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22호 <현장과광장> 2호 독자후기 희망과 대안을 읽다

은영지 ㅣ 평화 활동가

지독한 근시에 노안까지 겹친 데다 공간지각 능력마저 부족한 탓에 길 찾는 데는 도통 젬병이었다. 운전할 때 더욱 그러해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가 도로 위에서 미아가 되는 위험천만한 일이 잦았다. 이럴 때 내비게이션이 구세주 역할을 한다. 그녀의 짜증 섞인 길 안내를 받으며 위기를 모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란 사람은 물리적인 길만 헤매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 대한민국이라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라에 태어나 외세에 끌려다니는 비굴한 분단 조국의 꼴을 봐야 했고 끝없는 자본의 횡포로 내 앞에 있는 밥그릇 걱정만 한 적도 많았다. 자본주의라는 반동체제의 난민으로, 무기력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숱한 길을 헤매고 다니다 머리카락 희끗희끗한 나이를 먹어버렸다. 이른바 전망과 대안을 찾으러 얼마나 여기저기 뒤적거리고 들쑤시고 다녔는지. 아직도 방황하는 내게 ‘현장에서 눈물 흘려가며 피 터지게 싸우며 생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현장과 광장>은 다양한 쟁점들을 접하는 통로 중의 하나로 시대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고 있다. 주옥같은 선언과 현장의 글들이 풍성하게 담겨있었다.

냉큼 받아든 이번 호 표지에서 <현장과 광장>이라는 책 제목보다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 라는 다소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스포츠가 연상되기도 하는 글귀가 더 눈에 들어왔다. 쿠바의 영웅 체 게바라가 혁명의 불씨를 지피고자 아프리카 콩고로 떠나면서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에게 남긴 유명한 혁명표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묵직한 감동이 밀려들었는지.

새로운 세상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죽는 날까지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 싸움’이라는 체 게바라의 시는 언제 읽어도 유효한 삶의 좌표로 와 닿는다. 쿠바에 체 게바라가 있다면 우리에겐 영원한 혁명 시인 김남주가 있다.

봄이 오고 또 봄이 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강

정녕 풀 길이 없음인가 사람들

손 시려 호호 입김만 쐬고 있네

(중략)

그러나 과연 풀 길이 없음인가 벗이여

나에게 다오 혁명적 조직을

얼어붙은 강물 으깨어 놓을 테니

살아생전 늘 허름한 잠바 차림으로 투쟁을 외치고 다니던 김남주 시인의 강인한 호흡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오는 듯하다. 그리고, 또, 우리에겐, 성주 소성리에 기거하며 사드철거 투쟁에 열정을 바치는 고희림 시인도 있다. ‘네팔에서 온 테즈 바하두루 구릉씨와 처발 랄 차우다리씨 영전에 바침’이라는 부제가 달린 ‘돈으로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직설화법으로 쓰인 그의 시는, 못된 한국의 자본주의가 이주노동자들을 죽음에 몰아넣는 폭력과 착취구조에 대해 성찰하는 글이자 투쟁선언문으로 읽힌다. ‘이주노동자들이 한 달에 300~400시간 일하고 130만 원 받는‘ 것도 충격인데 ’날마다 죽어 나가는’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처해있다는 것도 섬뜩하기까지 했다.

정화조 청소부 테즈 구릉씨와 차우다리씨가 죽었어요

시인은 작정이나 한 듯 이렇게 시작하여 읽는 이들의 가슴속을 후벼 파고 있다.

‘거 손가락 몇 개 잘린 거 갖고

무슨 산재입니까?’

