. 국가기간산업사유화는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서, 이 저항을 공권력을 동원, 폭력적으로 진압할 경우, 그만큼 정권의 지지기반을 상실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철도노조의 4.20노(사)정합의내용은 상당히 성과적이었다. 1인승무철회와 인력충원,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 정규직 전환, 병점차량기지 외주용역화 철회, 해고자 45명 (신규입사)복직 등에 성과를 얻고, <철도개혁 및 공공성강화>항목에서는 기존 민영화방침 철회를 명시하고, <유지보수 기능>을 시설부문(철도시설공단)이 아닌 운영부문에 통합키로 명시하였다. 다만 철도청에서 ‘철도공사화’를 일방적으로 합의문안에 명기한 채로 합의문을 대외에 공개하고, 파업철회지침이 혼란스러운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합의타결 이후에 발생하였다.
‘철도공사화’는 노조측에서는 사실상 정부 및 철도청과 내용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조합원 속에서 공론화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내놓지 못한 것이었다. 이 점 분명히 교섭상의 핵심문제이고 조합의 방향이 서 있었음에도 미리 대중적으로 공론화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는 이후 건교부가 철도노조 태도의 성실성을 문제삼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합의 이후 건교부는 4.20합의에서 너무 많은 양보를 하였다는 판단을 하였고, 노무현 역시 해외순방중의 국내 노동진영의 파업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업 이후 건교부를 중심으로 해서 정부는 노사합의 내용을 무시하거나 형식적으로 처리하고, 철도개혁을 위한 입법화작업을 독단적으로 강행해 갔다.
철도노조는 4.20합의 이후 철도개혁을 위한 입법화작업은 정부에서 노조와 충분히 협의하고, 공청회 등을 거쳐서 9월 이후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할 것으로 판단착오를 하였다. 건교부가 6월 임시국회에서 일방적으로 입법화를 추진하자 노조는 당황하였다. 더구나 건교부장관은 연금감소분을 보전할 수 없는 듯이 공언함으로써, 합의사항을 어겼을 뿐더러 임금 감소마저 강요하는 정부와 청에 대해서 철도노동자들은 분노, 투쟁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노조는 즉각 총파업을 결정하였으나 유보로 동요하다가 조합원대중들의 분노와 투쟁열기의 뒷받침을 받아 강행하게 되었다.
6.28총파업은 전국적으로 조합원 1만3천명이 참여하는 등 높은 열기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집행부는 다시 정권과 비공식 교섭에서 파업해제 후 교섭하자는 제안을 받은 후, 아무런 문서상의 합의도 없이 파업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파업해제 후 정권과 철도청은 교섭에 응하지 않고, 현장조직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전면적인 탄압을 전개해 왔고 파업투쟁 패배와 조합원의 신뢰 저하로 철도노조는 많은 곤란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라. 04년 운수 연대투쟁
03년 철도노조와 화물연대는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철도노조와 화물연대는 03년노동자투쟁을 주도하였다. 철도노조는 4월 20일 파업을 결의한 투쟁에서, 화물연대는 5월초, 중순 전국을 뒤흔든 파업투쟁으로 승리하였다. 이 두 개 투쟁의 주요 이슈는 정부 정책적 해결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이들 노조의 교섭과 투쟁은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 되고 만다. 노무현정권 초기 아직 노동정책의 방향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는 다소 노동계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노무현이 미국에 가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의지가 정확히 관철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두 노조는 이후 재개된 6-8월 파업투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노무현정권은 노동자투쟁에 대해서 강경으로 방향을 정립하였다. 철도노조와 화물연대와 합의한 내용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합의사항 이행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철도노조와 화물연대는 분노하여 투쟁으로 나섰지만, 이번에는 둘 다 공권력에 의해서 철저히 격파당하게 된다. 철도 6월 28일-7월 1일 파업과, 화물 7월말 8월초 파업에서 철저히 탄압을 당해서 조직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이들 두 파업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똑 같이 4월-5월 파업(투쟁)에서는 승리하였고, 6-8월파업에서는 패배하였다. 4-5월 노무현정권은 철도, 화물 문제를 다소 유화적으로 풀려고 하였고, 6-8월은 강경 탄압기조로 나왔다. 4-5월투쟁에서 승리한 철도와 화물노동자는 전반적 상황파악에서 어두웠고, 이후 정부의 강경탄압기조에 대해서 철저히 분석, 대응하지 못하였다. 철도노동자들은 정부의 강경정책에 분노하였고, 화물노동자들 역시 절박한 생존권적 요구를 완화할 수 있도록 약속한 정부정책이 이행되지 않는 데 대해서 분노하였다. 화물노동자들은 아직 견고히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이전 투쟁승리 경험으로 인해서 승리에 낙관적이었다. 6-8월투쟁 패배 이후에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가중되었고, 철도노조는 조직이 이완, 무력화되고 화물은 조직력이 많이 파괴되고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끈질긴 투쟁과 조직 복구노력을 통해서 위기를 면하고 조직력을 상당 정도 회복하였다.