자본의 꽃밭에 솜방망이 법전이라

돈으로 사람을 마구 때려

죽은 목숨인 노동자의 심장에 법칼을 찔러

돈에 맞고 돈에 멍든 주검 앞에서

신자유주의 근육은 더욱 자라고

이런 식으로 노동자도 살고

이주노동자도 살고 또 죽어가는 겁니다 (중략)

“이게 말이 되냐”고 한껏 핏대를 세워 보지만 이윤만 챙길 수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천민자본가들이 득실거리는 야만적인 세상에서는 말이 된다. 매일 여섯 명의 노동자들이 퇴근을 하지 못하고 일 년에 2000~3000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는다는 절망적인 세상이다. OECD 국가이고 전 세계 211개 나라 중에서 GDP 11위라고 선진국 진입이니 뭐니 입에 침 튀겨가며 자랑질하는 정치인들의 번들거리는 수식어로 가려져 있는 추악한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일일이 까발리자면 날 밤새야 할 우리 사회가 아니던가. 조급증이 있어서일까? 귀때기 새파랄 때부터 보고 듣고, 간혹 길거리에서 돌 던지며 저항하기도 했던 이 땅의 구조적인 모순과 야만에 대한 나의 분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라는 게 참을 수 없다. 겉으론 풍요와 화려함으로 덧칠돼 있으나 착취와 차별구조를 방치하다가 자본주의가 벼랑 끝에 와 버렸고 망할 일만 남았다.

현대사상연구소 홍승연 소장의 ‘오늘의 사회주의’에서 명쾌한 해답을 찾았다. 맑스ㆍ엥겔스 이론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지적하고 대안으로 홍 소장이 제시한 사회주의라는 희망 섞인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는 오늘의 엄청난 생산력으로 그러한 지옥을 만들어낼 자본독재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을 것인지, 자본독재를 넘어서 누구나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고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와 있다. 한 세기 전 룩셈부르크가 던진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물음이 다시 절실해졌다. 자본주의 자체가 사회주의 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부활하고 있다. (본문)

그는 다분히 선언적으로 사회주의를 부르짖고 있지 않았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망상과 우리 사회의 허점을 꼬집고 과학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자본 권력의 저항을 제압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동자 국가건설’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실질적 구현이자 사회주의 사회,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가는 일차 관문인 ‘노동자국가’야말로 반동적인 자본주의를 뒤집을 희망과 대안이라는 그의 견해가 절박한 이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주의를 꿈꾸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회의를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나조차도 그런 부류에 속하지만 그 작은 희망을 품게 해주는 사회주의 모델이 지구상에 정말로 있다. 쿠바이다. 세계 곳곳을 침략하여 패권놀이를 일삼던 미국에 대항하여 혁명을 완수한 나라 쿠바와 베트남에 특별한 애착을 느껴온 송필경 범어송치과 원장이 내놓은 쿠바 여행기를 얼마나 신나게 읽었는지 모른다.

베트남은 미국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나라이지만 쿠바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미국을 쫓아내며 승리를 거두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철저하게 경제보복을 당해 궁핍과 고난의 시기를 견뎌내야 했지만 70년 이상 군사주권을 빼앗긴 분단국가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우리에겐 쿠바의 당당함과 저항정신이 우러러 보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민의 삶을 국가가 책임지는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로 세계 최고의 모범국가로 이름이 나 있는 사회주의 쿠바를 만들어온 건 ‘혁명의 미래’를 꿈꾼 체 게바라의 영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비에트가 해체된 후인 1990년대에는 국가의 예산이 40%나 줄고 경제위기가 의료위기로 이어질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국방예산을 깎아 의료비를 충당했다는 내용에서는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 제국주의에 굴복한 채 서민에 대한 복지정책은 나 몰라라 하고 허구한 날 전쟁연습이나 하며 군사력을 키우는 우리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피델은 현명하게도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한 체 게바라의 정신을 미래 혁명의 횃불로 삼았다. 아직도 진행하는 쿠바 혁명은 과거 현재 미래가 어울린 삼위일체였다. 과거는 호세 마르티가 현재는 피델 카스트로가 미래는 체 게바라가 맡았다. 혁명의 실제 권력을 현재인 피델이 독식하지 않았다. 세계 혁명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쿠바와 체 게바라)