철도와 화물연대는 전국 물류를 수송하는 기간교통망이다. 03년 투쟁에서 철도가 파업할 때에는 화물이 대체수송으로 호황을 맞았고, 화물이 파업할 때에는 철도가 대체수송에 나서 화물노동자의 파업투쟁을 무력화하였다. 철도와 화물노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철도와 화물이 동시에 파업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03년 11월 운수노동자학교가 개최되고, 그 자리에서 운수연대가 발족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03년 초 이미 철도, 지하철 사업장의 모임인 궤도연대가 떠 있었다. 04년에는 철도, 지하철을 포함한 궤도와 화물, 택시, 버스단위를 합하여 운수노동자들이 공동투쟁 또는 연대투쟁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운수부문 전체의 연대투쟁이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상반기(7월 파업) 궤도(사실상 지하철)공동투쟁이 이루어지고 하반기에 철도, 화물, 택시의 낮은 차원의 운수공동투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운수공동투쟁은 03년 파업투쟁패배로 인한 피로감이 누적된 데다가, 조직적 손실이 아직 제대로 복구되지 않고 궤도 전 사업장이 참여치 못함으로써 강력한 공동투쟁대오를 꾸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운수단위 투쟁의 정당성을 선전홍보하고, 대정부교섭을 하고 공동집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해서 투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연대를 강화하였다. 이 공동투쟁으로 화물연대는 유류가 인상분 보전과 03년 합의사항 이행 등의 성과를 얻었다. 철도노조는 12월 3일 청과 합의 타결하였고, 1주야교대근무제를 3조 2교대 및 주5일제 40시간노동제로 전환, 공사전환으로 인한 연금 부족분 보전, 구 직급의 신 직급대입 등을 무난하게 이루었으나, 정규직 인력충원과 해고자복직 등에서 미흡하였다.
공사 산정 8천명이상의 소요인원 중에서 2천 6백여명을 정규직으로 확보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비정규직 채용을 열어놓게 된 것이다. 특히 임금보전문제에서 승무를 제외한 타 부문에서 임금 보전이 완전히 안 됨으로써 조합원의 불만과 비판이 높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금부문인준투표를 다시 실시하여 투표자의 53.4%의 찬성을 얻고 위원장 및 집행간부 신임투표실시에서 54.2%로 통과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8. 궤도노동운동의 현실과 전망, 과제
가. 노동운동 지형 변화
98년 11월 IMF관리하의 공황 이후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공세가 몰아치면서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에 격변을 몰고 왔다. 이 기간 자본의 거센 공격에 노동운동은 자신의 전망과 총체적 대자본 전략을 갖지 못하고 거의 개별적으로 저항하면서 각개격파되어 왔다. 그 결과로써 첫째, 노동관계법 제도 개악, 노사임단협 개악이 초래되고, 둘째, 노동자계급의 전면적 비정규직화와 이로 인한 노동자계급 내부의 심각한 계층 분열을 가져오고, 셋째, 노동조건 악화, 임금억압, 노동자권익 약화를 불러오고, 넷째, 노동운동이 무력화, 부패, 관료화, 기회주의화되었다.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처절한 노동운동 전락의 바닥으로부터 급속하게 확대된 비정규직, 열악해진 노동조건에 신음하는 비정규직들로부터 격렬한 노동자투쟁이 폭발하고 있다. 한편으로 역시 해고와 비정규직화의 위협과 근로조건과 임금수준의 저하, 정부로부터 통제강화에 직면한 교사, 공무원이 조직화되고 투쟁으로 일어서게 되었다.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현상은 이미 무수히 논의되고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겠다. 마지막의, 노동운동이 바닥에 쓰러져 다시 일어서려고 몸부림치는 현상은 현재 노동운동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전망을 열어낼 핵심 사항이 될 것이므로 좀 더 논의해보고자 한다. 우선 교사와 공무원조차도 구조조정과 비정규직화의 대상이 되고 임금과 근로조건의 악화와 경쟁과 통제가 강화됨으로써 이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있고, 이들 사이에서의 노동자계급의식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비정규직투쟁은 현 시기 노동자투쟁의 중심축으로 등장하였다. 비정규직화는 현 시기 한국사회에서 자본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는 핵심 전략축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노동자계급대중을 무한히 비정규직화하고,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를 고도화함으로써 자본은 현재 불안정하고 무기력한 한국경제에서 잉여가치 생산을 증대해서 자본의 재생산구조를 유지코자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정규직은 지속적으로 증대해서 이미 그 수에서 1400만 노동자의 60%이상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정규직은 고용상태가 불안정하고, 나쁜 노동조건, 저임금, 사회보장의 박탈, 비인간적 대우, 높은 산재위험 등 70-80년대 노동자계급대중 일반이 놓여있던 상황과 마찬가지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자본의 정권은 노동자계급대중을 전면적으로 비정규직화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개악입법 제정을 강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와 탄압에 저항, 비정규직의 권리를 찾고, 비정규직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비정규직 개악입법을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나아가서 이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폭발하고 있고 이러한 비정규직 투쟁이 현재 노동운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비정규직철폐투쟁은 현재 노동자투쟁의 계급적 본질을 구현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전략적 중심축이 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일부 제조업에서와 같이 결집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단히 다양한 산업, 직종, 지역에 개별적으로 또는 소수로 흩어져 있다. 노동조합으로 단결, 투쟁하기에 제도적, 비제도적 제약이 많고 자본과 정권의 탄압과 방해가 심하다. 그러므로 이를 광범위하게 조직하여 투쟁으로 묶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전반이 참여하는 총체적 계획에 따라서 목적의식적으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 시기 노동운동의 주요 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산별노조운동은 이를 위한 주요한 운동형식이 될 것이다.
나. 궤도노동운동의 침체
04년 궤도 공동파업의 패배와 그 이후 대응의 약화로 지하철 각 사업장은 전반적으로 어려운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첫째, 주5일제실현에서 그 내용이 미흡한 상태에 머물렀다. 대체로 소요 인원증원과 근로조건이 개선된 제대로 된 주 5일제를 실현치 못했다. 서울지하철은 아직 주5일제 실시를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파업패배 이후 전면화된 자본측의 구조조정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거의 자본의 의도가 관철되고 있다. 부산지하철 3호선, 대구 2호선과 인천 지하철 등 전반적 외주용역화, 비정규직화 실행에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지하철 각 사업장은 팀제와 성과급제, ERP제 등 전면적 효율화와 정보화가 거의 자본의 의도대로 관철되고 있고, 내부 노동자 사이의 경쟁체제 도입이 추진되고 노동자는 주체이기보다 잉여가치 착출의 단순한 대상화해나가고 있다. 셋째, 지하철 각 사업장에서 집행부가 전반적으로 교체되었고, 새로 들어선 노조 집행부들은 대체로 노사협조주의 성향을 띄게 되고, 노조는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철도노조는 06년 3월 파업투쟁을 대체로 성과적으로 해냄으로써, 공공철도 실현에 한걸음 다가섰고, 정부와 공사가 집요하게 추구해온 철도 구조조정을 상당정도 막아내거나 완화시켰고, 무엇보다도 철도노동자들의 내부적 단결과 집행부(지도부)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문제를 투쟁의 핵심의제로 끌어내어서 부각시키지 못하였고, KTX여승무원 철도공사 직접채용투쟁이 주요 현안과제로서 남게 되었다. 철도현장에서도 지사개편, 팀제, 외주용역과 비정규직화라는 자본의 구조조정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대결, 저지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궤도노동운동 상태는 대단히 좋지 않다. 궤도노동현장은 지금 난관에 처해 있다. 현재 궤도노동운동이 전면적으로 약화된 원인은 무엇인가?