송 원장의 말대로, 천박한 자본주의 습성과 미국산 렌즈를 끼고 바라보면 가난하고 폐쇄되고 독재에 신음하는 국가로 보이겠지만 혁명이 진행 중인 쿠바가 전해주는 인간적인 얼굴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밑줄 좍좍 그어가며 새겨야 할 대목으로 읽혔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페미니즘을 여성해방론과 동일시하고 착각하는 운동가들에게 진정한 여성 문제는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 가능하다는 천연옥 노동과사회과학연구소 부산지회장의 글 ‘노동운동과 페미니즘’도 울림이 컸다. 그는 “남성에 대립하는 여성을 전제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에 대립하는 여 남 노동자의 단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여성억압의 기원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 기인한 남성의 지배가 아니라 사적 소유의 발생 발전에 따른 사회의 경제적 관계에 있다.”라고 했다.

천 지회장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유물론적 페미니즘의 문제점과 한계를 제시하고 노동자 계급의 해방 사상으로서 맑스주의, 사적유물론, 과학적 사회주의 입장에서 대안을 내놓았다. 그의 글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콜론타이 등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의 활동이 여운을 남겼다. 남성에 대항해서 단결하자고 외치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에게 “부루주아 남성이 기생충이라면 부루주아 여성은 기생충의 기생충”이라는 로자의 일침은 투쟁대상을 제대로 짚으라는 웅변으로 들렸다.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온갖 차별의 전시장이 되어버린 한국의 노동시장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요지경 속을 극복하기 위해 여ㆍ남 노동자가 단결하여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건 필연으로 보였다. 독일통일 후 동독 여성들의 처지가 전보다 더 열악해졌고 한국보다 경제력이 뒤처지는 북한의 보육과 모성보호가 우리보다 훨씬 앞선다는 천 지회장의 예시에 답이 들어있었다.

나 역시 20대 후반에 여성 운동권에 몸담은 걸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여성에 대한 주변 남성들의 작은 편견적 시선에도 성토의 목소리를 내며 싸우려고 덤벼들었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을 포함한 진보적인 여성 운동계가 목소리만 컸지 계급적 인식이 허약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대부분의 여성 역시 최하층에 속하는 실업자,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자본주의의 차별구조에 억압당하고 있으나 운동적 차원에서 그 구조를 깨는 노력이나 투쟁은 미미한 수준이였던 것이다. 하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이 선거 때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 진보적인 여성 운동가들이 진보정당을 외면하고 민주당 같은 잘 나가는 정당에 들어가는 행동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성운동으로 확보한 유명세를 발판으로 입신양명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등 단체장에 의한 성폭력 성추행이 연일 폭로되었음에도 그들은 피해자 편에 서서 싸우기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였다. 지난 2월 급진적 페미니즘 성향의 여성 활동가들이 총선을 앞두고 창당한 ‘여성의당’은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활동자금을 구걸하는 광고를 실은 웃지 못할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있다.

“이부진 사장님! 신라호텔 애플망빙을 더 사 먹을 수 있도록 딱 1억만 돌려주세요. 한국여성의 미래에 투자하세요.” “정유경 사장님! 전국 신세계 단골들에게 딱 1억만 돌려주세요.”

여성을 위한다는 명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변혁적 관점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작부터 부루주아 체제의 온실에 안주하려는 또 다른 구태정치의 모습이 엿보여 속이 불편한 건 나뿐일까?

무엇보다 <현장과 광장>이 보여준 미덕은 현장성이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맞서 24년간 싸우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강남역 사거리 0.5평밖에 안 되는 좁은 철탑 위에 올라간 김용희 동지의 355일 투쟁기록도 아프게 만났다. 문재인 정부하에서도 계속되는 노동자의 죽음 행렬에 항의하는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의 고발 글도 분노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양 위원장은 2018년 법무부의 살인 단속 현장서 숨진 미얀마 딴저테이 노동자, 2019년 서울의료원서 간호사 태움으로 자결한 서지윤 간호사, 고 마사회 문중원 노동자 투쟁을 얘기하면서 죽음을 통해 현장의 부정과 비리를 항변하고자 한 열사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노동자 민중이 투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최근 몇 개월간 대우 거제 조선에서 4~5천 명이 해고당했다고 한다. 그에 딸린 가족을 합하면 적어도 1만5천 명의 목숨줄이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언론에선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제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가져온 경제위기라고 떠들어대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노동존중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으나 자본과 재벌의 마름 노릇이나 하며 노동법 개악을 하고 노동계급을 소외시키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의 산물이다. 재벌들은 1000조나 넘는 돈을 금고에 쌓아놓고 고용과 투자를 게을리하면서 해고라는 칼바람을 휘두르고 있고 정부는 구경만 하고 있고 노동자 민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영풍석포제련소가 자행해온 환경파괴의 참상을 깊이 있게 다룬 진진수 환경활동가의 글도 가슴 졸이며 읽었다. 영풍문고로 알려진 영풍그룹의 영풍석포제련소는 1천3백만 영남인의 식수원인 낙동강 최상류 봉화 계곡에 축구장 70여 개가 들어설 수 있는 엄청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1930년대 일본의 미쓰비시가 광업소를 설치, 채굴하다가 해방이 되자 국가 소유로 넘어간 것을 영풍이 채광권을 따내 채굴한 아연을 일본 제련소로 수출했다. 70년대 일본은 광산과 제련소에서 배출된 카드뮴에 의한 중독으로 이타이이타이병 등이 사회문제가 되자 폐쇄하고 영풍에 떠넘겨 낙동강 상류에 제련소를 가동, 낙동강 오염의 주범이 되고 있다. ‘하루평균 폐수 배출량 1,400톤, 황산화 물질과 비산먼지 등 연간 발생하는 대기오염물질 43만 톤, 카드뮴 염산 황산 등 9종류의 유독물 제조 및 사용, 지정폐기물 8종 및 일반폐기물 11종 배출’이 제련소의 오염 성적표이다.

각종 치명적인 중금속으로 인한 수질, 토양, 공기 오염은 상상을 초월하고 주민피해도 심각할 뿐만 아니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사고가 빈번하지만 산재나 직업병으로 인정받은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이른바 한국자본주의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안고 있는 영풍제련소가 온갖 불법과 착취를 자행하는 이면에 ‘환피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 품질의 아연 뒤에 숨겨진 비극과 고통, 착취, 살아내기 위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딜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 그 기업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지역경제, 기업 횡포를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관료들, 이 모든 것이 뒤엉킨 영풍석포제련소의 문제를 진 활동가가 잘 짚어주고 있다.

<현장과 광장>이 드러낸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돋보기를 들이대면 결론은 하나였다. 불치병에 걸려 악취 나는 암 덩어리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코로나19 대유행이 자본주의 몰락을 초래하고 있다고 손미아 강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외쳤다. 손 교수는 자본주의 최후를 진단하면서 ‘노동자 계급과 민중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토대를 기쁘게 마련하자’라고 주문했다.

투쟁현장에서 참으로 많은 동지를 만났다. 팔뚝 높이 치켜들고 세상 떠나갈 듯 함께 외쳐대는 분노의 함성만으로도 에너지가 충전되고도 남았다. 이들을 <현장과 광장>에서 재회한 반가움과 설렘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향한 희망과 대안을 쏟아낸 다부진 이론들을 보며 우리 노동계급이 결국 뭔 일을 낼 거라는 믿음직스러움이 들었다.

여기는

밤의 빈 청사

우리가 접수했다

본디 여기는 민중의 집강소

민중의 집이다

우리가 노동을 지킨다

여기는 맨바닥

끝내 세상을 바꾼다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온전한 노동 3권, 노동법 개악 중단을 외치며 2019년 10월 서울노동청을 점거 농성하는 해직교사들의 결기를 외친 조창익 본지 편집위원장의 시 ‘독백’의 일부다. 억겁의 시간을 그 자리에서 묵묵히 견뎌내며 무수한 생명체를 잉태해온 찰진 흙과 물, 바람처럼 ‘우리가 노동을 지킨다. 끝내 세상을 바꾼다’라는 시인의 외침도 든든한 위로이고 변증법의 귀결이었다.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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