궤도노동운동의 약화에는 무엇보다도 80-9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서 왔던 서울지하철노조의 약화가 그 중심에 있다. 서지철은 너무 노화되고 내부적으로 무너져 있다. 서울지하철이 정체되고 심지어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은 서울지하철이 민주노운 중심에 서 왔으나 끊임없는 자기혁신 발전의 기제를 내부에 갖추지 못한 데 기인한다. 주체적 발전의 전망을 세워 간부와 조합원들을 단련시키면서 자신과 노동운동 전체의 앞길을 열어나가는데 앞장서지 못하였다. 서울지역에서 확장되는 지하철 2기, 3기 노선의 노동자들을 자본에 앞서서 장악해내고, 철도 등 다른 궤도 사업장노조 민주화시기를 앞당기거나 신규사업장에 신속히 민주노조를 세우는 적극적이고 계획적이며 선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의식, 노동자,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켜 나가고 투쟁적이고 변혁적 당건설을 앞장서서 구체화해나가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로써 궤도분야 다른 사업장을 장기간 보수정권과 자본의 통제 아래 방치하고, 스스로 상대적으로 정체되고 노후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지하철노조 역시 많이 지쳐 있거나, 노동운동의 전반적 퇴조기에 탄생한 신생노조의 경우, 아직 경험이 적고 단련되지 못하였다. 철도노조는 2만 5천이라는 규모, 전국 철도망을 망라하고 있는 사업장이라는 특성 이외에도 최근 민주화되고, 끊임없는 확장과 새로운 인원 채용을 통한 상당정도의 신규인원 공급 등으로 활력을 띄고 있으나, 내부 조직력과 지도력이, 궤도 운수와 전체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서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해낼 만큼 역량이 성숙되지 못하고 있다.
다. 궤도노동운동의 과제
궤도노동자들의 당면 현안과제는 구조조정저지와 공공철도 지하철 실현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궤도사업장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집요한 자본의 공세를 저지하는 것이다. 인원축소, 내부경쟁강화, 효율화, 외주용역 자회사화를 막아내고 궤도교통의 공공성을 쟁취해내야 할 것이다. 자본은 이미 철도사업법을 제정하여 신설 영역에서부터 사유화를 실행하며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 서울지하철 3기 9호선과 인천 지하철 2호선 및 신공항철도가 이미 사적 자본이 참여하여 건설되었고, 그 운영 역시 사적 자본에게 넘어가고 있다.
궤도노동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궤도교통 영역 현장에서 자본의 구조조정을 분쇄하고 공공성을 쟁취키 위해서 싸우는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한국사회 전반에서 자본과 권력의 사유화, 상업화 기도와 계획을 분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자본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궤도노동자들은 한국사회 전반의 궤도교통분야, 나아가서 운수분야를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서 재편할 전략을 가지고 총체적 전망 속에서 투쟁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하나의 사업장의 투쟁은 그 전체적 투쟁의 일부로 배치해야 한다. 운수공공산별노조 건설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통일성을 추구해 나가고, 정치투쟁을 전면화해 나가야 한다.
현 시기 노동운동 전반의 과제인 비정규직을 철폐하고, 노사관계로드맵과 한미 FTA를 저지해내는 것 역시 노동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바로 우리 궤도노동자들의 과제이다. 이것은 궤도노동자들의 권익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이 투쟁에서의 승패 여부는 노동운동 전체의 판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궤도교통은 도시에서나 전국적 규모에서나 확장되고 있고, 대중교통 및 화물운송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크고, 더욱 증대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가까운 장래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량수송, 환경을 덜 오염시키는 교통, 대중교통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궤도교통의 자동화가 더욱 진전된다고 할지라도 궤도교통 영역은 앞으로 여전히 상당한 규모의 노동자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궤도부문의 노동운동은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하고, 또 운수분야나 전체 노동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상당한 수준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궤도노동운동이 현재의 침체를 극복하고 새롭게 활력을 회복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80-90년대 서울지하철이 담당하던 노동운동에서 갖는 상당한 몫을 이젠 철도가 담당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미 궤도노동자들만으로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단결하던 시기는 지나갔다. 보다 폭넓은 운수노동자, 운수공공노동자들의 단결, 나아가서 전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단결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 요청되고 있다. 노동자계급대중을 고도로 착취하고 노동운동을 자본의 입맛대로 요리하려는 자본의 전면적이고 집요한 공격에 의해서도 이러한 노동운동의 대응방향은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 단결의 형태가 급속히 발전하고 노동운동의 인식이 크게 전진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이에 대응하는 방안의 핵심적인 축이 비정규직철폐투쟁과 산별노조건설의 축이다. 비정규직철폐투쟁을 중심축으로 세움으로써 새로운 노동자계급단결과 투쟁의 전망을 열고, 산별노조건설로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단결의 흐름을 창출해내고 노동자정치투쟁을 전면화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궤도노동자들 역시 이 시대적 요청을 실현하는데 중심에 서 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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